━━ 지성을 위한 ━━/역사와인물 2609

왕건(王建)이 지역차별을 했는가

歷史 Essay 1384 ☞ 왕건(王建)이 지역차별을 했는가 차현이남(車峴以南) 공주강(公州江) 밖 출신자들에게 벼슬을 주지 말라는 8조에서의 그 지역은 현(峴)은 령(嶺)과 달리 작은 고개를 말하는데 이 말을 차령산맥(車嶺山脈)으로 확대 해석한 것으로 호남 전체가 아니라 궁예(弓裔)의 세력 기반이었던 청주(淸州)를 가리키는 말이다. 이 지역 출신들이 왕건(王建)을 끊임없이 괴롭힌 것은 사실이다. 환선길(桓宣吉)과 이흔암(伊昕巖)이 918년 즉위 해에 반란을 일으켰다가 처형되었고 역시 청주 세력인 임춘길(林春吉) 진선(陳瑄) 등이 반란을 일으켰다. 왕건이 즉위 다음 해 궁예의 근거지 철원(鐵原)에서 자기의 원래 기반인 개성(開城)으로 천도한 이유도 궁예에 의해 철원이 청주 출신 세력들의 근거지가 되어 통..

왕건(王建)은 호남을 우대했다

歷史 Essay 1383 ☞ 왕건(王建)은 호남을 우대했다 태조(太祖)는 943년 승하하기 전 훈요십조(訓要十條)를 남기는데 그 중 8조를 잘못 해석해 지역차별의 원조라고 하는데 억측이다. 덕치(德治)로 피흘리지 않고 후삼국을 통일하고 각 지방 호족들을 고루 끌기 위해 29명이나 되는 부인을 거느리는 혼인 정책을 쓴 왕건이 지역차별을 지시했을 리 없고 초기 고려(高麗)는 실제로 호남 출신들이 주도했다. 2대 혜종(惠宗)의 어머니 장화왕후(莊和王后 893-934), 복지겸(卜智謙) 927년 영천(永川) 전투에서 왕건 대신 전사한 신숭겸(申崇謙) 최지몽(崔知夢) 도선 국사(道詵國師) 등도 호남인이고 심지어 호남 출신인 태자의 입지가 약해지자 그 후견인으로 지목하고 훈요십조를 전해준 박술희(朴述熙 ?-945)..

유검필(庾黔弼) 장군 ① ②

歷史 Essay 1381 ☞ 유검필(庾黔弼) 장군 ① 918년 왕건(王建)이 고려를 건국하자 최응(崔凝)이 궁예(弓裔)의 신임을 받던 평주(平州 -平山) 출신 유금필(庾黔弼) 장군을 소개한다. 그 때부터 삼한통일에 가장 큰 공을 세운 그의 대활약이 시작된다. 920년 동북방의 성을 축성해 여진(女眞)족을 막아내고 925년과 928년 태조가 조물군(曹物郡)과 고창(古昌-安東)에서 견훤(甄萱)의 군대와 전투할 때 태조(太祖)를 도왔다. 931년 참소를 당하여 곡도(鵠島-白翎島)로 귀양갔는데 이듬해 후백제의 상애(尙哀) 등이 서산의 대우도(大牛島)를 공격하자 곡도와 포을도(包乙島-大靑島)의 장정을 선발하여 군대를 편성하고 전함을 수리하여 방어했다. 그 다음해 후백제군에게 공격받는 신라를 구하라는 태조의 명을 ..

신라 경순왕(敬順王)과 고려 태조(太祖)

歷史 Essay 1380 ☞ 신라 경순왕(敬順王)과 고려 태조(太祖) 935년 11월 신라 경순왕(敬順王)이 모든 백관을 거느리고 경주를 떠나 왕건(王建)에게 항복하러 오자 왕건은 특별히 송악 교외까지 나가 경순왕을 맞았다. 태조 왕건은 그에게 궁의 동쪽에 있는 집을 내주고 장녀 낙랑공주(樂浪公主)를 그에게 주어 아내로 삼게 했다. 다음 달에는 경순왕 김부(金傅)를 정승으로 삼아 태자보다 높은 자리라 하였으며 녹 1000석에 많은 시종들을 내려주었으며 경주를 그의 식읍으로 삼게 했다. 이에 경순왕은 936년 큰 아버지 김억렴(金億廉)의 딸을 태조에게 바쳤는데 그녀가 제5왕후인 신성왕후(神成太后)로 그녀가 낳은 아들이 안종(安宗) 왕욱(王郁)이며 그가 헌정왕후 황보씨(獻貞皇后 皇甫氏)와 사이에서 얻은 아들..

양천 허씨(陽川許氏)

歷史 Essay 1379 ☞ 양천 허씨(陽川許氏) 허씨(許氏)는 원래 수로왕(首露王)과 허왕후(許皇后)의 후손이다. 아들을 10명 두었는데 허왕후가 자기 성(姓)이 이어지기를 간청하자 맏아들 거등(居登)은 김씨로 태자로 삼고 그 외 두 왕자에게 허씨성을 사성(賜姓)한 데서 이어진다. 그러다가 920년대 왕건(王建)이 경기 지역을 공략할 때 강서(江西) 양천(陽川) 지역의 호족(豪族)인 허선문(許宣文)이 도강의 편의를 제공하고 막대한 군량미를 제공하는 등 지원하자 왕건이 보답으로 공암촌주(孔巖村主)로 임명하고 양천 허씨(陽川許氏)를 사성했다. 당시 90세였던 선문은 수로왕의 30세손으로 양천 허씨의 시조가 되었으며 그 후손으로 동의보감의 허준(許浚1539-1615) 그리고 홍길동전의 허균(許筠1569-16..

충신 신숭겸(申崇謙)

歷史 Essay 1378 ☞ 충신 신숭겸(申崇謙) 신숭겸(申崇謙)은 춘천(春川) 사람으로 원래는 이름이 능산(能山)이었다. 궁예(弓裔) 휘하의 태봉국(泰封國)에 있다가 918년에는 홍유(洪儒) 배현경(裵玄慶) 복지겸(卜智謙) 등과 함께 왕건(王建)을 옹립해 고려를 세우는 데 큰 역할을 해 대장군이 되었고 927년 9월 견훤군과의 팔공산 전투에서는 고려군이 많이 불리해 왕건이 포위당해 생명이 위험할 때 왕건과 옷을 바꾸어 입어 탈출시키고 나가서 싸우다 죽었으니 더 없는 충신이었다. 후백제군이 그의 시신에서 수급을 베어 갔으므로 태조(太祖)는 순금으로 두상(頭像)을 만들어 시신과 같이 매장하였다 한다. 후일 태조가 신씨(申氏) 성을 하사하여 송도(松都-開城) 근처 평산(平山)을 본향으로 받아 평산 신씨(平山..

발해(渤海) 유민

歷史 Essay 1377 ☞ 발해(渤海) 유민 발해(渤海) 장군 신덕(申德)이 5백명을 이끌고 귀순하면서 유민이 대규모로 몰려오기 시작한 것은 태조(太祖) 8년인 925년 9월부터였다. 거란(契丹)이 925년 12월에 공격을 시작해 926년 1월에 발해가 멸망했는데 3달 전부터 유민이 온 것을 보면 발해의 멸망이 꼭 거란의 공격 때문만이 아니라 내분이 있었음을 유추할 수 있다. 아무튼 나라가 망하자 발해인들은 같은 민족이라는 생각에서 적극 포용정책을 펴는 고려로 속속 귀순한다. 934년 정월 태조가 서역(西域) 순찰하고 오자 발해국의 마지막 세자 대광현(大光顯)이 백성 수만명을 이끌고 귀화한다. 태조는 그에게 왕계(王繼)라는 이름을 주어 왕실 족보에 등록하고 식읍을 하사한다.

발해(渤海)의 멸망

歷史 Essay 1376 ☞ 발해(渤海)의 멸망 발해(渤海)는 거란(契丹)족이 세운 요(遼)의 침략에 시달리던 중 고려(高麗)에게 원군을 청했으나 세운 지 10년도 안 된 고려는 당시 남으로 막강한 견훤(甄萱)군과 대치 중이라 발해를 구원해 줄 수 없었다. 결국 발해는 926년 요의 공격에 망하고 만다. 고려는 922년 6월에 이미 요나라와 친교를 맺었는데 요가 926년 동족의 나라 발해를 멸하자 왕건은 분노한다. 결국 다음 해 요에서 온 사신 38명을 섬으로 귀양보내고 선물로 받은 낙타 50마리를 만부교(萬夫橋) 아래에 매어 굶어죽게 만드는 극단적인 외교를 펼치면서 고려와 요나라는 원수가 되었다. 이 때 고려로 귀화한 발해의 왕족들은 성(姓)을 대(大)에서 태씨(太氏)로 바꾸었다.

미인박명 최응(崔凝)

歷史 Essay 1375 ☞ 미인박명 최응(崔凝) 이미 열 살 때 당(唐)나라에까지 신동으로 소문난 최응(崔凝)은 907년부터 궁예(弓裔)를 모셨고 918년 왕건(王建)의 건국 이후에도 왕의 책사(策士)로 두루 벼슬을 섭렵하며 고려 초 국가에 크게 기여한다. 어린 시절 궁예의 눈을 피해 숨어다니며 자란 그는 매우 허약한 체질이었다. 더구나 고기나 생선은 입에 대지도 않는 채식주의자인데다가 밤낮없이 일에 매달려 지내다 보니 몸이 성할 리가 없었다. 한 번은 과로로 쓰러지자 왕건이 태자를 시켜 고기를 보냈으나 먹지 않자 직접 찾아가 눈물을 흘리며 권하자 딱 한 번 먹었다고 한다. 결국 왕건을 모신 지 15년 만인 932년 최응은 35세의 짧은 일생을 마친다.

최응(崔凝)의 지혜(智慧)

歷史 Essay 1374 ☞ 최응(崔凝)의 지혜(智慧) 915년 어느 날 이른바 관심법(觀心法)으로 왕후와 두 왕자를 죽이며 광기가 극에 달한 궁예(弓裔)가 왕건(王建)을 불러들여 이번에는 관심법의 화살을 왕건에게 돌린다. 궁예가 왜 모반을 했느냐고 캐묻자 엎드려 극구 부인하는 왕건에게 궁예의 책사 최응(崔凝898-932)이 일부러 붓을 뜰에 떨어뜨린 후 주우러 내려가면서 왕건에게 귓속말로 ‘굽히지 않으면 위태롭다’라고 귀띔해 준다, 이를 알아들은 왕건은 곧 거짓 시인한다. 궁예는 자기의 관심법이 통했다고 기뻐하며 왕건을 살려 주었지만 사실 왕건을 죽이면 나라가 유지될 수 없다는 것을 궁예도 알고 있었기에 겁만 주고 끝낸 것일 게다.

신동 최응(崔凝)

歷史 Essay 1373 ☞ 신동 최응(崔凝) 897년 여름 황주(黃州) 토산(兎山) 고을에 사는 3등급 벼슬 최우달(崔佑達)의 집에 이변이 일어난다. 아내가 임신중이었는데 멀쩡하던 오이줄기에 난데없이 참외가 열린 것이다. 이 소문을 들은 궁예(弓裔)는 사내아기가 태어나면 나라를 위태롭게 할 거라면서 아들이 태어나면 죽이라고 명령한다. 그런데 다음 해 아들을 낳았다. 우달 부부는 주변에 아기가 사산했다고 소문내고 먼 친척집에 맡겨 키웠다. 마침 그 때 궁예는 전 상관인 양길(梁吉)과 한판 승부를 준비하고 있을 때라 다행히 그 집의 일을 잊고 있었다. 그로부터 10년 후 907년 하늘이 내린 성인이라는 소문을 듣고 궁예가 책사(策士)로 삼으니 최응(崔凝898-932)이다.

용건(龍建)의 승부수

歷史 Essay 1372 ☞ 용건(龍建)의 승부수 896년 당시 송악의 대부호인 왕건의 부친 용건(龍建)은 19세의 아들을 데리고 궁예(弓裔)에게 귀부(歸附)한다. 고려사나 드라마에서는 왕건이 도선대사(道詵國師827-898)를 직접 만나 비기(秘記)를 받았다지만 현실성이 없고 풍수지리의 대가인 대사가 875년 송악을 지나다 용건에게 삼한통일의 위업을 달성할 왕자가 탄생할 곳이라며 집터를 점지해 준 것 같다. 2년 후 왕건이 태어났고 896년 아들의 미래를 확신하고 궁예에게 귀부한 것이다. 결국 수도를 지금의 개성인 송악으로 삼고 왕건을 태수로 임명한다. 용건은 지금의 철원인 금성태수로 있다가 다음 해에 원인 불명으로 죽어 아들의 영광은 보지 못 한다.

왕건(王建)의 꿈

歷史 Essay 1371 ☞ 왕건(王建)의 꿈 어느 날 왕건(王建877-943)은 장대비가 쏟아져 하늘을 뒤덮고 물 사태가 천지를 뒤엎는 기이한 꿈을 꾸었다. 그는 영암(靈巖) 사람 최총진(崔聰進)을 불렀다. 총진은 총명 예민하고 학문을 즐겨 특히 천문(天文)에 능한 젊은이였다. 왕건의 꿈이야기를 듣자 총진은 장차 삼한을 통합하여 다스릴 길조라고 답했다. 왕건은 그의 이름을 지몽(知夢)이라 고쳐주고 비단옷을 하사하여 평생 함께 하자 했다. 그로부터 최지몽(崔知夢907-987)은 왕건의 총애를 받아 항상 곁에 있었으며 후삼국 통일 후에도 혜종 경종 성종 대에 이르기까지 변함없이 임금의 총애를 받으며 국가에 헌신하다가 성종 6년인 987년 81세로 세상을 떠난다.

왕건(王建)의 선조

歷史 Essay 1370 ☞ 왕건(王建)의 선조 왕건의 할아버지는 작제건(作帝建)인데 생애가 신비로운 설화로 돼 있어 믿을 수는 없지만 신라 말기에 살았던 인물이고 왕건이 태어나기 전에 죽었다. 아버지는 용건(龍建)으로 출생연도는 알 수 없고 부인이 한씨(韓氏)였고 877년 1월생인 왕건이 장남인 것을 보면 850년대 생인 것으로 추정되며 897년에 죽은 것은 확실하다. 세 부자가 모두 이름 끝자에 建인 것을 보면 왕을 나타내는 칸이라는 학설도 있다. 당대에는 성씨가 없었는데 왕건이 나중에 왕이 된 후 성을 왕씨로 정하고 아버지는 왕륭(王隆)이라 칭했다. 할아버지는 경강대왕(景康大王)으로 할머니는 원창왕후(元昌王后)로 어머니 한씨는 위숙왕후(威粛王后)로 추존됐다.

안동(安東) 권(權) 김(金) 장(張)씨의 시조(始祖)

歷史 Essay 1369 ☞ 안동(安東) 권(權) 김(金) 장(張)씨의 시조(始祖) 안동 권씨 시조 권행(權幸)은 원래 신라 왕실의 후손인 경주 김씨였다. 견훤(甄萱)이 927년 경주(慶州)에 침입해 경애왕(景哀王) 을 죽이고 경순왕(敬順王)을 세우자 안동에 살던 김행은 복수를 결심한다. 3년 후 견훤의 후백제군과 왕건(王建)의 고려군이 안동에서 대치했을 때 왕건에게 가담해 견훤의 군대를 함몰시키는 데 큰 역할을 한다. 이 전투로 후삼국의 주도권을 잡은 왕건은 정세를 잘 판단해 권도를 잘 취했다고 칭찬하면서 그에게 김씨 대신 권씨 성(姓)을 하사한다. 마찬가지 이유로 그와 함께 왕건을 지원한 성주(星州) 김선평(金宣平)은 안동 김씨의 시조 장정필(張貞弼)은 안동 장씨의 시조가 되어 현재 안동시 북문동(北..