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로 어머니 가신지 일주일이다. 땅거미 내리는 시각, 식탁에 수저를 세벌 놓고 “진지 드세요…”하다가 멍하니 선다. 어머니의 부재를 실감하는 순간이다.
96년동안 깨끗하고 따뜻하게 사셨다. 임종 하루 전날까지 혼자서 화장실을 가셨다. 장롱이며 서랍장이며 정갈하게 정리해놓고 새 양말 두 컬레만 있어도 한 컬레를 나에게 주셨다. 이런 며느리는 새벽이면 제일 먼저 어머니의 문안을 받았다. 연세가 높아지면서 아기 상태로 되돌아가는지 나를 보고 “엄마”라 하고 새벽이건 밤중이건 방문을 열고 엄마가 있나 없나 확인하는 일이 일과였다.
작년 봄만 해도 어머니는 농장에 가서 풀을 뽑는다는고 호미를 들고나섰다. 식사를 잘하시니 기운이 나서 심심해서 그러려니 했다. 아래 밭에 콩씨를 넣고 올라와보니 꽃밭의 풀꽃들을 다 뽑아버렸다. 엄마가 게을러빠져서 꽃밭을 풀더미로 만들어 놓았다고 꾸중을 하였다. “에미”라는 호칭이 엄마로 바뀐 것도 그무렵이다.
그때서야 어머니에게도 무서운 치매가 왔다는 것을 알았다. 한밤중에 전기불을 켜놓고 가버리고 책상우의 원고 청탁서며 보다 둔 책이 없어졌다. 꼭 너덧살아이들이 장난을 치는 모습이다. 날마다 아침이면 승강이를 벌였다. 며느리가 양복을 입고 가방을 들고 나갈 때면 “언제 와?”하시고, 작업복 차림이면 농장에 가는 줄 알고 따라간다고 앞장을 서셨다. 그러면 우리 내외는 눈을 꿈적거리며 다른 핑게를 대고 몰래 빠져나갔다. 우리가 어렸을 적에 장에 가는 엄마를 따라가고 싶어 안달을 하던 그 모습이다. 농장에 일 저지레가 이만저만이 아니여서 누구 하나는 어머니를 지켜야 하기 때문이다. 오이밭에 가서 손가락만한 오이까지 따는 일은 다반사요, 파를 모조리 뽑아놓고 딸기밭에 들가서 한창 익는 딸기를 손으로 뭉개놓아 못쓰게 만들어놓기도했다. 끼니때를 구별 못하고 밥을 달라고 하셔서 집에 있는 날은 하루에 다섯 번이나 진지상을 차린 일도 있었다.
이때부터 형벌 같은 외로움이 어머니를 괴롭히지 않았을가 생각해본다. 노인정에 모셔다 놓아야 꾸어다놓은 보리자루 같으니 싫다 하고, 텅 빈 아파트에 혼자 남아서 아들 며느리가 돌아올 때를 눈이 빠지게 기다리셨을 것이다. 나는 어머니가 사람이 그리워서 며느리를 찾는 줄 알았다. 명절 때 손자들이 모여와서 집안이 북적거려도 며느리가 보이지 않으면 엄마 어디갔느냐고 수도 없이 손자들에게 묻는다고 했다. 다른 사람이 아무리 많아도 당신에게는 오로지 며느리만 보였을는지 모른다. 이런 어머니가 내게는 혹이었다. 70이 훨씬 넘은 아들과 70이 가까운 며느리가 노모에게 매달려서 불안 속에 살자니 속에서 불덩어리가 끓을 때가 왜 없었겠는가. 참다 못해서 지난 7월에는 남편에게 부탁하고 러시아문학기행을 다녀왔다. 일주일 보내고 현관에 들어서니 거실에 놓은 텔레비젼 수상기에 큼지막한 종이가 붙어있었다.
“에미는 러시아에 갔어요. 더 찾지 마세요.”남편의 글씨다. 하루에도 수백번 물어서 대답할 기운이 빠졌단다. 생각다 못해서 이렇게 써서 붙여놓고 물으시면 손으로 가르키고, 어머니는 읽어보시고 잊어먹고 또 물으시고… 지금도 그때의 모습을 생각하면 가슴이 아려온다. 날은 저물고 시장기는 드는데 엄마는 보이지 않고 얼마나 막막하였겠는가. 잘 모시나 못 모시나 함께 있어드린다는 것만도 큰 효가 되는 것을 나는 미처 생각지 못했다. 나이를 먹으면 다시 처음의 자리로 돌아간다. 말과 행동이 단순해지고 타인에 대한 배려가 없이 오로지 자신만 생각한다. 그러다가 그 자신마저도 잃어버려 인생의 미아가 되여 홀로 떠나간다. 어디로 가는것일가. 오래 써서 남루해진 육신을 벗어놓고 떠나면 남아있는 사람들은 그의 흔적을 지우느라 바쁘다. 물리적인 흔적은 차츰 없어지고 남는 것은 그 사람 행위에 대한 기억뿐이다.
근 일세기를 살아내신 어머니는 아주 작아져서 주방으로 나올 때도 아기처럼 엉금엉금 기여나오고 임종하는 순간에도 내 손을 꼭 붙잡고 “엄마, 엄마!”하고 불렀다. 도대체 어머니와 나는 전생에 어떤 인연이길래 이씨 문중에서 만나 젊어서는 온갖 사랑으로 품어주시고 돌아가실 때는 당신이 아이가 되여 내 품에서 임종을 하셨는지 알 수가 없다. 고부지간이라는 인연이 어머니와 나 사이를 질기게 묶어주었지만 더 엄밀히 말하면 같은 여자라는 동질감이 40여년 세월을 연민하며 미워하고 또 사랑하며 이어 오지 않았나 싶다. 그럼에도 영영 떠나시고 난 후 헤어날 길 없는 죄책감은 어머니를 외롭게 한 죄(罪)다.
삶의 막다른 낭떠러지 앞에서 누군가 옆에 있어 주기를 고대했을 어머니, 그 누군가가 있으면 죽음도 두렵지 않았을 어머니를 외롭게 한 죄, 내 어찌 다 용서받으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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