종교개혁의 배경
2. 종교개혁운동의 세 가지 형태
우리 주변에서 손쉽게 얻을 수 있는 출판물에서 '개혁주의', '칼빈주의', '개혁 신학', '칼빈 신학' 등의 용어들이 발견된다. 우리는 먼저 이들 용어에 대한 오해를 풀어야 되겠다. 16세기 종교 개혁 운동이란 루터를 출발점으로(1517) 유럽 여러 곳에 확산되어 일어났던 종교 운동으로 이해된다. 더 구체적으로 말하면, 루터와 멜란흐톤(P. Melanchthon) 등을 비롯해서 비텐베르크(Wittenberg) 중심으로 일어난 종교 개혁 운동, 쯔빙글리(H. Zwingli)와 불링거(H. Bullinger) 등을 비롯해서 쮜리히(Z rich) 중심으로 일어난 종교 개혁 운동, 파렐(G. Farel)과 깔뱅(J. Calvin) 등을 비롯해서 즈네브(Gen ve) 중심으로 일어난 종교 개혁 운동, 마르틴 부처(Martin Bucer = Butzer) 등을 중심으로 스트라스부르(Strasbourg)에서 일어난 종교 개혁 운동 등이다.
비록 동유럽에 속하는 체코나 헝가리 등과 영국과 스코틀랜드를 중심한 종교 개혁 운동과 스칸디나비아 반도를 중심한 종교 개혁 운동, 남부 유럽의 종교 개혁 운동(이탈리아 및 프랑스 등) 등도 언급되어야겠지만, 우리의 논의 목적을 위해서는 이 지역들을 제외시키더라도 큰 무리는 없다고 생각된다. 왜냐하면, 동유럽이나 기타 지역의 종교 개혁 운동은 위에 언급된 서 유럽의 몇몇 지역들과 깊은 연관을 맺고 있으며, 직접 또는 간접적으로 그 영향을 받았기 때문이다.
루터 등의 사상을 발전시키고 보존하려는 신학 및 교회 주류를 '루터주의', '루터파', '루터 교회' 전통이라고 명명할 수 있고, 오늘날 대부분의 독일과 스칸디나비아 반도의 대부분의 국가들 중에서 찾아볼 수 있다. 쯔빙글리(H. Zwingli) 등의 사상을 계승하고 있는 신학 주류를 '쯔빙글리주의'라고 부를 수 있는데, 오늘날의 바젤, 베른, 쮜리히 등 스위스의 중동부 지역에서 발견된다. 이 전통은 종교 개혁 당시 이미 영국이나 스코틀랜드에 '계약 신학'('federal theology')의 형태로 영향을 미치고 있었다. 우리는 여러 가지 이유로 스트라스부르와 즈네브 중심으로 일어난 종교 개혁 운동을 계승하려는 신학 주류를 '개혁파', '개혁주의', '칼빈주의', '장로교'라고 부를 수 있고, 오늘날의 스코틀랜드, 캐나다, 미국, 호주, 네덜란드, 헝가리, 특히 우리 나라 등에서 '개혁' 또는 '장로' 교회 형태로 존속하고 있다. 종교개혁 제1세대인 마르틴 부처(Martin Bucer)는 1518년 종교개혁 1세대 루터를 통해서 종교개혁자가 되지만, 초기에는 종교개혁 1세대 쯔빙글리의 영향하에 있다가, 1536년에 루터와 함께 비텐베르커 일치신조(Wittenberger Konkordie, 1536)에 합의함으로써 그 이후부터 루터의 영향을 많이 받게 된다. 부처의 사상은 스트라스부르에서(1538-1541) 함께 사역했던 종교개혁 2세대 깔뱅에게 전달되고, 깔뱅의 한 제자 종교개혁 3세대 베자(T. Beza)에 의해서 유럽에서는 '개혁교회'의 형태로, 깔뱅의 다른 한 제자 종교개혁 3세대 녹스(John Knox)에 의해서 스코틀랜드 (영-미)에서는 '장로교회'의 형태로 계승되었다.
2.1. 루터를 중심한 비텐베르크: 구원론 중심
우리는 중세 로마 카톨릭 교회가 변질시켰던 은혜의 복음의 본질을 재발견하고 회복시켰던 루터에게 종교 개혁의 왕관을 돌려줌으로써 우리의 논의를 시작한다. 만약 지금도 그가 우리 곁에 있다면, 그 왕관을 받아서 자신을 종교 개혁의 도구로 사용하신 예수 그리스도께 바칠 것이다. 왜냐하면, 그가 재발견한 복음은 하나님의 은혜와 예수 그리스도에 기초를 두고 있는 '이신 칭의'( = '믿음으로 의로와짐')라는 성서 말씀이기 때문이다.
그의 최대의 관심은 은혜론과 기독론에 기초를 둔 구원론이었다. 이것은 로마 카톨릭 교회와 같이 낙관적인 자연 신학에 근거를 두고 있는 공로 사상과 정면으로 대치되는 것이다. 로마 카톨릭 교회와 같이 인간의 공로나 기타 자연 지식을 통해서 구속주 예수 그리스도에게 도달할 수 있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인 성서에 기록된 대로 하나님의 은혜와 성령의 선물인 믿음을 통해서만 구속주 예수 그리스도를 알 수 있고, 만날 수 있다는 진리이다. 그러므로, 루터 전통 속에 있는 신학과 교회는 '이신 칭의' 교리에 관한 기록을 많이 담고 있는 로마서나 갈라디아서 등을 더욱 애독하는 것은 당연하다. 루터가 교회를 조직하거나, 성장시킨다거나, 사회나 국가의 개혁에 대한 의지나 관심이 없었다기보다는 현재 그가 직면하고 있는 급박하고 가장 중요한 문제는 로마 카톨릭 교회에 의해서 변질되고 왜곡된 구원론 대신에, 은혜론과 기독론에 뿌리를 두고 있는 성서적 구원론을 재건하고, 이 복음의 말씀을 설교하고, 전파하고, 변증하는 것이었다.
그러므로, 우리는 루터가 직면했던 역사적 상황을 항상 염두에 두고, 그를 이해해야될 것이다. 그러나, 지금까지 루터에 대한 편파적 이해가 가끔 있었다. 가령, 루터는 그의 두 왕국 사상으로 인해서 종교와 정치를 지나치게 분리하여 사회 개혁 의지가 부족했다든지, 개인 구원에 지나치게 관심한 나머지, 교회 조직이나 직제에 대해 무관심했다는 등이다. 그러나, 우리가 정직하게 그의 초기 작품부터 말기 작품까지 분석해보면 그의 사상적, 신학적 발전에도 불구하고, 본질적 측면에서는 일관된 복음 사상을 발견한다. 로마 카톨릭 교회에 의해서 변조된 자연 신학에 기초한 구원론을 비판하고, 은혜론과 기독론에 뿌리를 둔 성서적 구원론, 즉 '이신칭의' 진리를 재발견한 루터를 종교 개혁 신학과 개혁-장로교와 개신교는 항상 기억해야할 것이다.
2.2. 쯔빙글리를 중심한 쮜리히: 국가론 중심
쯔빙글리의 지대한 관심은 복음을 통한 국가의 형성과 민족의 대동 단결이었다. 그에게는 '훌륭한 시민만이 훌휼한 그리스도인'이 될 수 있었다. 그는 조국이 위기 가운데 있을 때, 그 당시 사회적, 종교적 상식을 깨뜨리고, 종교 지도자로서 전쟁에 참가했다가 불행히도 전사하게 된다. 그의 전사 문제를 둘러싸고 오늘날뿐만 아니라, 특히 그 당시에도 많은 비판이 제기되었다. 어떻게 감히 성직자가 사람을 죽이는 전투에 참전할 수 있을까? 국토가 분단되고, 비기독교 문화에 젖은 우리로서는 종교 지도자의 참전이 당연한 일인 것 같다.
쯔빙글리의 전사는 안정된 국가(정부) 없이는 교회의 생존과 효과적인 복음 전파가 힘든다는 그의 '국가 교회', '민족 교회' 사상과 깊은 관계가 있다고 생각된다. 여기에 대한 좋은 예로 구약 이스라엘의 종교와 정치가 일치된 神政정치를 생각할 수 있다. 물론 '국가 교회'나 '민족 교회' 개념이 신학적으로 문제가 되지 않는 것은 아니지만, 우리는 쯔빙글리를 그의 당시의 역사적인 상황의 고려 없이 일방적으로 비판할 수는 없을 것이다. 그가 처했던 상황은 일제 침략기에 용감하게 독립 운동을 전개했던 한국 교회의 상황을 방불케 한다. 북쪽으로는 독일, 서쪽으로는 프랑스, 남쪽과 동쪽에는 친 로마 황제 제국들(이탈리아, 오스트리아 등)의 틈바구니 속에서, 험악한 알프스 산지에 흩어져 있는 목장 촌락들을 통합해서 오늘날의 '스위스'라는 독립 국가의 기초를 형성하는 것이 쯔빙글리에게는 절대 절명의 과제였다.
그는 청년 때는 아무 의식 없이 로마의 용병으로 전쟁에 참가했던 중, 자기와 같은 조국의 꽃다운 젊은이들이 비참하게 죽어 가는 모습을 처절하게 목도한 후, 그 당시 사회에서 당연지사로 여겨졌던 용병 제도를 비판하게 되었다. 그 당시 알프스 산지의 대부분의 젊은이들은 주변 국가들의 용병으로 종사하였고, 그들을 통해서 획득된 급료는 목장 공동체의 중요한 재정 수입원이 되었다. 쯔빙글리의 사회와 국가에 대한 적극적인 정치 윤리 사상은 오늘날의 기독교 사회주의 사상이나 변증 신학 전통을 이루어 쮜리히 중심으로 계속되고 있다.
그의 강한 하나님의 섭리 의식은 그의 당시 유럽 일대를 휩쓸던 역병에 걸렸다가 구사 일생으로 살아난 그의 개인 신앙 체험에서 비롯되었다는 사실은 의심의 여지가 없지만, 그의 고국의 상황은 그의 하나님의 섭리 신앙을 더욱 강화시켰던 것 같다. 만왕의 왕이요, 만주의 주이신 하나님은 그리스도인과 교회의 주님일 뿐만 아니라, 모든 이방인들과 만물을 다스리시는 창조주 하나님과 섭리자 하나님이라는 신앙 고백을 우리는 특별히 쯔빙글리로부터 배울 수 있을 것이다. 이 같은 맥락에서 "훌륭한 시민만이 훌륭한 그리스도인이 될 수 있다"는 그의 사상이 쉽게 이해될 수 있을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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