감동적인 선교사 이야기 - 닥터 홀의 조선회상
셔우드 홀 지음
조선을 향해
출발날인 1925년 8월 25일이 다가왔다. 떠날 때의 슬픔과 기다림의 설렘은 선교사 생활에는 항상 따라 다니는 친구다. 우리는 조선으로 들어가는 길에 런던의 열대병 의학교에서 6개월 동안 동양 질병에 대한 철저한 훈련을 받았다. 이 학교의 학생들은 대부분 동양 각지에서 모인 의사들이었고 교수들은 이 분야에서 뛰어난 권위자들이었다. 레오나드 로저즈경 같은 분은 말라리아 치료 부문의 개척자였으며 간염 치료에 있어서도 특수하고 성공적인 길을 연 분이었다. 이 학교에서 우리들은 이 지구의 곳곳에서 오는 실제적인 의학 자료들을 접하는 행운을 누렸다. 예를 들어 이질의 경우, 가장 효과적인 치료법은 식이요법이었는데 지금까지는 묽게 탄 우유를 먹이는 것으로 알고 있었으나 우유는 ‘외부에서 온 단백질 독소’라는 역효과를 초래해 환자를 사망하게 할 수도 있다. 그러므로 이 경우 먼저 정맥 주사로 영양을 보급하고 보리죽을 쑤어서 환자에게 먹여야 한다는 것이다. 후에 조선에서 이 식이요법으로 선교사들의 두 어린 자녀를 구할 수 있었다. 그들은 우유 식이요법으로 인해 병이 악화되어 거의 죽어가고 있었다. 이 방법은 참으로 간단하나 아는 것과 모르는 것의 차이로 환자를 살릴 수도 있고 죽게 할 수도 있었다.
1926년 4월, 배가 도착한 곳은 일본의 고베였다. 일본은 동화 속의 나라 같았다. 벚꽃들이 만발한 초봄이었다. 우리는 조용하고 아름다운 아침, 공원에서 편지를 읽었다. 이 편지들은 고베에서 우리를 기다리고 있었다. 어머니는 편지에서 우리가 당연히 ‘평양연합기독병원’으로 와야 함에도 불구하고 해주로 가게 된 것을 몹시 애석해 하고 계셨다. 그러나 선교회는 평양병원에는 이미 훌륭한 의료 선교사가 책임을 지고 있었으므로 우리를 해주로 보낸 것이다. 나는 내심 성자와 같은 아버지의 발자취가 살아 있는 그늘 밑에서 지내기는 내 미숙한 인격으로는 어려울 것이라 느끼고 있었다. 게다가 해주는 우리를 절대적으로 필요로 하고 있지 않은가. 해주에서는 닥터 노튼이 조그마한 치료소로 시작해 이층 벽돌 건물인 누리자 홈즈 노튼 기념병원을 신축 발전시켜 놓았다. 이 병원은 황해도의 1/3을 점하는 해주 지역 주민들에게 봉사하도록 되어 있었다.
또 한 통의 편지는 해주병원의 닥터 김으로부터 온 것이었다. 그는 지금 혼자서 병원을 맡고 있었다. 닥터 노튼이 있다가 1922년 서울의 세브란스 병원으로 전입되어 갔던 것이다. 그는 편지에다 “닥터 윌리엄 제임즈 홀의 아들과 김창식 목사의 아들이 이제 해주에서 한 팀이 되어 일하게 되었으니 얼마나 기쁜지 모르겠다”고 썼다. 닥터 김은 김창식 씨의 아들이었던 것이다. 편견과 오해가 많았던 1894년, 평양에서 기독교 박해가 있었을 때 그의 아버지 김창식은 인내와 믿음으로 아버지를 도와 그 역경을 넘겼던 분이었다. 그는 1901년 조선의 신교사에 있어서 최초로 임명된 목사로 지금은 은퇴하여 닥터 김과 함께 살고 있었다. 감히 헤아릴 수 없는 하나님의 섭리, 하나님께서는 이 지역에서 기독교를 개척한 두 사람의 아들들로 하여금 다시 만나 하나님께 봉사할 수 있는 길을 터주셨던 것이다.
조선으로 돌아와서
조선! 아버지는 연안용 기선을 타고 긴 여행을 하여 조선 땅에 첫발을 내딛었지만 이제 우리는 일본에서 출발하는 야간 연락선을 타고 조선 해협을 건넜다. 솟아오르는 장엄한 아침 햇살을 받으면서 나는 먼 시야에 들어오는 당당한 조선 땅의 해안선을 바라보았다. 나는 가끔 전쟁에 시달린 이 땅이 어째서 ‘조용한 아침의 나라’라고 불리워지는지 궁금했었다. 그러나 동트는 순간, 갑판 위에 서 있던 나는 그 이유를 이제야 이해할 수 있었다. 아침 해가 바다에 반사되어 황금색의 넓은 길이 마치 내게로 펼쳐지는 듯했다. 나는 넋을 잃고 이 황홀한 광경에 빠져들었다. 이러한 느낌이나 감동은 조선에서 지냈던 소년 시절의 여러 경험들과 밀착되어 남들과는 매우 다른 인상으로 가슴에 새겨졌다. 배가 해안으로 더 가까이 다가서자 초가지붕 위에 박들이 주렁주렁 널려 있는 모습이 보였다. 메리안은 감탄사를 연발하며 흥분을 감추지 못했다. 메리안의 즐거워하는 모습을 보고 나의 기쁨은 더욱 커졌다.
어머니와 해후하고, 서울에서 우리를 조선에 올 수 있도록 도와준 분들을 찾아 인사했다. 어머니와 친한 기독교 신자인 윤치호 씨, 영국 총영사, 그리고 당시 조선 총독이었던 사이또 마꼬또 자작 내외도 찾아뵈었다. 후에 그 분은 일본 수상을 지냈는데 평화운동을 했다고 해서 1936년 암살을 당했고 그의 아내도 남편을 방어하다가 부상을 당했다. 우리는 이어 해주 병원을 방문하고 다시 서울로 돌아와 조선어 학교에 등록했다. 초기 적응 기간에 잘못하면 메리안에게 정신적 혼란을 줄 수 있기 때문에 나는 아버지와 다름없는 후견인 노블 씨의 힘을 빌렸다. 그는 천부적인 판단력과 분별력을 가지고 있었다. 내 생각에 그가 메리안의 내적 심리, 향수병 같은 것들을 나보다 잘 탐지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노블 씨 부부는 우리를 진정으로 반갑게 맞아주었다. “메리안, 당신은 낯선 사람들, 낯선 언어, 낯선 습관들에 둘러싸여 있습니다. 당신은 여기 온 지 얼마 안 되어 잘 모르겠지만 조선 사람들은 얼마나 친절하고 좋은 사람들인지 모릅니다. 당신은 지금 다른 세계에서는 찾아볼 수 없는 매우 색다르고 독특한 사회에 발을 들여놓으려는 찰나에 있습니다. 또한 이곳 외국인 사회는 선교사 집단과 비선교사 집단을 나누는 경계선이 없습니다. 조선어 학교가 있는 이 모리스관도 이곳 사람들이 존경하는 사업가인 모리스 씨의 이름을 딴 것입니다. 이 건물에서는 각 파의 기독교인들이 함께 예배드리기도 하고 주일이면 언더우드 박사의 박력 넘치는 설교도 듣습니다. 초교파 정신이 이루어지고 있지요. 나는 당신이 머잖아 이곳에서 마치 온 생애를 살아왔던 것처럼 느끼게 될 것으로 확신합니다. 당신이야말로 이곳에 정말로 필요한 사람이 아닙니까!”
'━━ 영성을 위한 ━━ > 신앙인물' 카테고리의 다른 글
감동적인 선교사 이야기 - 닥터 홀의 조선회상 (0) | 2018.05.16 |
---|---|
감동적인 선교사 이야기 - 닥터 홀의 조선회상 (0) | 2018.05.15 |
감동적인 선교사 이야기 - 닥터 홀의 조선회상 (0) | 2018.05.13 |
감동적인 선교사 이야기 - 닥터 홀의 조선회상 (0) | 2018.05.12 |
감동적인 선교사 이야기 - 닥터 홀의 조선회상 (0) | 2018.05.11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