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꼬마 철학자1 - 알퐁스 도데

Joyfule 2012. 4. 28. 15:31
 
 
꼬마 철학자1.- 알퐁스 도데  
 
랑그도끄에서의 어린시절
18xx 년 5월 13일, 
나는 프랑스 남부에 있는 랑그도끄 지방의 조그마한 마을에서 태어났다. 
프랑스 남부지방의 여느 도시들처럼 
그 마을도 햇빛이 쨍쨍 비치는 화창한 날이 많았고, 
공기는 뿌연 먼지가 떠다니는 게 보일 만큼 혼탁했다. 
그리고 그곳에는 까르멜 수녀원과 그 옛날 로마시대 유적지도 몇 군데 있었다.
그 당시 비단장사를 하던 우리 아버지 에세뜨 씨는 도시의 성문 곁에 커다란 공장을 갖고 있었다. 
아버지는 공장 담의 한쪽을 허물어 넓은 뜰을 사이에 두고 맞은편으로 우리가 살 집을 지었다. 
집 옆에 있던 무성한 플라타너스가 짙은 그늘을 드리워 주어 그 집은 아주 살기가 좋았다.
나는 그 집에서 태어났으며 내 생애에 있어서 유일하게 즐거웠던 어린시절도 그곳에서 보냈다. 
그래서 나에게는 그 뜰과 공장, 
플라타너스에 얽힌 어린시절이 영원히 잊혀지지 않을 아름다운 추억으로 남아 있다. 
아버지의 파산으로 인해 그곳을 떠나야만 했을 때 
나는 마치 다정한 사람들과 헤어지는 것만큼이나 무척 슬펐었다.
나의 출생이 우리 집안에 행복을 가져다 주지 못했다는 사실을 우선 얘기 해야겠다. 
자질구레한 집안 일을 맡아 하던 안누 할머니는 종종 내가 태어나던 때의 일을 회상하며 
넋두리처럼 내게 사설을 늘어놓곤 했다. 
그 당시 멀리 여행중이던 아버지는 세째 아들이 태어났다는 소식과 
마르세이유의 고객이 4만 프랑이 넘는 거액의 돈을 가지고 오던 도중에 
행방불명되었다는 소식을 동시에 들었다고 한다. 
그래서 기쁘기도 하고 비탄에 잠기기도 한 아버지는 
마르세이유의 고객이 거액의 돈과 함께 사라져 버린 소식에 
울어야 할지 종잡을 수 없는 심정 속에서 한참을 망설였다는 것이다. 
그러나 사랑하는 아버지는 울지 않을 수 없었다. 
그것도 두 번씩이나 소리내어 울지 않으면 안 되었다.
솔직이 말해서 나의 운명 역시 우리 부모님들의 나쁜 사주팔자를 그대로 타고난 셈이었다. 
내가 태어난 날부터 두 분에겐 마치 도둑처럼 숨어 있던 끔찍한 불행이 
여기저기에서 튀어나와 덮쳐들기 시작했다. 
그러니까 우선 마르세이유의 고객이 자취를 감추어 버렸던 사건에 뒤이어, 
두 번씩이나 연거퍼 불이 났으며, 
방적기에 날을 거는 공장직원들이 갑작스럽게 파업을 시작했고 
바티스트 삼촌과 사이가 틀어졌으며, 
우리가 거래하는 상인들과 엄청나게 많은 돈을 들여 재판을 벌이기도 했다. 
마침내 18xx년에 혁명이 온 나라를 휩쓸게 되자 
몰락해가던 우리 집안은 설상가상으로 타격을 받아 휘청거리게 되었다.
이때부터 날이 갈수록 공장의 모습은 황량하게 변해 갔다. 
작업장은 차츰 썰물이 빠져나간 뒤마냥 텅텅 비게 되었으며, 
일주일이 멀다하고 방적기가 한 대씩 부숴져 나뒹굴었고, 
한 달이 지난 뒤에는 날염판이 하나씩 사라져 버렸다. 
마치 병든 육체에서 서서히 생명이 빠져나가듯 
집안이 기울어져 가는 모습을 지켜보는 것은 고통스러운 일이었다. 
처음에는 삼층에 있는 방에 더이상 들어갈 수 없게 되었으며, 
다음에는 안뜰 출입이 금지되었다. 
이런 일이 2년 동안 계속됐다. 
그 2년 동안에 공장은 폭삭 무너져내리듯 망해 버렸다. 
그러던 어느날, 
뎅그렁거리며 사방으로 퍼지던 공장의 종소리는 더이상 울리지 않게 되었고, 
움직일 때마다 삐걱거리던 우물의 도르래조차도 멈춰 버리고, 
염색한 옷감을 헹구어 낸 갖가지 색의 물이 흘러 내리던 도랑은 바닥이 바싹 말라 붙게 되었다. 
나날이 황폐해 가던 공장에는 아버지와 어머니, 안누 할머니, 자끄 형과 나만이 오롯이 남게 되었다. 
그리고 결국 문지기 꼴롱브와 그의 아들 루제만이 폐허가 된 공장을 지키게 되었던 것이다.
우리 집안은 완전히 거덜난 채 망해 버렸다.
내가 여섯 살인가 일곱 살인가 되던 해였다. 
나는 유난히 허약한 체질이어서 잦은 병치레를 해야 했기 때문에 
부모님들은 날 학교에 보내려 하지 않았다. 
어머니는 허약하고 내성적인 나를 안쓰러워하여 
틈나는 대로 읽기와 쓰기, 짤막한 스페인어를 가르쳐 주었으며
기타 반주에 맞추어 두세 곡의 아름다운 노래를 가르쳐 주곤 했다. 
그 덕분에 난 일가친척 사이에서 신동이라는 소리를 듣게 되었다. 
집안에서만 생활하며 자상한 어머니로부터 교육을 받았기 때문에 
난 집 밖으로는 단 한 발자국도 벗어나 보지 못했다. 
바깥 세상에 나가볼 기회가 없었던 나는 우리 집의 최후를 낱낱이 목격할 수 있었다. 
고백하건대 나는 꼬리를 물고 일어나는 집안의 불행한 일들을 지켜보면서 조금도 슬퍼하지 않았다. 
오히려 나는 이젠 온 공장 안을 독차지해서 
내 마음대로 뛰어다닐 수 있겠구나 하는 생각으로 은근히 기분이 들떠 있었다. 
공장이 문을 닫기 전에는 일을 하지 않는 일요일에만 공장 안에 들어가 놀 수 있었던 것이다. 
나는 루제에게 한껏 목에 힘을 주며 점잖게 말하곤 했다.
"이제 이 공장은 전부 내꺼야. 
그러니까, 지금부터 여기서 놀려면 내 허락을 받아야 해."
그러면 순진하게도 맹하게 쳐다만 보던 루제는 내 말에 고개를 끄덕여 댔다. 
얼간이 같은 그애는 내 말이라면 뭐든지 곧이곧대로 믿었다. 
어쨌든 나만 빼놓고 집안식구들은 모두 우리 집의 파산을 그다지 즐거워하지 않는 것 같았다. 
아버지는 갑자기 무서운 사람으로 변했다. 
원래부터 허풍이 심하고 다혈질인 아버지는 일단 화가 나면 
고래고래 욕설이 뒤섞인 고함을 지르며 
무엇이던 닥치는 대로 집어던져서 깨뜨리는 난폭한 성격이었다. 
하지만 걸핏하면 큰소리를 지르며 싸움질을 하거나, 
마치 포악한 군주처럼 눈에 보이는 모든 것들을 부들부들 떨게 만들어야만 
직성이 풀리는 그 성질만 빼놓으면 아버지는 정말 좋은 분이었다. 
삽시간에 몰아쳐 온 불행의 회오리 속에서도 그는 조금도 기가 꺾이지 않았고 
오히려 끓어오르는 분노로 더욱 거칠어질 뿐이었다. 
다들 잠든 고요한 밤에도 그는 미친 듯이 화를 내며 그저 닥치는 대로 화풀이를 해댔다. 
태양, 북서풍, 자끄 형, 안누 할머니, 혁명, 그렇다! 
아버지의 입에서 끊임없이 저주의 빛을 띠고 뱉아지던 혁명!... 
옆에서 아버지가 퍼부어 대는 말만을 귀담아 듣고 있으면 
그 18xx년의 혁명이야말로 유독 우리 집에만 들이닥쳐 
우리를 불행의 골짜기로 떨어뜨렸다고 생각하게 될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 집안에서 오갔던 혁명가들에 대한 평판이 
좋을 수 없었다는 사실은 어쩌면 당연한 일이었는지도 모른다. 
물론 그당시 우리 식구들이 혁명은 일으켰던 신사양반들에 대해 
어떻게 얘기했는지 들은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오랜 세월이 지난 지금까지 하나님의 은총으로 죽지 않고 살아 꼬부랑 할아버지가 다 된 아버지는 
신경통이 도질 때면 기다란 의자를 늘 독차지하고 드러누워서는 이렇게 투덜대곤 한다.
  "아! 그 빌어먹을 혁명가놈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