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꼬마 철학자55 - 알퐁스 도데

Joyfule 2012. 6. 29. 09:23
 
 
꼬마 철학자55  - 알퐁스 도데  
 
 붉은 장미와 검은 눈동자3.
 "난 이걸 본적이 있어 '거기'의 응접실 창가에 놓여 있던 장미꽃이야."
 형은 이렇게 말하며 장미를 내게 되돌려 주었다.
 "그애는 단 한번도 내게는 장미꽃을 주지 않았는데...."
형이 들릴 듯 말듯 서글프게 중얼거리는 말을 듣고 이윽고 내 눈에서는 눈물이 주루룩 흘러내렸다.
 "형, 자끄 형, 맹세코 오늘 저녁 이전에는...."
형이 가만히 내 말을 가로막았다.
 "미안해 할 필요없어, 다니엘. 네가 날 배신할 짓은 전혀 하지 않았다는 사실을 난 확신해... 
난 알아. 그애가 널 좋아한다는 걸 알고 있어. 
내가 한 말 생각해 봐. 언젠가 말했잖아. 
'그애가 좋아하고 있는 사람은 아무 말이 없어. 
그 사람은 아무 말 안해도 그애에게 사랑받고 있지'하는 말 말이야."
불쌍한 형은 방안을 서성대기 시작했다. 
난 손에 장미를 든 채 꼼짝 않고 형을 바라보고 있었다.
잠시 후 형이 다시 입을 열었다.
"결국은 이렇게 될 줄 알았어. 난 오래 전부터 예측하고 있었지. 
그애가 너를 보게 되면 나 같은 건 거들떠보지도 않으리라는 걸 나는 알고 있었어... 
그래서 그처럼 오랫동안 널 '거기' 데려가지 않았던 거야. 
난 널 몹시 질투했어. 용서해 줘. 그애를 너무도 좋아해서 그랬던 거야!... 
결국 어느날 나는 시험해 보기로 작정하고 널 데려갔었지. 
바로 그날 나는 모든 게 끝나리란 것을 직감했지. 
5분도 채 못 되었는데 그애는 전혀 새로운 눈길로 너를 바라보더군. 너도 아마 눈치 챘을 거다. 
아, 부인하려고 하지 마. 넌 분명히 눈치챘어. 
네가 한 달씩이나 '거기'를 찾아가지 않았다는 게 그 증거야. 
하지만 딱하게도 너의 배려가 내겐 전혀 도움이 안 됐단다... 
그애에게 나는 있으나마나 한 존재였지. 내가 갈 때마다 그애는 네 얘기만 했어. 
존경과 사랑이 가득 찬 꾸밈없는 표정으로 말이다... 
그러한 그애를 바라보는 건 끔찍한 형벌이었어. 이젠 끝났어... 차라리 잘 됐지."
자끄 형은 여전히 체념한 듯한 표정으로 그렇게 오랫동안 상냥하게 말했다. 
형의 말은 내게 고통과 기쁨을 한꺼번에 안겨 주었다. 
불쌍한 형을 생각하면 고통스러웠지만 형이 한마디 한마디 내뱉을 때마다 
검은 눈동자의 그녀가 떠올라 기뻤다. 
검은 눈동자는 내 온 존재를 환히 비춰 주고 있었던 것이다. 
형이 말을 마치자 나는 여전히 붉은 장미를 든 채 약간 부끄럽고 멋쩍은 표정으로 형에게 다가갔다.
 "형, 그래서 형은 이제 날 사랑해 주지 않을 테지."
  형이 미소를 지으며 날 힘껏 껴안았다.
  "바보 같은 소리 하지 마. 난 널 더욱더 사랑할 꺼야."
그것은 사실이었다. 
붉은 장미 사건에도 불구하고 자끄 형의 애정이나 태도는 전혀 변하지 않았다. 
형은 무척 괴로와하며 속으로만 앓을 뿐 겉으로는 전혀 내색하지 않았다. 
옛날처럼 형은 일요일마다 '거기'에 갔으며 누구에게나 환한 얼굴로 대했다. 
넥타이는 더이상 매지 않았다. 
결국 형은 여전히 침착하고 자신감 있게 열심히 일했으며, 
우리 집안을 일으켜 세운다는 단 하나의 목적에만 매달린 채 
실의에 빠지지 않고 용기 있게 살아 갔다.
자끄 형은 여전히 내게 엄마 같은 존재였던 것이다.
어떠한 꺼리낌도 갖지 않고 자유롭게 검은 눈동자의 그녀를 좋아할 수 있게 된 날로부터 
나는 열정 속에 내 몸을 송두리째 내맡겼다. 
나는 삐에로뜨 씨 집에서 거의 살다시피 했다. 
나는 그 집의 모든 사람의 마음을 사로잡으려고 갖가지 비열한 짓거리를 서슴지 않았다. 
라루트 부인에게는 각설탕을 갖다주고, 
트리부 부인을 상대해서 마지못해 카드놀이를 하는 등 나는 어떠한 희생도 불사했다.
그 집 사람들에겐 '사랑받고 싶은 욕구'로 충만된 사람으로 인식되었다. 
보통 나는 한낮에 그 집을 찾아갔다. 
그 시간이면 삐에로뜨 씨는 가게에 있었고, 삐에로뜨 양은 트리부 부인과 함께 오층 응접실에 있었다. 
내가 가면 검은 눈동자의 그녀가 바로 나타났고,
트리부 부인도 우리 두 사람만 남겨 놓은 채 나가 버렸다. 
그 부인은 내가 가기만 하면 자기가 삐에로뜨 양에게 더이상 해줄 것이 없다고 믿는 듯했다. 
그녀는 내가 가자마자 잽싸게 부엌으로 가서 요리사와 카드놀이를 했지만 
나는 그에 대해 전혀 불평하지 많았다. 
오히려 검은 눈동자의 그녀와 단둘이만 있을 수 있게 해준 데 고마움을 느꼈다.
나는 매일 담홍색으로 꾸며진 작은 응접실에서 그녀와 둘이서 멋진 시간을 보냈다. 
대부분 내가 좋아하는 시집을 가지고 가서 검은 눈동자의 그녀에게 읽어 주었다. 
그러면 검은 눈동자의 그녀는 눈물을 흘리거나 흥미에 가득 찬 표정으로 귀기울이며 듣곤 했다. 
삐에로뜨 양은 아버지의 슬리퍼에 수를 놓거나 '로젤린의 꿈'을 들려 주었다. 
하지만 그녀는 대부분 얌전히 앉아서 내가 낭송하는 시에 귀를 기울였다. 
이따금씩 감동적인 대목에선 자신이 느낀 감상을 소리높여 말하곤 했다.
 "조율사를 데려와야겠어요" 라든가 
 "실내화에다가 수를 두 코나 더 놨어요"같은 엉뚱하기 짝이 없는 말을 하는 그녀를 보면 
나는 울컥 경멸감이 치밀어서 시집을 덮어 버렸다. 
그녀의 시에 대한 무식함 때문에 더이상 읽을 마음이 내키지 않았다. 
그랬다가도 검은 눈동자를 반짝이며 나를 바라보면 
다시 기분이 풀어져서 계속 시집을 읽어 내려갔다.
그 담홍색의 작은 응접실에 늘 우리 두 사람만 남아 있었다는 것이야말로 크나큰 실수였다. 
검은 눈동자의 그녀와 나는 두 사람의 나이를 합쳐 봤자 
서른 다섯도 채 안 되는 젊은 혈기를 가진 연인이었다. 
다행히도 평범한 비에로뜨 양은 검은 눈동자의 그녀와 나 사이를 비집고 들어와 
마치 화약고를 지키는 창고지기처럼 아주 조심성 있고 신중하게 늘 경계를 게을리하지 않았다. 
어느날이었다. 검은 눈동자의 그녀와 응접실의 소파에 앉아 있었다. 
5월의 푸근한 오후였기 때문에 창문은 살짝 열려 있었고, 
방바닥까지 끌리는 길다란 커튼은 젖혀져 있었다. 
그날 나는 파우스트를 조용히 소리내어 읽고 있었다. 
다 읽고 난 나는 슬그머니 책을 내려놓았다. 
주위는 고요했고 기울어 가는 햇빛이 응접실 안으로 스며들어 왔다. 
우리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녀가 내 어깨에 머리를 기댔다. 
살짝 벌려진 조끼의 깃장식 사이로 자그마한 은메달이 보였다... 
나는 무심코 검은 눈동자의 그녀 가슴에 손을 집어넣었다. 
그러자 삐에로뜨 양이 갑자기 우리들 사이로 끼어들더니 재빨리 나를 소파 끝으로 밀쳐 냈다. 
그녀는 우리들에게 일장 훈계를 늘어놓기 시작했다.
"당신은 지금 아주 나쁜 짓을 한 거예요... 당신은 다른 사람들의 믿음을 저버렸어요... 
아빠한테 당신 계획을 말씀드리세요... 언제쯤 말할 거죠, 다니엘?"
나는 가까운 시일내로 시를 끝마치면 즉시 삐에로뜨 시에게 얘기하겠노라 약속했다. 
그 말을 듣자 우리의 감시자는 다소 누그러졌다. 뭔가 확약을 받아놓고 싶어하는 눈치였다.
그날로부터 검은 눈동자의 그녀는 내 곁에 오기를 더욱 꺼려했다. 
편지도 거의 쓰지 않았으며 그나마 내게 배달된 편지엔 온통 나를 실망시키는 말만이 써 있었다. 
불행히도 삐에로뜨 양의 질투는 점점더 심해져만 갔다.
  "...오늘 아침 나는 정말 슬프다. 내 농장에서 거미를 한 마리 본 것이다. 아침의 거미, 슬픔."
  "복숭아 뼈와 결혼하는 법은 없다...."
  그리고 언제나 똑같이 이런 후렴이 첨부되어 있었다.
  "당신 계획을 아버지께 말씀드려야 해요...."
  그러면 나 역시 변함없이 똑같은 대답을 했다.
  "내 시를 끝내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