꼬마 철학자70 - 알퐁스 도데
회한으로 얼룩진 편지 4.
내가 뭐라고 변명해 봤자 소용이 없었어.
언제나처럼 그녀가 원하는대로 되기 마련이었어. 난 항상 왜 그럴까....
그렇게 해서 드디어 연극이 개막되었지...
내게 웃을 여력이 남아 있다면 그날 이야기로 형을 즐겁게 해줄 수 있을 텐데....
사람들은 짐나즈 극장 지배인과 떼아뜨르 프랑세 극장의 지배인을 중요 인물로 생각하고 있었는데
그들은 다른 데 볼일이 있었던 모양이야.
우리는 극이 끝날 무렵에야 모습을 드러낸 근교의 극장 지배인 하나로 만족해야 했어.
하지만 이 가족극은 그렇게 크게 실패한 것은 아니었어...
이르마 보렐은 대단한 박수갈채를 받았지...
난 이 쿠바 여인이 맡은 아딸리가 지나치게 격찬되었다고 생각했어.
그녀는 표현력이 부족했고, 불어를 마치... 스페인산 꾀꼬리같이 말한다고나 할까.
그런데 그 여자의 친구들인 그 예술가란 작자들은 자세히 살펴보지 않았나 봐.
의상 고증이 정화했다는 등, 여사의 발음은 아주 세심했다는 등... 떠벌려 댔지.
나 역시, 내 독특한 얼굴 때문에 큰 성공을 거두었어.
벙어리 유모 역을 맡은 꾸꾸블랑보다는 못했지만 말이야.
확실히 꾸꾸블랑의 얼굴은 내 얼굴보다 훨씬 독특해.
그리고 그녀가 5막에서 사납게 툭 불거진 허연 눈을 놀란 듯이 굴리는
괴상망칙한 앵무새를 손에 얹고 나타나자 장내는 박수갈채와 환호로 들끓었어.
아마 그 비극 여배우는 다니당, 꾸꾸블랑, 앵무새가
모두 연극에 등장하기를 내심 무척이나 바란 것 같아.
눈부시게 빛나는 아딸리는 말했었지....
"굉장한 성공이야!"
아, 자끄 형! 그 여자의 마차가 돌아오는 소리가 들렸어. 불행한 여자!
이렇게 늦은 시각에 어디서 오는 걸까?
아마 그 여잔 소름끼치는 아침의 일을 잊어버렸나 봐.
나는 아직도 그 생각만 하면 온몸이 떨리는데!
문이 닫혔어... 지금 그 여자가 여기로 올라오지 않으면 좋으련만!
그렇게도 가증스런 여자를 이웃으로 삼고 있다는 건 끔찍한 일이야!
조금 전에 말한 연극 공연은 사흘 전의 일이었지.
그때부터 사흘 동안 그 여자는 명랑하고, 다정하고, 온순하고, 사랑스러웠어.
꾸꾸블랑을 한 번도 때리지 않았고 말이야.
그리고 내게 형 안부를 여러 번 묻기도 했지.
지금도 여전히 기침을 하는지 걱정된다고 하면서 말이야.
하지만 그 여잔 형을 좋아하진 않아.
다만 건성으로 물어 보는 거고 진심이라곤 하나도 없어...
그때 뭔가를 알아차렸어야 하는 건데.
오늘 아침 9시 종이 울렸을 때 그 여자가 내 방으로 들어왔어. 9시에 말이야!...
그 시간은 그녀가 외출하는 시간인데... 그녀는 내게로 다가와서 웃으면서 말했어.
"9시에요!"
그리곤 갑자기 엄숙한 표정이 되어 말하더군.
"이것 보세요, 내가 승리했어요. 우리가 처음 만났을 때 나는 자유의 몸이 아니었어요.
한 남자에게 속박되어 있는 몸이었죠,
그리고 그 남자 덕분에 부와 풍요를 누릴 수 있었죠. 그런데 당신이 내 인생에 끼어들었어요."
자끄 형, 그 불가사의 속에는 뭔가 야비함이 숨겨져 있다고 내가 여러 번 말했었지.
"당신을 알게 된 날부터 난 그 관계에 역겨움을 느꼈죠...
내가 그 얘기를 당신에게 하지 않았던 것은, 당신은 나를 다른 남자와 공유하고 있다는 것을
용납하기에는 너무 자존심이 강한 사람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었죠.
그리고 그 관계를 청산하지 못했던 것은 , 나한테 그렇게도 잘 어울리는 화려하고 게으른 생활,
내 모든 허영심을 만족시켜주는 그 일을 포기할 용기가 없었기 때문이었어요...
이제 더이상 그런식으론 살아갈 수 없어요. 그 허황된 생활이 나를 짓누르고,
내가 스스로를 배반하고 있다는 느낌 때문에 매일매일 미칠 것만 같아요...
방금 내가 한 고백을 듣고 나서도 여전히 나를 원하신다면
난 모든 걸 포기하고 당신이 원하는 곳에서 살 준비가 되어 있어요...."
'내가 원하는 곳'이라는 마지막 말을 그 여자는 아주 낮은 목소리로 말했어.
바로 내 옆에서, 거의 내 입술에 대고, 나를 마취시키려는 듯이 말이야....
하지만 다행히도 내겐 그 여자에게 대답할 수 있는,
그것도 아주 냉정하게 대답할 수 있는 용기가 남아 있었다.
나는 가난하고, 생활비도 벌지 못하는 데다가
자끄 형의 도움을 빌어서까지 그 여잘 먹여 살릴 수는 없다고 말이야.
그 대답을 듣자 그 여잔 당당하게 고개를 쳐들었지.
"그래서 말인데요. 만일 당신과 나 둘이 서로 헤어지지 않고서도
먹고 살아갈 확실하고 정당한 방법을 찾아 냈다면 어떡하겠어요?"
그러면서 그 여잔 호주머니에서 필적이 난해한 편지 한 장을 꺼내선 읽기 시작했지...
그건 우리 두 사람을 근교의 극장에서 채용하겠다는 계약서였어.
그 여자에겐 월 백 프랑을, 그리고 내겐 50프랑을 주겠다는 거였어.
그리고 우리가 서명만 하면 일이 말끔하게 해결되는 거였지.
나는 공포에 사로잡혀 그녀를 쳐다보았어.
나는 그녀가 나를 암흑의 구렁텅이로 끌고 가고 있다고 느꼈어.
그리고 순간적이나마 내겐 저항 할 힘이 남아 있지 않다고 생각했지.
대답할 시간적 여유도 주지 않고 그 알아 보기 힘든 편지를 다 읽고 나더니
그 여잔 열에 들뜬 듯이 연극이라는 직업의 화려함과 우리들이 앞으로 누리게 될
영광스러운 인생에 대해 떠들어 대기 시작하는 거야.
자유롭고, 자신에 찬, 그리고 모든 세속적인 것과 결별을 고하고
오직 우리의 예술과 우리의 사랑만을 위해 살아가게 될 그런 인생을 말이야.
그 여잔 너무 오래 말을 많이 했지. 그게 실수였어.
그동안 나는 정신을 좀 차리고 내 마음속 깊은 곳에 자리잡고 있는 항상 어머니와도 같았던
자끄 형을 생각할 시간적 여유를 가질 수 있었던 거야.
그 여자의 장광설이 끝났을 때 난 아주 냉정하게 딱 잘라 말했어.
"나는 배우가 되고 싶지 않아요...."
물론 그 여잔 잡았던 고삐를 늦추지 않았어.
그 여잔 더욱 열렬하게 그 달콤한 장광설을 늘어놓기 시작했지.
하마터면 넘어갈 뻔했어...
그 여자가 내게 하는 모든 말에 대해서 내 대답은 오직 한 가지뿐이었어.
"나는 배우가 되고 싶지 않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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