꼬마 철학자68 - 알퐁스 도데
회한으로 얼룩진 편지 2.
그 여자와 함께 포즈를 취하기도 하고 어깨에다 번질거리는 장식을 달고는
앵무새 옆에 하루 종일 서 있기도 하고 말이야.
우린 거의 그런 식으로 시간을 보냈어.
터키 사람으로 변신한 내가 긴 의자 한쪽 끝에 앉아
긴 파이프 담배를 피우면 그 여잔 꽈리를 입 안에다 집어넣고 대사를 외우는 거야.
그러다가 때때로 이렇게 말을 하곤 했지.
"다니당, 당신 얼굴은 정말 특징적이에요!"
내가 터키인 분장을 하면 그 여잔 날 다니당이라고 부르고 이태리인 분장을 하면 다니엘로라고 불렀지.
결코 다니엘이라고 부른 적은 없었어... 게다가 비참하게도 얼마 있으면
나를 모델로 한 두 개의 작품이 전시될 것 같아. 아마, 팜프렛엔 이렇게 쓰여지겠지.
'젊은 플루트 연주자. 이르마 보렐 부인에게 바침'
'젊은 농부, 이르마 보렐 부인에게 바침'... 아, 얼마나 창피한 노릇인지!
자끄 형, 잠시 창문을 열고 밤공기를 좀 마셔야겠어. 숨이 막혀...
편지를 쓰는 이 순간에도 답답해 미칠 지경이야.
벌써 밤 11시가 넘었어.
밤공기를 쐬니까 좀 나아. 창문은 그대로 열어 두고 계속 편지를 쓰고 있어.
밖은 어둡고 비가 내리고 있어. 종소리가 들려 와. 이 방은 너무도 쓸쓸해!...
정든 작은 방! 난 옛날엔 이 방을 무척 좋아했었지. 하지만 지금은 싫증이 나,
그 여자가 이 방에서 풍겨나던 품위 있는 분위기에 똥물을 끼얹은 셈이지.
그 여잔 내 방에 너무 자주 와서 나를 자기 맘대로 하는 거야...
아, 이제 이 방은 더 이상 공부방이 아니야....
그 여잔 내가 방에서 뭘 하든 내가 있든 없든 간에 상관않고 아무때나 들어와서는
이곳저곳을 마구 들쑤셔 놓는 거야. 언젠가 저녁에는 그 여자가 내 상자를 뒤지고 있는 걸 보았지.
난 그 상자 안에 내가 세상에서 제일 아끼는 것들,
어머니의 편지, 그리고 형의 편지와 까미유의 편지를 넣어 두었었단 말이야.
편지는 형도 알고 있는 황금색 상자 안에 들어 있었어,
어느날 내가 방에 들어서는 순간 이르마 보렐은 그 강자를 들고 막 뚜껑을 열려는 참이었어.
잽싸게 몸을 날려서 간신히 낚아챘지.
"여기서 뭘 하고 있는 거예요?"
나는 분개해서 고함을 쳤어.
그 여잔 아주 비참한 표정을 지어 보이더군.
"당신 어머니의 편지를 존중해요.
하지만 이 편지는 이제 내 거예요. 그걸 보고 싶어요... 그 상자를 돌려 줘요."
"대체 뭘 원하는 겁니까?"
"편지를 읽어 보고 싶어요...."
"그건 안 됩니다. 난 당신에 대해선 아무것도 모르는데 당신은 나에 대해선 모든 걸 다 알고 있어요.
그런데다 허락도 없이 들어와선 이런짓을 하다니...."
"오, 다니당! 그렇다고 날 비난할 수 있어요? 당신도 원할 땐 내 방에 들어오잖아요?
또 내 방에 오는 모든 사람들에 대해서도 잘 알고 있구요."
그렇게 온갖 아양을 떨어가며 내 손에서 상자를 빼 가려고 했지.
"그렇담 좋아요. 상자를 열게 해주죠. 단 조건이 있어요."
"어떤 조건이죠?"
"매일 아침 8시에서 10시 사이에 어디에 가는 건지 말해 봐요."
그러니까 그녀는 하얗게 질리더니 내 눈을 뚫어져라 쳐다보더군...
나는 단 한번도 그녀에게 그걸 물어 본 적이 없었거든.
그걸 물어 보고 싶은 생각이 없었던 것은 아니었어. 다만 매일 아침 그녀가 외출하는 것,
그 입가의 상처, 파셰코란 사람, 안개에 휩싸인 듯한 그녀의 생애,
이 모든 것이 불가사의한 것이라서 그 모든 것을 다 알게 되면
그녀에 대한 환상이 깨질까 봐 두려웠던 것뿐이야.
그런데 그날은 결단을 내려 감히 그걸 물어 보게 된 거지. 무척 당황한 그 여잔
잠시 망설이다가 들릴 듯 말듯 기어들어가는 목소리로 말했어.
"내게 그 상자를 주세요. 그럼 모든 걸 말하겠어요."
그래서 난 상자를 주었지. 그 여잔 무척 기뻐하며 상자를 열더군.
상자 안엔 편지가 스무 통 남짓 들어 있었지.
그 여잔 천천히 낮은 목소리로 한 줄도 빠짐없이 편지를 읽기 시작했어.
신선하고 정숙한 사랑이 담긴 편지가 몹시도 재미있었는가 봐.
나는 내 사랑에 대해선 벌써 얘기했지만 실은 사실과는 동떨어진 내멋대로 꾸민 얘기였지.
까미유가 상당한 귀족 출신이며, 그녀의 부모님들이 다니엘 에세뜨라는
보잘것없는 평민과의 결혼을 승낙하지 않는다고 얘기했었거든.
형은 내가 허영심의 노예란 점, 그 치사한 내 일면을 잘 알 거야.
편지를 읽다간 때때로 이렇게 말하기도 하더군.
"어머, 이건 참 좋은 일인데!"
"어머, 귀족 처녀치고는...."
그 여잔 편지 하나하나마다 다 읽고 나면 제멋대로 촛불에다 태우면서
편지가 타들어가는 모습을 쳐다보더군. 정말 잔인한 여자야. 하지만 난 그냥 내버려 두었어.
매일 아침 8시에서 10시 사이에 그녀가 대체 어디를 가는 것인지를 꼭 알고 싶었던 거야....
그런데 그 편지들 가운데엔 라루트 상회의 상호가 인쇄된 종이에다 쓴 편지도 하나 있었어.
종이 위쪽에 세 개의 작은 초록색 접시 그림, 그 밑에
'도자기 크리스탈 제품, 라루트의 후계자 삐에로뜨'란 글귀가 인쇄되어 있는 종이 말이야.
아마도 까미유는 어느날 아침 일찍 아버지의 눈을 피해 가게에 내려와 내게 편지를 쓰게 된 모양이고
급하게 서두르다 보니 손에 잡힌 이 종이가 그녀 눈엔 무척 괜찮아 보였던 거겠지...
그런데 그 여자에겐 이것이 얼마나 굉장한 발견이었겠어!
그 여잔 그때까지만 해도 귀족 처녀나 영주인 그녀의 부모님 등
내가 꾸며낸 얘기를 정말이라고 믿고 있었던 거야.
하지만 이 편지를 보고는 모든 걸 다 알아차렸지. 마구 웃어 대면서 이렇게 지껄이는 거야.
"그랬군요. 고귀한 진주 같다던 그 귀족 처녀,
교외의 대저택에서 산다던 그 처녀의 이름은 삐에로뜨이고,
그녀는 쏘몽 가에서 도자기를 판다 말이죠...
아! 이제야 왜 당신이 이 상자를 주지 않으려고 했는지 알겠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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