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감성을 위한 ━━/에세이

가을 - 최남선

Joyfule 2015. 11. 4. 08:57

    가을 - 최남선

 

 

 샘물 바닥과 함께 매미 소리가 맑고 쌀쌀하여지므로 여름의 사나운 위엄도 인제는 얼마 남지 아니하였구나

하였더니, 귀뜰귀뜰하는 소리가 선잠 깬 귀를 울리거늘, 벌써 가을일세 하는 생각이 번갯불같이 일어나도다.

차차 진주 같은 이슬이 풀잎에 안기렷다. 기러기 소리가 구름 밖에 요란하렷다. 나뭇잎이 하나씩 하나씩 나부끼는 족족 늙는이가 세어 가는 터럭을 새삼스러이 걱정하게 되렷다.

꼭 썼던 장옷을 홱 벗어 던진 미인처럼 두렷하고 환한 월궁(月宮) 항아(姮娥)가 청초한 맵시와 선염(鮮?)한 바탕을 아낌없이 드러내 놓아 서른이 좋은이의 새로운 느낌이 두 극단으로 배치(背馳)하게 되렷다. 시인은 까닭 없이 바쁨에 얽매이고, 장사(壯士)는 부질없이 칼집을 어루만지렷다. 아아! 가을이 오는고야, 가을이 오는고야.

 

 기승스럽던 나무새들도 얇은 빛을 가리지 못하여 누르락붉으락 어찌 할 줄을 모르네. 싱싱하던 푸새들도 어느 임자를 단단히 만났던지, 한껏 공손하고 한껏 겸비(謙卑)하게 고개들을 푹푹 숙였네. 꺼져 가는 촉(燭)불이

마지막 빛나듯 벌거벗으려 하는 이 산 저 산이 노랑저고리 다홍치마로 눈이 부시게 일제히 단장하여 천지간

미(美)가 한때는 내게만 있노라 하네. 산은 서리를 맞아 여윈 어깨가 점점 뾰족하고, 들은 바람에 씻겨 티끌

하나를 멈추지 아니할 듯 솔질을 박박 하네.

 

 반죽 짓던 솜의 회리바람에 불려 간 듯한 구름장이 이리저리 떠다니다가 바람을 옆으로 받으면 뭉키었던 것이 가로 솔솔 풀리는 것이 일자(一字)로 쭉쭉 뻗쳐 서늘한 물결이 하늘을 덮은 듯하네. 아침볕은 먼 데 손님처럼 반갑고, 낮볕은 허심(許心)하는 친구처럼 훗훗하고, 저녁볕은 정든 사이끼리 잔등이를 마주 대고 앉은 듯 든든 탐탐하여 가네. 아침보다 낮, 낮보다 저녁, 저녁보다 밤이 그립고 다정하여, 밤이란 것이 형상(形狀) 있는 것

같으면 껴안고 놓고 싶지 아니한 철이 되었네. 아아! 가을이 왔네, 가을이 왔네.

 

 밤은 아람이 굵고 대추는 볼이 붉구나. 감은 침이 들고 배는 거플이 얇구나. 가을의 풍성은 과실이 먼저 알리는구나. 새풀이 희거든 싸리꽃이 한가지 붉고, 도랏꽃이 푸르거든 국화 인하여 누르구나. 가을의 번화(繁華)는 초화(草花)가 철갈이로 꾸미는구나. 들을 보아라, 황운 만경(黃雲萬頃)이 다 배 두드릴 것이요, 산을 보아라, 홍하 일면(紅霞一面)이 총(總)히 거드럭거려 노닐 감이로구나. 눈에 보이는 빛이 성숙(成熟) 뿐이로구나. 풍성 뿐이로구나.

 

 성숙한지라 수납(收納)이 있으며, 풍성한지라 열락이 있구나. 가을 의사를 옳게 체현(體現)하는 자는 농호(農戶)와 아울러 그 사람이니, 봄날 따분한 것 참은 값과 여름날 괴로운 것 견딘 삯이 인제는 그의 노적가리에 드러나며, 그의 광에 드러나며, 그의 소반 위에 드러나며, 그와 및 그 집안의 얼굴빛 말소리에 드러나는구나.

그는 이제 부자요 장자(長者)니, 지난 고생은 꿈이런지 헛것이런지, 든든한 가멸이 그의 뜰을 채우며, 그의 배를 채우며, 그의 마음을 채우는구나. 그 - 농부야 말로 가을의 기쁨을 선전하는 사도(使徒)니 그는 쟁투로서 승첩(勝捷)을 얻고 노역(勞役)으로써 공업(功業)을 이룬 1년 동안의 강자, 우승자로구나. 즐김의 웃음 소리가 새로 이엉한 마을 집을 잠그고, 황계 백주(黃鷄白酒), 청풍 명월(淸風明月), 풍엽(楓葉)의 대화폭, 초충(草?)의 대악곡(大樂曲), 가지가지로 조화의 고마움을 느끼지 않을 수 없는 가을이 이제로구나. 가을이 이제로구나.

 

 사람은 이때를 기다려 생기가 나며, 활력이 늘며, 여름내 귀찮음을 하직하고 맛갓으로 나아가며, 하기 싫음에서 벗어나 하고 싶음으로 들어가나니, 1년 동안에 밥 잘 먹는 철이요, 잠 잘 자는 철이요, 정신 가장 깨끗하고 혈액 가장 잘 순환하는 철이요, 일 가장 많이 할 수 있고, 또 가장 많이 하여야 할 철이다.

가을의 일각(一刻)은 진실로 나른한 봄과 사나운 여름과 매운 겨울의 백배 천배 가치가 있기도 하거니와, 있게 하기도 하여야 할 것이니, 기쁨의 가을을 뜻있고 원통치 아니하게 맞이하고 사귀고 보내는 이는 그 전 생애가 만족과 영광의 연쇄일지니라. 학생은 방책(方冊)으로써 등촉을 친하고, 사업가는 부서(簿書)로써 등촉을 친하고, 상인은 주판으로, 공인(工人)은 규구(規矩)로, 사람 사람이 다 한가지 등촉을 친할 가을이 사람에게 왔도다.

 

가을 사람! 가을 사람! 일할 때가 왔읍네, 힘쓸 철이 되었네. 갠 하늘의 가을 매처럼 시원히 이 세상에 놀아 보세. 시냇가의 가을 말처럼 이것 저것을 살 올려 가지고, 울타리 밑의 가을 닭처럼 이리 저리로 갸우뚱거려 보세. 쓸쓸의 가을은 늙은이에게 맡기고, 슬픔과 억울의 가을은 천하 불평객에게 내어 주고, 우리 청춘을랑 부지런의 뒤끝인 수성(收成)의 가을만 기뻐하며 즐기며 노래할 것이로다.

(1917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