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꼬마 철학자77 - 알퐁스 도데

Joyfule 2012. 7. 26. 01:40
 
 
꼬마 철학자77  - 알퐁스 도데  
 
   납치극 3.
  여기저기 살펴보던 형은 책상 서랍에서 열에 들떠 마구 휘갈겨 쓴 듯한 글씨체로 
  빼곡히 채워진 종이 몇 장을 발견했다. 
  영감을 받았을 때 정신없이 휘갈겨 쓴 내 글씨체였다.
  "아마 시일 거야."
  형은 그걸 읽어 보려고 창가로 갔다. 
  사실 그것은 한 편의 서글픈 시였다.
  "자끄 형, 난 형에게 거짓말을 했어. 지난 두 달 동안 난 거짓말만 해왔어...."
이 편지는 부쳐지지 않고 내버려져 있었으나 결국 운명의 여신은 
우체부 역할을 맡아 그것을 수신인에게 보내준 셈이었다.
자끄 형은 단숨에 이 편지를 읽어 내려갔다. 
이르마 보렐이 아무리 강력히 주장해도 내가 강경하게 그럴 수 없다고 거부하는 
몽빠르나스의 계약서 얘기가 나오는 부분에 이르러 형은 뛸 듯이 기뻐하며 외쳤다.
  "이제 다니엘이 어디 있는지 알았어."
형은 편지를 호주머니에 집어넣고 조용히 잠자리에 들었다. 
그러나 극도로 피곤했음에도 불구하고 형은 잠을 이루지 못했다. 
그 빌어먹을 기침이 끝없이 나오는 바람에 쿨룩거리며 엎치락뒤치락했다. 
뜸을 들이듯 천천히 게으름을 피우며 싸늘한 바람을 몰고 오는 가을의 새벽 녘, 
형은 재빨리 잠자리에서 일어났다. 밤새도록 뒤척이며 계획을 이미 다 짜 놓았다.
형은 장농 속에 남아 있던 몇 가지 물건을 챙겨 트렁크에 넣었다. 
금새 실로 묶은 상자도 잊지 않았다. 
그리곤 낡은 쌩 제르멩 종탑에 마지막 작별인사를 고하고는 
창문, 장농문 할 것 없이 모든 문들을 다 열어 놓고 그곳을 떠났다. 
이제 타인이 살게 될 그 방에 나와의 아름다웠던 삶의 흔적을 모두 없애기 위해서였다. 
아래층에 내려와 형은 방을 내놓겠다고 말하고 밀린 집세를 지불했다. 
그리고 수위의 호기심에 찬 엉큼한 질문에는 대꾸도 없이 지나가는 마차를 소리쳐 불렀다. 
그러고는 마부에게 바띠놀의 담므 가에 있는 삘르와 호텔로 가자고 했다.
그 호텔은 후작 집의 요리사인 늙은 삘르와 씨의 동생이 경영하고 있었다. 
그 호텔은 믿을 만하다는 추천을 받은 사람들에게만 3개월씩 방을 빌려 주어 
그 근방에서는 색다른 평판을 얻고 있는 유명한 호텔이었다. 
그래서 삘르와 호텔에서 산다는 것은 생활이 착실하고 품행이 방정하다는 보증서나 다름없었다. 
다끄빌 후작 집의 요리사의 신임을 얻은 형은 마르살과 포도주 한 바구니를 가지고 그 호텔을 찾아갔다. 
그래서 그런지 삘르와 씨는 형이 방 하나를 빌려야겠다고 수줍게 말하자 
선선히 일층에 있는 전망좋은 방을 내주었다. 
호텔 정원 쪽으로 창문이 나 있는 방이었다. 
정원은 그리 크지는 않았지만 아카시아나무가 두세 그루 있었고 
바띠놀 지방 특유의 초록색 잔디가 깔려 있었으며 열매가 열리지 않는 무화과나무 한 그루, 
병든 포도나무 한 그루, 국화 몇 포기가 전부였다. 
그러나 조금은 우울하고 습기찬 방 분위기를 명랑하게 바꾸는 데는 그것만으로도 충분했다.
형은 잠시도 지체 않고 짐을 풀고 벽에 못을 박았다. 
속옷을 챙기고, 내 파이프 걸이를 마련하고, 침대 머리맡에 어머니의 초상화를 걸고, 
마지막으로 아늑한 분위기가 들도록 방 구석구석을 꾸몄다. 
모든 것을 완벽하게 꾸며 놓고 나서 형은 자리에 잠시 앉지도 않고 서서 급히 점심식사를 했다. 
그러고는 황급히 방을 나왔다. 
그는 삘르와 씨에게 그날 저녁만은 급한 일로 좀 늦어서야 돌아올 것 같다고 말해 두고 
맛있는 포도주와 두 명 분의 식사를 자기 방에 준비해 달라고 정중하게 부탁했다. 
형의 특별한 부탁을 흔쾌히 수락하면서도 사람좋은 삘르와 씨는 
부임한 지 얼마 안 되는 수사처럼 귀밑까지 얼굴을 붉히며 난감한 듯이 말했다.
  "저, 실은... 이곳의 규칙이 좀 그런데... 우리는 여자분을 모셔...."
  자끄 형은 빙그레 웃으며 말했다.
  "아, 무슨 말씀인지 알겠읍니다... 두 명 분의 식사라는 말이 마음에 걸리시나 보군요. 
삘르와 씨. 안심하십시오. 여자는 아닙니다."
 몽빠르나스 쪽으로 발걸음을 옮기면서 형은 혼자 중얼거렸다.
 "다니엘이 여자였다면 정말 용기도 없는 연약한 여자일 테지. 
사실 그애는 절대로 혼자 내버려 두면 안 될 철부지 어린애야."
자끄 형이 몽빠르나스에서 나를 찾을 거라고 어떻게 확신하게 됐는지 모를 일이다. 
발송하지 않은 그 끔찍한 편지가 쓰여졌던 때 이후로 내가 연극을 그만두었을 가능성도 있었고, 
또 몽빠르나스에서 나를 찾아 낼 것이며 바로 그날 저녁에 나를 데려올 것이라는 확신을 갖고 있었다.
 '그애를 빼내 오려면 그애 혼자 있을 때여야 해. 그 여자가 눈치채면 안 돼.'
그런 생각이 미치자 자끄 형은 곧장 극장으로 찾아오지 않았다. 
무대 뒤쪽은 시끌벅적해서 사람을 찾아 내기란 쉽지 않을 것이라고 판단한 형은 
오히려 연극 포스터를 보고 언제 출연하는지를 먼저 알아내는 편이 한결 수월할 거라고 생각했다.
파리 근교의 연극 공연 포스터들은 알자스 지방의 결혼식 안내처럼 
포도주 파는 가게의 문 창살에 따닥따닥 붙어져 있었다. 
형은 그 포스터들을 훑어내리다가 기쁨의 탄성을 내질렀다.
그날 저녁 몽빠르나스 극장에서 공연될 '마리쟌느'라는 5막짜리 연극에 
이르마 보렐, 데지레, 르보노, 귄느 등의 출연자 이름이 나열되어 있었다.
안내 포스터에서 그에 앞서 '사랑과 자두'라는 단막 통속 희극에서 
다니엘과 앙뜨완느, 레옹띤느가 출연한다고 안내되어 있었다.
 "잘 됐군. 둘이 같은 연극에 등장하지 않는군 그래. 만사가 잘 풀릴 것 같은데...."
형은 룩셈부르그 까페에 들어가 납치시간이 다가오기를 기다렸다.
저녁이 되자 그는 연극이 시작되고 있는 극장으로 갔다. 
그는 한 시간 동안이나 순경이 지키고 선 복도와 문 앞을 서성거렸다.
때때로 극장 안에서 터져나오는 박수소리가 멀리서 들려 오는 우박 소리처럼 들려 왔으며 
사람들이 그렇게 박수를 쳐대는 것은 동생이 지어내는 표정 때문일 것이라는 생각에 가슴이 저며 왔다. 
9시쯤 되자 사람들이 떠들썩하게 길거리로 쏟아져 나왔다. 통속 희극이 끝난 모양이었다. 
길가에 나와서까지 계속 웃어 대는 사람들도 있었다. 
그들은 휘파람을 불어 대며 떠들어 댔다. 
그들은 파리의 동물원에 갇혀서 울부짖는 울음소리를 흉내냈다.
자끄 형은 혼잡한 틈바구니에서 좀더 기다렸다. 
그리고 막간 휴식시간이 끝나고 사람들이 모두 장내로 들어갈 때쯤 
형은 배우가 드나드는 어둡고 끈끈한 통로로 미끄러질듯 들어가서 이르마 보렐을 불러달라고 부탁했다.
  "안 되겠는데요. 지금 무대 위에 계신대요...."
 형은 완전히 속임수를 썼던 것이다. 침착한 어조로 형은 대답했다.
  "이르마 보렐 부인을 만날 수 없다면 다니엘 씨를 불러 주시오. 
부인에게 전할 말을 그 사람한테 말해 두겠읍니다."
그렇게 해서 잠시 후, 자끄 형은 나를 만나게 되었고 
재빨리 나를 마차에 태우고 절망과 불행의 몽빠르나스 극장에서 나를 건져내 주었던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