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회회의(교리 논쟁)
(4) 칼케돈 회의(AD451, Chalcedon)
1) 회의 소집 원인
에베소회의가 끝난 후에도 계속하여 문제가 꼬리에 꼬리를 물고 일어났다. 그것은 네스토리우스를 이단이라고 배척한 시릴당 중에서도 다른 의견이 나오게 되었던 것이다. 그것은 콘스탄티노플 근교의 수도원 원장인 유티케스(Eutyches)가 신인양성의 연합을 지나치게 강조한 나머지 양성의 구별을 어렵게 만든 것에도 원인이 있었다.
즉, 유티케스에 의하면 성육신 때 그리스도의 양성(신성, 인성)은 하나의 신인단성(Monophysitism)으로 연합되어 버렸다는 것이다. 이같은 단성론은 쉽게 함정에 빠지게 되었다.
즉, 무소부재한 것이 신의 속성이다. 그런데 예수 그리스도는 육신을 가졌기 때문에 무소부재할 수가 없다. 따라서 예수의 인성은 우리와 다른 신체를 가졌어야만 된다는 것이다.
이같은 유티케스의 주장은 그리스도의 인성이 우리 인성과 다르다는 결론을 내리게 했다. 이 주장 때문에 데오도시우스 황제를 충동하여 449년에 에베소대회를 열고 심한 몸싸움을 하다가 콘스탄티노플 감독인 '플라비안'(Flavian)이 맞아 죽는다.
이같은 극렬한 싸움을 중재하려고 로마 감독으로 있던 '레오'(Leo I)의 주선으로 451년에 데오도시우스 후임인 매제 '마크리누스'(Macrinus)의 명으로 '칼케돈회의'가 소집되었다. 이 칼케돈회의에는 630명의 감독이 참석했다.
2) 회의 결과
이 칼케돈회의에서는 레오가 보낸 서한(Leo of Tome)을 기초로 하여 그리스도의 신성과 인성을 공히 인정한 소위 말하는 '칼케돈신조'(Chalcedon Creed)가 채택된다. 이 칼케돈신조는 삼위일체 교리의 확립을 위한 결정적 신조로 전해지고 있다.
칼케돈신조의 전문은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는 신성에서도 완전하시고 인성에도 완정하시어 참 신이시고 참 사람이시며 이성이 있는 영혼과 육체를 구비하셨고 신성은 아버지와 동질이시고 인성은 우리와 동질이시며 죄를 제외하고는 전혀 우리와 같으시며 신성으로 말하면 만세 전에 아버지로부터 나시고 후세에 와서는 우리의 구원을 위하여 성모 마리아에게서 인성으로 나셨다'고 했다.
여기 칼케돈회의에서 교리논쟁을 하나의 신조로 채택하도록 영향을 미친 것은 로마교회 감독인 '레오'(Leo)의 힘이었다. 그동안 동방 교회들끼리 교리 논쟁으로 많은 정력과 시간을 소모하는 동안 서방교회인 로마교회가 조용히 지켜보다가 결정적인 영향력을 행사한다. 이 칼케돈신조가 완전한 문제 해결책은 아니었으나 그러나 로마교회의 힘을 크게 드러내는 데 큰 계기가 된 것은 사실이다.
(5) 제2차 콘스탄티노플회의(AD553, IIConstantinople)
1) 회의 소집 원인
앞서 칼케돈회의에서 교리논쟁이 일단락 된 것처럼 보였다. 그러나 칼케돈신조에 대하여 반대하는 사람들이 팔레스틴과 애굽에 있었다. 이 무렵 '유스티니아누스'(AD527-565, Justinianus) 황제가 처음에는 칼케돈신조를 옹호하고 그를 반대하는 세력을 핍박하였다. 그런데 황후가 반대파를 선대하므로 황제의 입장이 난처했다. 그래서 황제는 양 파를 화해시키려고 하였다. 그렇지만 그 일이 그렇게 쉽지 않았다.
그런 와중에서 소위 '3장령'(Three Chapters)이 등장하게 된다. 이 3장령이란 안디옥 파에서 존경을 받던 세 신학자에 의해 이루어진 칼케돈신조에 반대되는 주장이다.
그 세 신학자란, 그리스도의 인성을 강조한 몹수에스타의 데오도어(Theodore of Mopsuesta), 시릴의 반대파(anti Cyrillian)였던 데오도렛(Theodoret of Cyrus), 그리고 Nestorian 입장으로 그리스도는 신도 인간도 아닌 단지 구세주일 뿐이라는 주장을 내세운 에뎃사의 이바(Ibas of Edessa)를 말한다.
이 같은 세 신학자의 입장은 모두가 칼케돈신조에 위배되는 반대 입장이었다. 유스티니아누스 황제는 3장령으로 문제가 더 복잡해지고 교회는 계속 분란이 거듭된다는 것을 깨닫고 제5차 세계대회를 553년에 콘스탄티노플에서 소집하게 된다.
2) 회의 결과
이 대회에서 3장령을 발표한 세 신학자 모두를 정죄한다. 그리고 칼케돈신조를 재 확인한다. 그러나 대회 후 후유증은 더 크게 번져진다. 전에 칼케돈 신조를 반대하던 애굽과 수리아 지방의 교회들은 끝내 분리하여 독립교회를 이룬다.
그래서 애굽에 있는 콥트교회(Coptic Church), 애굽교회, 동방의 알미니아교회, 마로나잇교회, 그리고 수리아교회 등으로 분리하여 오늘날까지 전해오고 있다.
실로 교회 문제를 교회 스스로 해결하지 않고 정치권력의 힘으로 해결하려고 할 때 그 결과는 너무도 엉뚱한 결과들을 낳게되는 것을 보게 된다.
(6) 제3차 콘스탄티노플회의(AD680, IIIConstantinople)
1) 회의 소집 원인
앞서 제2차 콘스탄티노플회의가 열려 '단성론'(Monophysitism)을 더 이상 언급하지 못하도록 논쟁이 종식되는 듯하였다. 그러나 교회는 곧이어 '단의론'(Monothelitism) 논쟁을 불러 일으켰다.
이 단의론이란 예수께서 한 의지가 있었느냐 아니면 두 개의 의지가 있었느냐 하는 논쟁이었다. 이 같그리스도는 오직 하나의 의지, 곧 신적 의지만 있었을 것이라는 주장이 로마감독 '호노리우스'(Honorius)와 콘스탄티노플 감독 '세르기우스'(Sergius)에 의해 창도되었다.
단의론 주창자들은 칼케돈신조를 단성론에 가까운 의미로 해석하여 그리스도가 성(性)은 둘이나 의지는 하나라고 하였다. 여기에 단의론을 반대하는 양의론(兩意論)파가 격렬하게 반대를 하고 일어났다.
이 같은 분쟁을 막아보려고 '헤라클리어스'(Heraclius) 황제가 638년에, 콘스탄스 2세가 648년에 힘을 썼으나 양론은 도무지 수습되지 않았다(단의론, 양의론을 금지시켜 봄). 그리하여 680년에 '콘스탄틴 4세'(AD668-685)가 콘스탄티노플에서 제6차 세계대회를 소집하게 된다.
2) 회의 결과
여기서 단의론(그리스도는 신적 의지만 가졌다)은 거부되고, 양의론(그리스도는 신적, 인적 의지가 복합되어 있다)이 채택된다. 그러나 인간의 의지는 신적 의지에 종속관계를 갖고 있는 것으로 해석을 붙여놓았다.
이렇게 하여 칼케돈신조에서 채택된 그리스도의 양성론과 콘스탄티노플에서 결정된 양의론으로 기독론 논쟁은 종식된다. 기독론 논쟁은 AD325년 니케아회의에서 시작하여 680년 콘스탄티노플에서 종결되기까지 수백년 동안 처절한 싸움 끝에 막을 내렸다.
그 후에도 787년의 니케아회의, 869, 879년의 콘스탄티노플회의 등 교회회의는 계속되면서 교회의 중대한 문제를 회의에서 결정하는 관행이 중세교회까지 계속되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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