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꼬마 철학자23 - 알퐁스 도데

Joyfule 2012. 5. 23. 11:11
 
 
꼬마 철학자23  - 알퐁스 도데  
 
  괴롭고 긴 나날 3.

  그녀가 나가고 나면 나는 내 자신이 정말 한심스러워 미칠 지경이었다.
   '아! 내일은 무슨 일이 있더라도 말을 해야지, 하고 말 거야.'
  그렇지만 아무리 굳게 결심을 해도 그 다음날도 
  그리고 그 다음날도 여전히 똑같은 일만 되풀이되었다.
우리가 함께 마주 보고 서로에 대한 얘기를 속시원히 할 수 있도록 
그녀에게 먼저 말을 붙여야 한다고 생각했지만 
내가 그런 용기를 낼만한 위인이 아님을 자각한 나는 어쩔 수 없이 편지를 쓰기로 작정했다. 
어느날 저녁, 나는 그녀에게 잉크와 종이를 가져다 달라고 정중하게 부탁했다. 
이때까지 내가 쓴 어떤 편지보다도 중요한 편지를 쓰기 위해서였다. 
그녀는 틀림없이 내가 무엇을 하려고 그러는지 눈치챘을 것이다. 
그녀는 영리하고 또 사람의 마음을 읽을 수 있는 순수한 눈을 가지고 있었으니까. 
그녀는 잽싸게 잉크와 종이를 찾아서는 나에게 건네주고 웃음을 지으면서 서둘러 방을 나갔다.
나는 편지를 쓰기 시작했다. 밤새도록 쓰고 또 썼다. 
그러나 온 밤을 지새우고 아침이 되었을 땐 내 소파 옆에는 
꾸겨진 종이가 지저분하게 널려 있을 뿐 
그렇게도 쓰고 또 쓴 장문의 편지에는 겨우 세 마디밖에 쓰여 있지 않았다. 
무수히 많은 말들을 쓰고 또 써 보았지만 이 세 마디야말로 
이 세상에서 가장 감동적이라 생각되었으며 그녀에게도 분명히 그러하리라고 굳게 믿었다.
드디어 그녀가 올 시간이 되었다. 나는 무척 흥분이 되었다. 
나는 그녀가 방에 들어오자마자 즉시 떨지도 않고 침착하게 
이 편지를 건네주리라 다짐하며 자세를 가다듬었다. 
그리고 그녀가 들어오고 나서 이 방에서 벌어질 광경을 머리속에 한번 그려 보았다. 
그녀는 문을 열고 방에 들어와서는 탁자 위에 스프와 닭 요리를 내려놓고
 '안녕하세요, 다니엘 씨!...'하고 말하며 나를 쳐다보겠지. 
그러면 나는 즉시 용감한 기사처럼 
'친절하신 아가씨, 여기 이 정성이 담긴 편지를 당신에게 바칩니다.'라고 말하며 
공손하게 그녀에게 편지를 건네주는 거야. 
그러면 그녀는....
누군가가 복도를 사뿐사뿐 걸어오는 발자국소리가 들려 왔다. 
나는 떨리는 손으로 편지를 들었다. 방망이질하듯 가슴이 마구 뛰었다.
문이 스르르 열렸다. 
그러나 들어온 사람은 아름다운 검은 눈동자의 아가씨 대신에 그 안경잡이 마귀할멈이었다.
나는 감히 웬일이냐고 물어 볼 수조차도 없었다. 
그저 맥이 탁 빠져 넋이 나간 채 아연실색해질 뿐이었다. 
왜, 무엇 때문에 그녀는 오지 않을까? 아니면 올 수가 없는 것일까? 
궁금함으로 터질 듯한 가슴을 진정시키며 밤이 도기를 초조하게 기다렸다. 
그러나 밤에도 그녀는 오지 않았으며, 그 다음날도, 그 다음 다음날도, 
영원히 그녀는 오지 않았다. 아니 올 수가 없었던 것이다.
그녀는 나를 위해 설탕을 훔쳤고 그 때문에 여기에서 쫓겨나 다시 고아원으로 돌려 보내졌다. 
그녀는 어른이 될 때까지 4년 동안 고아원에 갇혀 있어야만 하게 되었다. 
불쌍한 아가씨....
의무실의 아름다운 나날들과도 이제 안녕을 고해야만 했다. 
아름다운 검은 눈동자의 아가씨는 떠나 버렸고, 
설상가상으로 그 말썽꾸러기 망나니들이 꾸역꾸역 다시 돌아오기 시작했다. 
내게는 두 가지 불행이 한꺼번에 몰아닥친 것이었다.
나는 6주일 만에 처음으로 운동장에 내려갔다. 
핼쓱하고 야위어 전 보다 더 작아진 모습으로....
학교는 잠에서 깨어나 꿈틀거리기 시작했다. 
다시 양탄자를 털고, 의자를 들어 올리고 걸레질을 하는 등 
대청소를 하느라 복도는 흥건히 젖어 있었고 학교 전체가 술렁거렸다. 
그리고 옛날처럼 똑같이 비오 씨의 열쇠가 사납게 설쳐 대기 시작했다. 
아니 더 큰소리로 쨍그렁! 쨍그렁! 쨍그렁! 울려 댔다. 
비오 씨는 방학 동안에도 쉬지 않고 자기가 만든 규칙에다 
몇 개의 조항을 덧붙이는 한편 열쇠꾸러미에다가도 열쇠를 몇 개 더 달아 놓았다. 
다만 나만이 그 꿈틀대는 학교의 술렁거림 속에서도 그저 얌전하고 묵묵히 있을 뿐이었다.
학생들이 속속 도착했다. 부르릉! 부르릉! 달그락! 딸그락! 덜커덕! 
방학식 때 봤던 이륜마차와 문장 달린 차들이 교문 앞에 다시 그 모습을 나타냈다. 
출석을 불러 보니 안 나온 아이들도 더러 있었지만 그 자리는 새로 온 아이들로 메꿔졌다. 
학급도 새로 편성되었다. 
나는 다시 중급반을 맡게 되었는데 벌써부터 바짝 주눅이 들어 떨고 있었다. 
그러나 가끔 나는 이번 아이들은 저번 아이들보다 
덜 심술궂을지도 모른다고 스스로를 위로하기도 했다.
개학날, 예배당에서는 성가대의 합창소리가 드높이 울려퍼졌다. 
성신미사를 올리는 것이었다. 
교장선생님은 단추구멍에 자그마한 은빛 훈장이 달린 예복을 입고 있었고 
그 뒤로는 교수 예복으로 단장한 교사들이 자리를 잡았다. 
이공과목을 맡은 교사들은 흰색 담비 교수복을 입고 있었다. 
다만 중급반 담임만이 색다르게 생긴 챙 없는 모자에 연한 색깔의 장갑까지 끼었다. 
그걸 보고 비오 씨의 얼굴은 몹시 불만스러운 듯이 붉으락푸르락 경련을 일으켰다. 
예배당 한구석에 학생들 사이에 끼어 앉은 나는 
그 멋진 예복과 은빛 훈장을 부러운 눈길로 바라보았다.
 '난 언제 정식 교사가 되나? 
언제 우리 가족이 모두 함께 모여 사는 우리 집을 다시 짓게 될까?'
나는 무척 서글퍼졌다. 
우울하고 찌들리고 자신이 왜소하게만 느껴질 불행한 나날들이 얼마 동안이나 계속되어야 할까... 
내 자신이 무척 불쌍한 놈이라고 생각되었다. 
오르간소리를 듣는 순간 갑자기 슬픔이 복받쳐오며 엉엉 울고 싶어졌다. 
그 순간 나는 저쪽 성가대 한모퉁이에서 나를 보며 미소짓고 있는 
초췌한 차림의 잘생긴 얼굴을 발견했다. 
제르만느 신부님의 미소 띤 온화한 얼굴을 보자 내 마음은 편안해졌다. 
오래간만에 제르만느 신부님을 다시 만나 보게 되니 생기가 돌면서 마음이 차분하게 가라앉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