꼬마 철학자63 - 알퐁스 도데
흔들리는 시인의 꿈4.
"굉장한 소식이야! 난 오늘 저녁 7시에 후작님과 함께 떠나게 됐어...
니스에 사는 다끄빌 양이 곧 죽게 된다나 봐.
아마 오래 머무르게 될지도 몰라... 네 생활에 대해서는 걱정하지 마...
후작님은 내 봉급을 두 배로 올려 주셨어.
한 달에 백 프랑씩 네게 보내줄 수 있을 거야...
왜 그래? 안색이 아주 창백하구나. 자! 다니엘, 어린애처럼 굴지 마.
다시 들어가서 마저 식사를 하면서 보르도산 포도주를 반 잔쯤 마시면 용기가 날 거야.
난 삐에로뜨 씨에게 달려가서 작별인사를 하고 출판업자에게
네 시집을 신문사에 보내도록 부탁하겠어... 난 시간이 없어.
지금부터 해야 할 일이 많아. 5시에 집에서 만나도록 하자."
형이 성큼성큼 쌩 브느와 가를 내려가는 뒷모습을 바라보다가 나는 다시 식당 안으로 들어갔다.
나는 먹지도 마시지도 못했다. 포도주는 그 사상가가 이미 다 마셔 버렸다.
몇 시간 후엔 어머니 같은 자끄 형이 내게서 멀어진다고 생각하니 힘이 쭉 빠져 버렸다.
내 시집과 검은 눈동자의 아가씨를 생각했지만 아무 소용 없었다.
자끄 형이 떠나고 나면 나 혼자서 모든 일을 처리하고 책임을 져야 한다고 생각하니 막막하기만 했다.
형은 약속한 시간에 나를 만나러 왔다.
형은 무척 걱정하고 있었지만 마지막 순간까지도 즐거운 표정을 잃지 않고
나에 대한 열정적인 사랑을 마지막까지 보여 주었다.
형은 오직 나와, 나의 행복과, 나의 생활만을 걱정하고 있었다.
자기 짐을 꾸린다는 핑계로 형은 내 속옷과 옷가지들을 하나하나 살펴 주었다.
"네 셔츠는 이 안쪽에 있고... 잘 봐, 다니엘... 손수건은 이쪽 넥타이 뒤에 있어."
"형이 뒤적대는 건 형 옷장이 아냐. 그건 내 옷장이라구."
짐을 다 꾸리고 나자 형은 마차를 부르러 내려갔다.
우리는 역을 향해 출발했다. 가는 도중에 자끄 형은 내게 여러가지 충고를 해주었다.
"글을 자주 쓰도록 해... 그리고 네 시집에 관한 기사는 모두 내게 보내 줘.
특히 귀스따브 쁠랑슈가 쓴 기사는...
내가 수첩을 만들어서 그 기사들을 하나도 빠짐없이 붙여 놓을 테니까.
그 수첩은 에세뜨 가문의 가보가 될 거야...
그리고 세탁부는 화요일에 온다...
성공에 너무 집착하거나 눈이 어두워지거나 하지 마...
분명히 넌 큰 성공을 거둘 거야. 하지만 파리에서의 성공이란 대단히 위험한 거야.
다행히도 까미유가 모든 유혹으로부터 너를 지켜 줄 거야...
다니엘, 특히 부탁하고 싶은 것은 까미유가 눈물을 흘리지 않도록 '거기' 자주 가 보도록 해."
마침 우리는 동물원 앞을 지나가게 되었는데 갑자기 형이 킬킬대며 웃기 시작했다.
"한 너댓 달 전에 우리가 여길 지나갔던 일 생각나니?
어때?... 그날 밤의 다니엘과 지금의 다니엘은 무척 달라졌지?... 아! 넌 넉 달만에 성공한 거야!"
착한 자끄 형은 내가 큰 성공을 거두었다고 믿고 있었다.
나 역시 바보처럼 그렇게 믿고 있었다.
우리는 역에 도착했다. 후작은 벌써 와 있었다.
흰 고슴도치 같은 머리모양에 대합실 안을 이리저리 뛰어다니고 있는
그 자그마한 괴짜 노인을 난 먼 발치에서 바라보았다.
"자, 이제 작별이다!"
자끄 형이 커다란 손으로 내 머리를 힘껏 감싸안아주더니 주인에게 뛰어갔다.
사라지는 형의 모습을 지켜보면서 나는 이상한 느낌이 들어 몸을 떨었다.
갑자기 나는 더욱 작아지고, 연약해지고, 수줍어지고, 어린애 같아지는 것 같았다.
형이 떠나가는 것과 동시에 내 사고력과 힘과 대담함과 능력이 쑥 빠져나가는 것처럼 말이다.
나는 주위 사람들이 무서워졌다. 다시 꼬마가 되어 버린 것이었다.
그날 밤 길고 긴 파리 거리와 인적이 끊긴 강변을 따라 나는 천천히 걸음을 떼며 우리 방으로 돌아왔다.
휑덩그레하게 빈 방에 혼자 있어야 된다고 생각하니 끔찍이도 슬퍼졌다.
아침이 될 때까지 그냥 밖에 있고 싶었다.
하지만 내 발걸음은 우리 방으로 향하고 있었다.
수위실 앞을 지나려는 데 수위가 내게 소리쳤다.
"에세뜨 씨, 편지가 와 있어요!"
그것은 비단처럼 부드럽고 향기가 풍기는 멋진 편지였다.
여자가 쓴 듯한 필체는 검은 눈동자의 그녀의 필체보다 더욱 세련되고 감미로와 보였다...
그 누가 보낸 것인지 짐작할 수 없었다.
나는 서둘러 봉투를 뜯어서 계단을 밝히고 있는 램프 불빛에 비쳐 가며 읽었다.
이웃 친구에게
'전원시'는 어제 이후로 제 책상에 놓여 있읍니다.
하지만 그 시집에는 헌사가 빠져 있답니다.
오늘 저녁에 오셔서 헌사를 직접 써 주시고 차라도 함께 드신다면 저로선 무한한 영광이겠어요...
당신도 아시다시피 예술가들끼리 말예요.
이르마 보렐
이층에 사는 부인
이층에 사는 부인이라는 서명을 보고 나는 온몸이 후들후들 떨리기 시작했다.
언젠가 계단에서 마주친 그녀의 모습이 떠올랐다.
입가에 흰색의 자그마한 흉터가 있는 그녀는 아름답지만 차갑고 위압적인 태도였었다.
그런 여인이 내 시집을 샀다고 생각하자 내 가슴은 자부심으로 뛰기 시작했다.
나는 편지를 손에 든 채 계단에 못박힌 듯 한참을 서 있었다.
그리고 내 방으로 그냥 올라가야 할 것이지 아니면 이층에서 걸음을 멈춰야 할 것인지를 생각했다.
그런데 갑자기 자끄 형의 충고가 떠올랐다.
'다니엘, 특히 까미유를 울리지 마.'
만일 이층에 사는 부인의 방에 가게 되다면 검은 눈동자의 그녀는 울게 될 것이고
자끄 형 또한 고통스러워 할 것이라는 예감이 스쳤다.
나는 단호한 표정으로 그 편지를 호주머니에 집어넣고 중얼거렸다.
"가지 않겠어."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