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꼬마 철학자67 - 알퐁스 도데

Joyfule 2012. 7. 13. 11:19
 
 
꼬마 철학자67  - 알퐁스 도데  
 
   회한으로 얼룩진 편지
   자끄 형이 떠난 지 두 달이 흘렀지만 아직 그는 돌아올 수 없었다. 
   안타깝게도 다끄빌 양은 죽었고 후작은 상중임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자끄 형을 데리고 이태리 구석구석을 누비고 다녔다. 
   그리고 자신의 회고록을 구술하는 지긋지긋한 일을 단 하루도 쉬지 않았다. 
그 일에 무척이나 혹사당하고 있었기 때문에 자끄 형은 내게 편지를 쓸 짬이 거의 없었고 
그나마 배달된 편지에도 짤막하게 몇 줄만 쓰여 있을 뿐이었다. 
겉봉투엔 로마, 나폴리, 피사, 팔로마 등지의 소인이 찍힌 
다양한 우표가 붙어 있었지만 편지 내용은 한결같이 똑같았다.
 "공부 열심히 하니?... 까미유는 잘 지내는지 궁금하구나!... 
귀스따브 쁠랑쉬의 기사가 신문에 소개됐는지, 이르마 보렐의 집에는 다시 안갔겠지...."
언제나 똑같은 이런 질문들에 대해 나는 변함없이 공부 열심히 하고 있으며 
책도 잘 팔리고 있고 또 그녀도 잘 지내고 있다. 
그리고 이르마 보렐은 그후로 다시는 만나지 않았고 
귀스따브 쁠랑쉬 건은 잘 되어 가고 있지 않다고 답장을 썼다.
그러나 답장 내용처럼 그렇게 별 변화 없이 흘러간 나날은 결코 아니었다. 
폭풍우가 몰아치는 날 밤, 나는 장문의 편지를 자끄 형에게 썼다. 
털어놓지 않으면 터져 버릴 것 같은 내 심경을 토로하기 위해서....
  자끄 형에게
자끄 형! 난 거짓말을 했어. 지난 두 달 동안 난 거짓말만 늘어놓았던 거야. 
난 열심히 공부하고 있다고 편지를 썼지만 내 잉크병은 말라 붙어 버렸어. 
책이 잘 팔리고 있다고 했지만 사실은 지난 두달 간 단 한 권의 책도 팔리지 않았고, 
이르마 보렐은 결코 만나지 않고 있다고 했지만 그녀를 잊을 수가 없었어. 
자끄 형! 왜 난 형 말을 듣지 못하는 걸까? 왜 그 여자의 집에 다시 가게만 되는 걸까?
형 말대로 그 여자에게 끼가 있다는 것을 이미 알고 있었지만 난 그 여자가 지적이라고 생각했어. 
하지만 그렇지 않더군. 그 여잔 자기 마음 속에서 우러나오는 자신의 언어로 말하는 것이 아니라 
전부다 남에게서 주워들어 건성으로 지껄이는 것뿐이었어. 
그 여잔 영리하지도 않고, 아주 박정한 인간이야. 교활하고 파렴치한 데다가 얼마나 악독한지... 
그 여잔 화가 치밀어오르면 그 분풀이를 꾸꾸블랑에게 하는 거야. 
꾸꾸블랑을 채찍으로 사정없이 때리고, 방바닥에다 넘어뜨려서는 발로 짓밟는 거야, 
글쎄. 너무 끔찍하지 않아? 
정말 하나님도 악마도 믿지 않고, 단지 커피 찌꺼기 같은 걸로 점이나 치는 
몽유병자의 예언만을 무조건 믿는 지독한 인간으로 보여. 
그 여자가 비극 여배우가 될 만한 재능이 있다고? 
천만에. 아무리 꼽추선생의 강의를 들어 봤자 향상되는 모습은 전혀 찾아볼 수 없고, 
입안에 꽈리를 물고는 하루종일 방안에만 처박혀 있는 꼴을 보면 
어떤 극장도 선뜻 그녀를 써 준다고 나설 것 같지가 않아. 
그 여잔 스스로가 아주 유능하다고 자신감에 차 있는 모양인데 
그런 꼴을 보면 그야말로 완전히 희극 배우인 셈이지.
어쩌다 그토록 선한 것과 순수한 것만을 좋아하던 내가, 
그 여자의 손아귀에 쥐여 버렸는지 알다가도 모르겠어.
자끄 형, 하지만 결단코 맹세하는데, 이젠 그 여자에게서 빠져나왔고 
이젠 정말 모든 걸 정리했어. 완전히 끝냈다구... 내가 그동안 얼마나 비겁했었는지, 
그리고 그 여자가 날 어떻게 다뤘는지 형이 알게 된다면!... 
난 그 여자에게 내 모든 걸 다 이야기했어. 형 얘기, 우리 어머니 얘기, 
그리고 까미유에 대한 얘기를, 모조리 다 말이야. 아, 정말 부끄럽고 후회스러워 죽을 지경이야....
나는 그 여자에게 내 옴 마음을 다 바쳤고 속마음을 송두리째 털어놨었지. 
하지만 그 여잔 결코 자기 속마음을 내보이려 하지 않더군. 
나는 그녀가 도대체 어떤 사람인지. 어디 출신인지 아직도 몰라. 
언젠가 그 여자한테 결혼했었냐고 물었더니 마구 웃어 대는 거야. 
자기 입가의 상처도 자기 나라인 쿠바에서 칼에 찔려 입은 거라나? 
누가 그런 짓을 했느냐고 물었더니 짤막하게 대답하더군.
  "파셰코라는 스페인 사람."
그리곤 더이상 한마디도 않는 거야. 세상에 이런 경우가 어디 있어? 정말 바보 같은 짓이잖아? 
내가 그 파셰콘지 뭔지 알게 뭐야? 무슨 설명이든 간에 해줘야 할 게 아냐... 
그리고 칼에 찔린다는 게 보통 일이야? 도대체 어떻게 했길래 칼로 찔렸겠느냔 말이야. 참, 기가 막혀.
그런데... 그 여자 주변에 몰려드는 그 어줍잖은 예술가란 작가들이 
그 여자에게 이방인이란 별명을 붙여 주어서 그때부터 그 여잘 그렇게 불렀지. 
아, 그 예술가란 사람들, 내가 그치들을 얼마나 증오하는지. 
그치들이 어떤 작가들인지 말한다면 말이야, 
그치들은 동상이나 그림 따위하고나 살아온 덕택에 이 세상엔 그런 것들밖엔 없는 줄 알아. 
언제나 형이 어쩌구 선이 어쩌구, 색상이 어쩌구, 그리스 예술이 어쩌구, 
판테온 신전, 평면과 돌출부 따위가 어쩌구 저쩌구 하며 주절주절 늘어놓는 거야. 
그치들은 항상 얼굴을 뚫어져라 쳐다보면서 이리저리 뜯어보고는 
형이니 곡선이니 특징 따위만 찾아 내려고 하는 거야. 하지만 중요한 건 우리의 내면세계잖아? 
우리의 가슴속에 뒤고 있는 열정, 눈물, 번뇌 같은 것들 말이야. 
그치들은 죽어 있는 것들만을 찾아 내려 하고 그 한도 내에서만 세상을 본단 말이야. 
정말 한심한 작자들이야. 그치들이 내 얼굴을 보면서 어떤 특징을 찾아 냈는진 모르지만 
난 그치들로부터 어떤 시상도 전혀 얻지 못했어.
그 여자가 나를 처음 만났을 때 그 여잔 자기가 어떤 비범한 사람, 
말하자면 아직은 묻혀 있지만 위대한 시인을 찾아 냈다고 생각했었나 봐. 
내가 다락방 같은 데에나 있을 인물이 아니라며 얼마나 추켜 대던지... 
하지만 날이 갈수록 나를 시들하게 여기더니 이젠 내 얼굴 특징을 갖고 물고 늘어지는 거야. 
그러니까 말하자면 그 여자 집에 드나드는 작자들에게 포즈를 취해 주는 건데 
그치들은 벼라별 포즈를 다 요구하더군. 
어떤 땐 내가 이태리 사람 같다고 하면서 플루트를 부는 포즈를 취해 달라고 하거나 
또는 제비꽃을 파는 알제리 상인의 포즈를 취해 달라고 했었지. 
그리고 또... 내가 뭔지 어떻게 알겠어? 그냥 시키는 대로만 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