꼬마 철학자66 - 알퐁스 도데
환상의 여인 아르마 보렐 3.
저녁에 나는 삐에로뜨 씨의 집에 들렸다.
그러나 기분이 좋아지지는 않았다.
삐에로뜨 씨는 지나치게 웃어 댔고 삐에로뜨 양도 오늘따라 거무잡잡해 보였다.
"나를 사랑해 줘요!"
검은 눈동자가 그렇게 부드럽게 속삭여 봤자 허사였다.
나는 배은망덕하게 별처럼 아름다운 속삭임도, 그 어떤 것도 듣고 싶지 않았다.
저녁식사 후에 라루트 부부가 외출에서 돌아와 나를 반겼을 때도
나는 한쪽 구석에 앉아 슬프고 침울한 표정을 짓고 있었으며
소곡을 연주할 때도 이르마 보렐이 순백색 팔로 부채를 흔들면서 귀빈석에 앉아 있는 모습,
조명을 받아 눈부시게 반짝일 황금빛 머리칼 등 생각만 해도 황홀한
그녀의 모습이 눈앞에 어른거려 참을 수가 없었다.
그녀에 대한 생각으로 머리속이 가득 찼다.
'그녀가 만약 여기 이렇게 초라하게 앉아 내 모습을 본다면... 상상만 해도 수치스러운 일이야!'
별다른 일 없이 며칠이 지났다.
이르마 보렐은 어떻게 지내고 있는지 기척도 없었다.
이층과 오층 사이엔 도저히 건널 수 없는 바다가 놓여 있는 것 같았다.
밤마다 나는 책상 앞에 앉아, 그녀의 마차가 돌아오는 소리를 들었다.
귀를 기울이지 않아도 마차가 굴러오는 무거운 소리, 꾸꾸블랑을 부르는 종소리가 들려 왔다.
나는 무심코 앉아 있다간 그 종소리에 소스라치게 놀라곤 했다.
꾸꾸블랑이 현관문을 열어 주고 자기 방으로 올라가는 소리까지 나는 고스란히 들을 수밖에 없었다.
내게 용기가 있었더라면 그녀의 소식을 물어 보러 갈 수도 있었을 텐데...
그러나 아무리 그래도 나의 주인은 여전히 검은 눈동자였다.
나는 많은 시간을 검은 눈동자와 함께 보냈고 나머지 시간엔 방에 처박혀 시를 쓰며 지냈다.
이따금 이 지붕 저 지붕에서 원을 그리며 날아드는 참새들 때문에 깜짝깜짝 놀라곤 했다.
이 도시의 참새는 기품 있는 부인과도 같아서
학생들의 다락방 위로 날아와서는 그들을 유혹하는 것이었다.
그러나 까르멜 수녀회 수녀들처럼 수도원 한구석에 다소곳이 서서
한마디 불평도 없이 종을 울려 대는 충실한 쌩 제르멩 종탑의 종들은
절친한 친구인 내가 변함없이 책상에 앉아 있기를 바라며 열심히 종을 울려 댔다.
나의 용기를 북돋우려는 듯 더욱 아름다운 소리를 자아내고 있었다.
그렇게 방황하고 있을 때 자끄 형의 편지를 받았다.
그는 니스에 자리를 잡았다며 자세한 소식을 알려 왔다.
다니엘, 참으로 아름다운 곳이야.
네가 내 창문 아래쪽으로 펼쳐져 있는 바다를 본다면 저절로 시상이 떠오를 텐데!
난 그런 걸 거의 즐기지 못하고 있어. 외출을 전혀 않고 있거든...
후작은 매일매일 받아쓰기를 시키지. 아, 너무 지루해.
받아쓰면서도 때때로 고개를 들어 수평선 위를 떠가는 붉은 돛단배들을 쳐다보곤 하지만
곧 종이 위로 돌아와야 해... 다끄빌 양은 여전히 아프단다...
이층에선 끊임없이 기침하는 소리만 들려 오거든...
나 역시 배에서 내리자마자 심한 감기에 걸려서 고생하고 있어.
그리고 좀 다른 얘길 하다가 형은 이층 부인에 대한 얘기를 했다.
내 충고를 기분 나빠하지 않는다면, 이젠 그 여자 집엔 가지 말았으면 한다.
그 여잔 너무 복잡미묘한 여자야.
그리고 이런 말을 네게 해도 될지 모르지만 내가 보기엔 그 여잔 약간 끼가 있는 것 같더구나...
그런데 말이다. 어제 나는 항구에서 네덜란드 돛단배 한 척을 보았어.
세계 일주여행을 마치고 방금 돌아온 배였는데 돛대의 천은 일본산이고,
받침대는 칠레산 재목이고, 또 마치 지도처럼 얼룩덜룩한 장비들이며 아주 현란한 배였어...
잘 들어 봐, 나는 너의 그 이르마 보렐이 이 배를 닮았다고 생각했단다.
그 험난한 여행마저 치러 낸 배야 좋다고 할 수 있겠지만 여자는 달라.
일반적으로 그렇게 많은 나라를 본 여자들은 다른 사람들에겐 많은 고통을 주는 법이야...
조심해, 다니엘. 조심해야 해. 무엇보다도 부탁하고 싶은 것은 까미유를 결코 울리지 말라는 것....
그 마지막 말이 내 가슴에 찡하게 와 닿았다.
자신을 사랑하기를 거부했던 여자의 행복에 신경을 쓰는
자끄 형의 인간다움에 난 정말 감격하고 말았다.
'자끄 형 걱정 말아. 그녀를 물리진 않겠어.'
나는 그렇게 다짐하며 이젠 더이상 이층 부인에게 가지 않겠다고 굳게 맹세했다.
그날 저녁 마차가 현관에 도착했을 때도 난 거의 신경을 쓰지 않았다.
꾸꾸블랑의 소래소리가 전처럼 기분을 돋구어 주지도 않았다.
비바람이 몰아치는 음산한 9월의 밤이었다...
나는 방문을 반쯤 열어 놓고 공부하고 있었다.
갑자기 내 방으로 이어진 나무계단이 삐걱거리는 소리를 내는 것 같았다.
가벼운 발자국소리와 옷자락이 스치는 소리가 들렸다.
누군가가 올라오고 있었다. 누구일까?
꾸꾸블랑은 자기 방으로 돌아간 지도 오래 됐는데...
어쩌면 이르마 보렐이 꾸꾸블랑에게 할 말이 있어 오는 건지도 모르지....
이르마 보렐이라고 생각하자 내 가슴은 마구 뛰기 시작했다.
그러나 나는 책상 앞에 그대로 앉아 꼼짝도 하지 않았다.
발자국소리는 점점 가까와 오고 있었다.
갑자기 소리가 멈췄고 침묵이 흘렀다.
그리고 가볍게 꾸꾸블랑의 방문을 두드리는 소리가 들려 왔다. 대답소리는 들리지 않았다.
"그 여자야."
나는 온 신경을 거기에 집중시키고 중얼거렸다.
그러자 환한 불빛이 내 방으로 퍼져들었다.
문이 활짝 열리면서 누군가가 들어섰다.
나는 고개도 돌리지 않은 채 떨리는 목소리로 물었다.
"누구십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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