꼬마 철학자75 - 알퐁스 도데
납치극
밤 9시쯤 나는 첫번째 출연을 마치고 분장실로 돌아오던 참이었다.
그때 무대쪽으로 가고 있는 이르마 보렐과 마주쳤다.
쎌리멘느처럼 한 손에 부채를 들고 레이스가 달린
화려한 빌로드 드레스로 성장을 한 그녀는 눈부시게 아름다웠다.
"장내로 와요. 지금 내가 나가거든요... 굉장히 아름다와 보일 거예요."
내 곁을 스쳐 지나가면서 그녀가 낮게 가라앉은 목소리로 말했다.
나는 서둘러 분장실로 돌아와 재빨리 옷을 벗었다.
다른 동료단원 두 명과 함께 쓰고 있던 분장실은 천정이 낮고 창문도 없이
램프가 흐릿하게 켜진 조그만 방이었다.
가구라곤 고자 밀짚으로 만든 의자 두서너 개가 놓여 있을 뿐이었다.
한쪽 벽에는 거울, 굽실굽실한 가발, 금박이 다 벗겨져 버린 빛바랜 남루한 빌로드 의상 따위가
너절하게 걸려 있었으며 바닥 한 구석에는 뚜껑도 덮지 않은 붉은색 분이 든 항아리며
낡은 화장분첩이 널려 있었다.
내가 거기서 화장을 지우고 있는데 아래쪽에서 한 기술자가 나를 불렀다.
"다니엘 씨! 다니엘 씨!"
나는 분장실을 나와 축축한 나무 난간에 몸을 내밀고 물었다.
"무슨 일인데요?"
대답이 없었으므로 나는 노란색 가발을 눈썹까지 내려 쓰고
분가루와 루즈를 덕지덕지 칠한 채 벗다 만 광대옷을 걸치고는 그대로 뛰어 내려갔다.
계단 아래쪽에서 올라오던 사람과 마주칠 뻔한 나는 한발짝 뒤로 물러서며 소리쳤다.
"자끄 형!"
우리는 잠시 말없이 쳐다보기만 했다.
이윽고 자끄 형이 내 손을 잡더니 눈물을 글썽거리며 부드러운 목소리로 속삭였다.
"오, 다니엘!"
그것으로 충분했다.
나는 가슴속 깊은 곳까지 감동되어 겁많은 아이처럼 주변을 두리번거리다가
아주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너무나 작은 목소리로 말해서 간신히 알아들을 정도였다.
"날 여기서 데리고 나가 줘, 형."
자끄 형은 떨면서 내 손을 잡고 밖으로 데리고 나갔다.
우리는 현관에서 기다리던 마차에 올라탔다.
"담므 가로 가주시오."
자끄 형이 마부에게 소리쳤다.
"마침 거긴 내 구역인데!"
마부가 즐거운 듯 대답했고 마차는 달리기 시작했다.
자끄 형은 이미 이틀 전에 파리에 돌아왔다.
마차 안에서 형은 그동안의 자초지종을 내게 얘기해 주었다.
형은 팔레르모에서 돌아오자마자 부친 지 석 달이나 되는 삐에로뜨 씨의 편지를 발견했다.
쓸데없는 군더더기가 모두 생략된 그 편지에는
다니엘이 증발해 버렸다는 간단한 말 한마디만 써 있었다.
그 편지를 읽고 자끄 형은 모든 것을 짐작했다.
"녀석이 어리석은 짓을 저질렀군... 내가 가봐야겠어."
자끄 형은 곧장 후작에게 달려가 휴가를 신청했다.
"휴가라고!" 후작은 펄쩍 뛰면서 말했다.
"자네 미쳤나?... 내 회고록은 어떻게 하고?"
"갔다가 돌아오는 시간까지 합쳐서 8일이면 됩니다,
후작님. 제 동생의 목숨이 달린 문제입니다."
"내가 자네 동생을 비웃는 건 아닐세... 하지만 자네를 쓸 때 말해두지 않았었나?
우리의 계약을 잊은 건 아니겠지?"
"아닙니다. 후작님, 하지만...."
"하지만이라는 말은 집어치우세. 자네도 다른 사람들이랑 마찬가지일 거야.
8일 동안이나 자네 자리를 떠나게 되면 다신 돌아오지 못하게 될 걸세.
잘 생각해 보게. 부탁일세... 참, 자네가 생각하는 동안 거기 좀 앉아 있지. 내 말을 받아써야지."
"충분히 생각했읍니다. 후작님, 전 가겠읍니다."
"지옥에나 가버려!"
고집불통의 그 늙은이는 모자를 집어들고 새 비서를 알아 보러 프랑스 영사관으로 갔다.
자끄 형은 바로 그날 밤 출발했다.
파리에 도착하자 곧바로 형은 보나파르뜨 가로 갔다.
"내 동생 있어요?"
형은 마당의 물탱크 위에 걸터앉아 파이프 담배를 피우고 있는 수위에게 소리쳤다.
수위는 웃음을 터뜨리며 교활하게 말을 돌려 댔다.
"달리기하기엔 좋은 날씨로군."
수위는 입을 열려 하지 않았지만 자끄 형이 백 쑤우짜리 동전을 건네주자 누런 이를 드러내 보였다.
오층에 사는 학생과 이층에 사는 부인이 꽤 오래 전부터 사라져 버렸다는 것,
어디에 있는지는 아무도 모른다는 것,
꾸꾸블랑이 매달 그들 앞으로 배달된 것이 있는지 확인하러 오는 것으로 보아
파리 어딘가에 있으리라는 것,
둘이 함께 있다는 것을 확실하다는 등의 이야기를 해주었다.
게다가 다니엘씨는 떠날 때에 자기가 집을 나간다는 사실을 알려 주지 않았기 때문에
다른 자잘한 비용은 차지하고 지난 넉 달 동안의 집세가 밀려 있다는 사실도 잊지 않고 덧붙였다.
"알았어요. 모두 지불해 드리겠습니다."
자끄 형은 여행에서 묻은 먼지를 털 시간도 없이 1분도 지체하지 않고 나를 찾아 나섰던 것이다.
형은 제일 먼저 출판업자를 찾아갔다.
'전원시'의 보관소가 거기였으므로 다니엘이 종종 그곳에 들르리라는 생각에서였다.
출판업자는 형이 들어서는 모습을 보자 대뜸 화색이 돌며 말했다.
"편지를 쓰려고 했습니다. 나흘 후면 첫번째 어음 만기일이 된다는 건 알고 계시죠."
형은 태연하게 대답했다.
"알고 있읍니다. 내일부터 서점들을 찾아다녀야죠.
나한테 돌려 줄 돈이 있을 거예요. 책이 많이 팔렸다고 하더군요."
출판업자는 알자스인 특유의 푸른 눈을 휘둥그렇게 떴다.
"뭐라고요?... 책이 잘 팔렸다고요? 누가 그런 말을 합디까?"
형의 안색이 창백해졌다. 재난이 다가오고 있음을 감지했다.
알자스인은 말을 이었다.
"이곳을 좀 보십시오. 여기 빽빽이 들어 찬 책들을 좀 봐요. 이게 '전원시'란 말입니다.
이 책을 팔기 시작한 지 다섯 달이 됐지만 딱 한 권이 팔렸을 뿐이에요.
결국 지친 서점주인들이 자기들이 갖고 있던 책들을 나한테 반품한 거라오.
이제 이 책들은 종이값이나 쳐서 파는 수밖에 없어요.
참 이상하기도 하지. 인쇄는 아주 잘 됐는데 말이야."
출판업자의 말 한마디가 형에게는 쇠지팡이로 머리를 두드려 대는 것과 같은 고통이었다.
그러나 고통은 거기서 끝나지 않고
내가 형의 이름으로 출판업자에게서 돈을 꾸었다는 사실까지 알게 되었다.
매정한 알자스인은 계속 이야기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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