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감성을 위한 ━━/세계문학

꼬마 철학자28 - 알퐁스 도데

Joyfule 2012. 5. 29. 11:45
 
 
꼬마 철학자28 - 알퐁스 도데  
 
   신비 속의 쎄실리아
   겨울이 어느덧 성큼 다가왔다. 
   세벤느 지방의 겨울은 온통 음울한 회색빛이었고, 
   건조한 데다가 끔찍하게 추웠다. 
   잎이 다 떨어져 버려 앙상한 가지를 드러낸 나무들이 
꽝꽝 얼어 버린 운동장에 을씨년스럽게 서 있는 모습은 서글프게 보였다. 
모두들 동이 트기 전에 기상을 했다. 
날은 추웠다. 세면대에까지 얼음이 얼 정도였으니까. 
선잠에 빠진 학생들은 한없이 늑장을 부렸다. 
그들을 다 모으려면 수차례나 종을 울려야 했다.
  "서둘러라, 제군들!"
 선생들은 옷 속으로 매섭게 파고드는 추위를 
조금쯤 덜어 보려고 발을 동동 구르며 움직여 댔다.
학생들은 그럭저럭 엉성하게 줄을 서서는 어둠침침한 넓은 계단을 걸어내려가 
혹독한 삭풍이 휘몰아치는 길고 긴 복도를 따라 걸었다. 
그렇게 하루가 시작되었다.
나에게는 괴롭고 긴 겨울이었다.
나는 공부를 그만두고 말았다. 
자습실에 있는 화력좋은 난로 곁에서 
노곤해진 몸을 주체 못해 꾸벅꾸벅 졸기가 일쑤였다. 
시베리아 벌판처럼 되어 버린 고미다락방은 너무나 추웠기 때문에 
나는 수업시간중에는 바르베뜨 까페에 틀어박혀 있다가는 
문을 닫을 때쯤 해서 그곳을 빠져나왔다. 
늦은 저녁나절에 바로 그 까페에서 로제가 내게 펜싱을 가르쳐 주었다. 
시간 관계상 펜싱연습실을 사용할 수가 없었기 때문에 
우리는 까페 한가운데서 펀치술을 마시면서 당구 큐대로 펜싱연습을 했다. 
하사관들이 심판을 봐 주었다. 
그들은 내가 아주 잘해 낼 수 있다고 용기를 북돋우며 
그 가증스런 드 부끄와랑 후작을 확실히 죽일 수 있는 
새 검술을 매일 하나씩 배우라고 말했다. 
그뿐만이 아니었다. 
그들은 압셍뜨술에 어떻게 단맛을 내는가도 친절하게 가르쳐 주었다. 
그러면 그 대가로 난 그들이 당구를 칠 때 
함께 어울리며 끝까지 점수를 계산해 주곤 했다.
그해 겨울은 내겐 참기 힘든 고통의 나날이었다.
그 우울한 겨울 어느날 아침의 일이었다. 
추위를 피해 따뜻한 바르베뜨 까페 안에 뛰어들듯 들어섰다. 
지금도 귓가에 맴도는 듯한 당구를 치는 요란한 소리와 
사기 난로에서 나오는 코를 고는 듯한 소리가 한데 뒤섞여 
문을 열자 더운 열기와 함께 한꺼번에 왈칵 밀려들었다. 
나를 발견한 로제가 급히 다가와서 은밀한 목소리로 말을 건넸다.
 "할 말이 있소, 다니엘 씨!"
그는 나의 팔을 잡고는 주위를 두리번거리며 
은밀한 표정을 풀지 않은 채 구석방으로 데려가는 것이었다.
그는 자신이 지금 어떤 여인과 깊은 사랑에 빠졌다는 얘기를 
침통한 표정으로 내게 다 털어놓았다. 
로제가 자기 가슴 속에 숨겨 놓은 비밀 이야기를 숨김없이 들려주자 
나는 갑자기 그와 대등한 인물처럼 생각되어 다소 우쭐한 기분에 빠졌다. 
그러면서 나는 스스로 조금씩 성숙해져 점잖은 어른이 되어 간다는 느낌이 들었다.
그 펜싱 교사는 자신의 긴 사랑 얘기를 되도록이면 감동적으로 말하려고 애쓰는 듯했다. 
호탕하게 생긴 펜싱 교사는 장소를 밝힐 수 없는 어떤 곳에서 
한 여인을 만나게 되었는데 첫눈에 반하고 말았다고 했다. 
그 여인은 싸르랑드에서느 무척 고귀한 가문 출신으로 
자신이 결코 오르지 못할 나무를 쳐다본 격이지만  
그녀를 몹시 사랑하기 때문에 고통스러운 나날을 보내고 있다고 했다. 
하지만 한편으로는 그 여인은 고귀한 귀족계급임에도 불구하고 
자신을 사랑하게 되리라는 사실을 믿어 의심치 않으며, 
그래서 편지를 써서 사랑을 고백해야겠는데 불행히도 펜싱 교사인 자신은 
펜을 놀리는 일에는 그다지 능숙하지가 못하다고 어물거렸다. 
그러면서 덧붙이길 바람난 쳐녀만 같아도 별문제가 없을 텐데 
상대는 무척 높은 지위의 여자이므로 술좌석에서나 써먹는 스타일로는 어림없으니 
그것이 고민이라고 했다.
나는 그가 침통해 하면서 늘어놓은 얘기의 뜻을 모두 알았다.
  "무슨 말이지 알겠어요. 당신은 그 여자에게 
보낼 점잖은 연애편지를 써줄 만한 사람으로 저를 생각한 거로군요."
  펜싱 교사는 얼굴에 환한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맞아요, 바로 그 말이오."
  "자아, 난 당신 편이오. 당신이 원할 때 시작하기로 합시다. 
하지만 누군가가 써준 듯한 냄새를 풍기지 않으려면 
그 여자에 관해서 좀더 상세하게 말해 주셔야겠어요."
펜싱 선생은 몹시 경계를 하는 표정으로 주위를 휘둘러보더니 
콧수염을 내 귀에 바짝 붙이고는 소곤소곤 말했다.
"파리 출신의 금발 여인이오. 
마치 은은한 꽃향기를 풍기는 듯한 쎄실리아라는 여인이오."
그는 그 여인의 높은 지위 때문에 더이상 자세한 얘기를 해줄 수가 없노라고 했다. 
하지만 내게는 그 정도의 정보로도 충분했다. 
바로 그 날, 저녁 자습시간 동안 나는 쎄실리아라는 
아름다운 이름의 그 금발 여인에게 내 첫 편지를 썼다.
이렇게 해서 나와 그 신비감에 감싸인 여인 사이에 
기묘하고 설레이는 편지 왕래가 시작된 지 거의 한 달 가량이 흘러갔다. 
한 달 동안 나는 하루에 평균 두 통씩 사랑의 열정이 가득 담긴 편지를 썼다. 
그 편지들 중에는 마치 라마르틴느 델미르의 편지처럼 
감미롭고 부드러운 안개가 깔린 듯이 모호한 내용도 있었으며, 
미라보 드 소피의 편지처럼 열정적이고 사랑의 고통으로 울부짖는 듯한 내용도 있었다.
 "오, 쎄실리아, 이따금씩 황량한 바위 위에서..."로 시작해서
 "그래서 죽을 것만 같소... 당신의 사랑을 목말라하는 로제"로 끝나는 편지도 있었다. 
이따금씩 이런 시를 써넣기도 했다.
 오! 그대의 입술, 그대의 뜨거운 입술!
 그 입술을 내게 주오! 내게 주오!
지금이니까 웃으면서 그 얘기를 할 수 있지만 그 당시엔, 
맹세컨대 나는 전혀 웃지 않고 아주 심각하게 그 편지를 썼었다. 
편지를 다 쓰면 나는 그걸 로제에게 건네주었다. 
그가 하사관다운 멋진 필체로 그걸 베껴 쓰게 하기 위해서였다. 
아무것도 모르는 가련한 여인은 그 편지에 감동하여 
자기도 사랑하고 있다는 답장을 보내왔는데 그때마다 그는 
그걸 즉시 내게 가져왔고, 나는 그 내용에 의거하여 
또다시 지난번보다 더 농도 짙게 사랑을 고백하는 긴 편지를 써보냈다. 
날이 갈수록 난 은근히 연애편지 쓰는 일에 만족해 하며 
꽤나 그 놀이를 즐기고 있었다. 
하얀 라일락이 풍기는 은은한 향기처럼 
금발 여인은 한시도 내 머리에서 떠나지 않았고 
멍청히 앉아서 그녀의 모습을 눈에 그리며 나날을 보내곤 했다. 
편지 쓰는 일에 몰입하다 보면 나는 어느새 흥분해서 
그 편지는 내 자신이 그녀에게 직접 써보내는 거라는 착각을 하곤 했다. 
그러다 보니 내 개인적인 비밀스러운 사연까지도 써보냈는데 
그럴 때마다 어쩔 수 없이 야비하고 졸렬한 인간들과 함께 살아가야 하는 
내 운명을 저주하는 말로 편지를 가득 메우기도 했다. 
밤에도 낮에도 나는 그녀에 대한 그리움으로 고통스러웠다.
 "오, 쎄실리아, 내가 얼마나 당신의 사랑을 갈구하는지 아신다면!"
  이따금씩 로제가 내게 와서는 콧수염을 배배 비틀어 꼬면서 말했다.
  "괴롭군! 괴로와! 그런 식으로 계속해요!"
  그럴 때마다 나는 은근히 그를 경멸하면서 이렇게 생각하곤 했다.
  '열정과 우수로 가득찬 이 걸작을 쓴 사림이 바로 아둔해 보이는 
빨간 콧수염의 뚱보라는 사실을 어떻게 그녀는 믿을 수가 있을까?'
  그런데 어느날 펜싱 교사가 의기양양해서는 방금 받은 답장을 내게 가져왔다.
  "오늘 저녁 9시에 군청 뒤에서 만나잡니다!"
내 감동적인 편지 덕분이었는지 아니면 그의 기다란 콧수염 때문이었는지는 모르나 
드디어 그가 금발 여인을 만나 은밀하게 사랑의 행위에 취해 있을 그날 밤에 
나는 골방에 처박혀 어수선한 꿈자리를 맞이 하고 있었다. 
훤칠한 키에 멋진 콧수염을 기른 내게 귀부인들이 
군청 뒤에서 만나자고 몰려드는 꿈을 꾸었다.
다음날 로제가 희희낙락한 얼굴로 나를 찾아와 달콤한 행복감에 젖도록 해준 
지난 밤에 대해 쎄실리아에게 감사의 편지를 써달라고 했다. 
나는 파리 귀부인들에게 둘러싸였던 지난 밤 꿈에서 깨어나 
쓰디쓴 웃음을 지어야 했던 아침을 떠올렸다.
마음속에서 치밀어 오르는 까닭모를 분노를 억누르며 
'꿈결처럼 행복한 하룻밤을 보내도록 허락하신 천사여...'로 
시작하는 감사의 편지를 썼다. 
다행히도 편지를 써야 할 내 임무는 그날로 끝이 났다. 
그 이후 나는 '아름다운 금발의 쎄실리아! 고귀하고 높으신 사랑하는 이여!' 
어쩌구 하며 사랑을 갈구하는 열정과 우수로 가득찬 
편지를 써야 할 내 임무는 다시는 쓰지 않아도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