감동적인 선교사 이야기 - 닥터 홀의 조선회상
셔우드 홀 지음
오리엔테이션
조선말을 좀 안다고 뽐냈던 내 체면이 오래가지 못했다. 어렸을 때 쉽게 재잘거렸던 조선말은 ‘어린아이들의 말’에 지나지 않았었다. 이미 습관으로 굳은 말투를 고치는 일은 말을 새로 배우는 것보다 더 어렵고 고생스러웠다. 내가 이렇게 고전하고 있을 때 메리안은 경쾌하게 나를 앞질러가더니 좀더 점잖은 어른들 세계의 말로 고쳐서 나를 가르쳐주는 게 아닌가! 우리에게는 아펜젤러 같은 뛰어난 선생이 있어 매우 차분하게 배울 수 있었는가 하면 언더우드 선생은 조선말에 능숙하여 학생들에게 기관총보다 더 빠른 속도로 조선말로 질문했다. 그 질문이 무슨 뜻인가는 그가 수업을 마치고 교실을 나설 때쯤 되어서야 겨우 알게 되는 경우가 허다했다.
우리가 조선어학교에 다니고 있었던 2개월 동안 조선에는 격동적이고 역사적인 사건들이 터지고 있었다. 이씨 왕조의 27대 왕이고 마지막 왕이기도 한 순종 황제가 1926년 4월 25일 서거했다. 장례는 거창하게 거행될 게 틀림없었다. 일본인들은 조선의 애국자들이 이 행사를 이용해 1919년 3월 1일의 독립운동과 같은 운동을 일으키지나 않을까 두려워했다.
1910년 8월 22일 조선이 공식적으로 일본에 합병됨에 따라 이씨 왕조는 종말을 고했었다. 그러나 제1차 세계대전이 끝나자 애국자들은 미국 윌슨 대통령의 민족 자결 원칙에 힘을 얻었다. 애국자들은 전세계에 일본의 압정을 알린다면 일본에 대한 국제적인 여론이 일어나게 될 것이고, 따라서 일본으로 하여금 조선을 포기하게 할 수 있다고 결론을 내렸다. 33명의 조선 지도자들이 독립 선언서에 서명을 하고 이것이 비밀리에 인쇄되어 조선 방방곡곡과 주요 열강의 정부들에 퍼졌다. 이 33인 중에는 천도교 계통이 15인, 기독교 계통이 16인, 그리고 불교 계통이 2인이었다. 일본에 의해 금지되었던 조선 국기들이 나부끼고 “만세!” 소리가 진동했다. 비폭력, 평화적 시위였음에도 불구하고 일본은 무자비한 보복을 자행하여 많은 사람들을 체포, 투옥시키고 죽였다. 기독교인들도 많이 체포되었고 죽임을 당했다. 조선 민중들은 이때 처음으로 기독교인들도 조선의 애국자들이라는 점을 인식하게 되었다.
이 독립 시위는 비록 원했던 자유를 가져오지는 못했으나 조선에 대한 일본 정부의 정책을 바꾸게 했다. 사이또 마꼬또가 조선의 총독에 임명되었다. 그의 정책은 전임자들보다 회유적이었으며 주 관심사는 교육이었다. 그가 총독으로 올 때 조선의 학교는 250개 정도였는데 내가 다시 조선에 왔을 때는 약 다섯 배 정도가 늘어나 있었다.
순종 황제 장례식 날, 어머니는 장례 행사에 참석해달라는 초청을 받고 장례식장에 갔다. 일본 경찰이 우리에게 와서 메리안의 사진기를 철저히 조사했다. 폭탄이 아니라는 점이 확인된 다음에도 한참을 더 기다려야 했다. 메리안은 이 역사적인 행사의 배경에 대해 설명해달라고 내게 졸랐다. 희미한 기억을 정리하려고 골몰하고 있을 때 어렸을 적 서울에서 헐버트 씨 댁 아이들과 놀던 기억이 섬광처럼 스쳤다. 헐버트 박사는 원래 조선 국왕으로부터 조선에 관립 학교를 설립하고 학생들을 가르쳐달라는 요청을 받고 나온 분이다. 그는 조선 국왕의 신임을 두텁게 받았기 때문에 1895년 민비가 살해당한 후, 생명의 위협을 받고 있는 국왕 곁에서 그의 신변을 지켜주었던 세 사람의 선교사들 가운데 한 사람이다. 헐버트 박사는 고종 황제를 대변하여 조선 독립을 위해 활동했다. 조선을 위해 루즈벨트 대통령에게 청원한 일로 일본인에 의해 다시는 조선에 돌아오지 못한다는 추방령을 받았으나, 그는 본국에 돌아와서도 강연, 기고, 요직에 있는 사람들과의 면담을 통해 열심히 조선 독립을 위해 활동했고, 결국 조선의 독립을 기쁜 마음으로 볼 수 있었다. 그는 다시 조선으로 돌아왔고, 제 2의 고향인 서울에서 1949년 영원히 눈을 감았다.
조선어 학교를 마치고 임지로 떠나기 전 서울에서 내가 해야 할 중요한 일이 남아 있었다. 그것은 메리안에게 내가 태어난 집을 보여주는 일이었다. 우리는 내가 태어난 방과 아버지가 돌아가신 방을 구경했다. 아버지와 어머니는 선교 생활 초기에 노블 씨 내외와 함께 이 집을 썼고 노블 씨의 딸이 태어날 때도 이 집에서 어머니의 손으로 출산을 도왔었다. 나는 메리안에게 노블 부인을 높이 평가한다고 말했다. “소년 시절 나는 노블 부인과 자주 이야기를 나눴는데, 그때마다 항상 새로운 힘을 얻었소. 부인은 두 아이를 잃고 큰 슬픔 속에서도 희망을 잃지 않고 모든 것을 긍정적으로 받아들였지.” 메리안은 그 자리에서 참지 못하고 해주로 가기 전 노블 씨 댁을 다시 한 번 찾아가자고 졸랐다. 우리가 그 댁에 갔을 때는 노블 씨 부인은 외출중이고 대신 노블 씨가 반갑게 맞아주었다. 그날 노블 씨가 우리에게 해준 이야기들은 선교 생활을 시작하는 우리에게는 너무나 도움이 되는 것이었다. 선교에 대해 그가 내린 정의를 지금까지도 생생하게 기억하고 있다.
“돈이란 선교사가 되기 전까지는 개인 생활에서 대단히 중요한 조건이 됩니다. 그러나 지금부터는 당신들의 생활에서 돈이 차지하는 가치는 점점 작아질 것입니다. 단지 선교 사업을 위한 자금 외에는 말이지요. … 당신들 두 사람은 의과대학을 졸업했으니까 미국에서 산다고 하면 전문의사로서 부유하게 살겠지요. 아마도 동창들은 멋진 스포츠카를 타고 비싼 요트를 소유하고 호화로운 저택에서 살게 될 겁니다. 어떤 동창이나 친구들은 자기네들이 입지 않는 헌 옷들을 당신들에게 주겠다고 할지도 모릅니다. 그럴 때 그들이 주는 것을 기쁜 마음으로 받기 바랍니다. 그렇게 함으로써 당신들은 물건도 그냥 얻게 되거니와 그들로 하여금 당신들을 통해 좋은 일을 할 수 있는 기회를 주는 게 되기 때문이지요... 이곳 선교사 사회에서는 모든 사람들이 가족 수에 따라 똑같은 봉급을 받고 있으므로 경쟁 의식은 배제되어 있습니다. 선교사의 삶이란 그 가치가 지대하여 다른 어떠한 것과도 견줄 수 없는 독특한 점을 가지고 있습니다. 선교사가 되고자 한 동기가 불분명하고 종교적 믿음이 약하고 열정이 적은 사람들은 자연히 이 생활에서 탈락하고 맙니다. 당신이 탈락하면 그 자리를 메꾸려는 사람들이 많지 않다는 점을 잊지 말기 바랍니다. 당신의 자리를 일반 사회의 의사들은 탐내지 않기 때문에 당신이 종사했던 하나님의 사업은 심한 타격을 받게 됩니다. 하나님께서 당신들에게 맡긴 임무를 수행할 때 항상 하나님께 힘을 주십사고 간구하고 인도하심을 부탁드려야 합니다. 나는 당신들이 하나님을 충정으로 섬기리라고 확신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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