꼬마 철학자64 - 알퐁스 도데
환상의 여인 아르마 보렐
도저히 흘러갈 것 같지 않던 5분이라는 시간을 보내고서야
건방진 나는 이르마 보렐의 문을 두드렸다.
문을 열어 준 사람은 꾸꾸블랑이었다.
그 끔찍한 흑인 하녀는 나를 보자 기분이 좋은 듯
식인귀같이 능글능글 웃으면서 번쩍번쩍 빛나는 검은 손으로 들어오라고 손짓했다.
꾸꾸블랑은 나를 데리고 으리으리한 방을 두서너 개 지나더니
신비스러운 분위기를 풍기는 문 앞에 멈춰섰다.
문 안에서 목 쉰 고함소리, 흐느낌소리, 주문을 외는 소리,
발작적인 웃음소리 같은 것이 어렴풋이 흘러나왔다.
꾸꾸블랑이 문을 두드리자 즉각 대답이 들려 왔고 나는 방안으로 들어갔다.
그 방은 연보라색 비단 커튼이 드리워져 있었고 불이 휘황찬란하게 밝혀져 있는 화려한 방이었다.
이르마 보렐은 혼자서 큰 걸음걸이로 왔다갔다하면서 무엇인가를 큰 소리로 읽고 있었다.
레이스가 달린 풍성한 하늘색 실내복 때문에 마치 구름이 그녀 주위를 감싸고 있는 것처럼 보였다.
실내복 소매 한쪽을 어깨까지 걷어 붙이고 있어 순백색 팔이 드러나 있었다.
한 손엔 종이칼을 들고 단검인 양 휘두르고 있었고 다른 쪽 손에는 책이 들려 있었다.
나는 꼼짝 않고 서 있었다.
그 이웃집 부인만큼 아름다운 여자는 한번도 본 적이 없었다.
처음 보았을 때보다는 덜 창백했고 베일에 감춰진 듯
신선한 장미빛을 띠고 있는 얼굴은 마치 예쁜 편도나무 꽃송이 같아 보였다.
그 때문인지 입가의 하얀 상처도 더욱 희게 보였다.
그리고 원래 자신감에 넘쳐 날카로운 인상을 풍기던 얼굴도
흘러내린 아름답게 빛나는 머리칼 때문에 부드럽게 보였다.
분을 바른 듯한 잿빛 금발의 부드러운 머리결 때문에 그녀의 모습에선 마치
머리 주위에 황금빛 안개가 피어오르는 것 같은 환상적인 분위기가 풍겼다.
그녀는 나를 보자 낭독을 멈추고 들고 있던 책과 종이칼을 뒤에 놓인 의자에 내던졌다.
그러고는 한껏 교태를 떨어가며 무례하리만치 당당하게 손을 내밀었다.
"안녕하세요, 친구!"
그녀는 부드러운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당신은 나를 깜짝 놀라게 하는군요!
난 지금 끌리뗌네스트르의 역을 연습하고 있던 중이예요. 아주 감동적이지 않아요?"
그녀는 나를 소파에 앉히더니 자기도 내 옆에 앉았다.
"연극에 심취하셨나 봐요, 부인?"
나는 감히 친구라고 부를 수는 없었다.
"아, 당신은 환상이 뭔지 아시는 것 같군요.
난 조각과 음악에도 열중한 적이 있었죠. 하지만 이번엔 완전히 사로잡힌 것 같아요...
생각만 해도 가슴이 두근거리는 떼아뜨르 프랑세 극장에서 화려하게 데뷔할 거예요."
그 순간 거대한 노란색 오디새 한 마리가 후드득 날개짓소리를 내며
머리 위를 아슬아슬하게 스쳐 지나갔다.
"아, 무서워 말아요."
그녀가 내가 질겁을 한 꼴을 보고 웃으면서 말했다.
"내 앵무새랍니다. 마르케이자스 군도에서 데려온 용감한 새에요."
그녀는 새를 안고 쓰다듬으면서 서반아어로 몇 마디 하더니
한구석에 놓인 황금색 횃대 위에 올려놓았다.
나는 내심 감탄하며 눈을 동그랗게 떴다.
'흑인 하녀, 떼아뜨르 프랑세 극장, 마르케이자스 군도... 참 특이한 여자야!'
그녀는 다시 내 옆자리에 와 앉더니 조잘거리기 시작했다.
처음에는 내 '전원시'를 화제에 올렸다.
그녀는 그 시집을 어젯밤부터 쉬지 않고 계속 읽어서
거기 나오는 시구들을 거의 외다시피 했으며 열정적으로 그 시구들을 낭독했다.
내 허영심을 만족시킬 정도의 그렇게 완벽한 향연은 처음이었다.
그녀는 내 나이가 몇 살인지, 어느 지방 사람인지, 어떻게 살고 있는지,
사교계에 드나들고 있는지, 사랑을 해 본적이 있는지... 등등 나에 대해 많은 것을 알고 싶어했다.
그래서 한 시간 남짓 지났을 때 이르마 보렐은 자끄 형, 에세뜨 가문의 내력,
우리 집에 몰아닥친 불행 그리고 우리가 집안을 다시 일으켜 세우려고
무척 애쓰고 있다는 사실까지도 자세히 알게 되었다.
그러나 난 삐에로뜨 양에 대해서는 한마디도 하지 않고,
다만 나를 향한 일편단심으로 열병을 앓으며 죽어가고 있는 상류사회의 한 젊은 아가씨가 있는데
그녀의 아버지가 그녀의 열렬한 사랑을 방해하고 있다고만 얘기해 두었다.
이런저런 이야기가 한참 무르익었을 때 누군가가 방안으로 들어왔다.
그녀에게 조각을 가르치던 백발을 치렁치렁하게 늘어뜨린 늙은 조각가였다.
그는 심술궂은 눈초리로 나를 쳐다보면서 속삭이듯 그녀에게 말했다.
"당신이 말한 그 나포리 산호채집꾼인가 보지?"
"맞았어요."
그녀는 웃으면서 말했다.
그러고는 그렇게 불려진 데 대해 당황하고 있는 나를 쳐다보면서 말을 이었다.
"우리가 만났던 그날 아침, 생각 안 나요?
그날 아침엔 셔츠도 풀어 헤치고, 머리는 산발을 해가지고선 손에는 항아리를 들고...
난 나폴리 해변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산호채집꾼을 보고 있는 느낌이었어요...
그래서 그날 저녁에 내 친구들에게 그 얘기를 했었죠.
하지만 우린 그 어린 산호채집꾼이 위대한 시인이란 사실을 믿어 의심치 않았지요.
그리고 그 물항아리 안엔 분명히 당시의 그 '전원시'가 들어 있을거라고 생각했던 거예요."
그 말을 듣고 나는 내가 그들에겐 존경과 감탄의 대상이 되고 있다는 느낌이 들어 무척 기뻤다.
나는 고개를 숙여 정중하게 인사를 하고 겸손한 몸가짐을 가지려고 애썼다.
꾸꾸블랑이 또 한 명의 손님을 안내해 왔다.
그는 다름아닌 바가바였다.
바가바는 들어오면서 곧장 그녀에게로 다가가 초록색 표지의 책 한 권을 내밀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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