꼬마 철학자78 - 알퐁스 도데
돌아온 탕아 1.
"자, 다니엘 잘 봐."
삘르와 호텔 방에 들어섰을 때 자끄 형이 말했다.
"네가 파리에 처음 도착하던 바로 그날 밤 같잖아!"
정말 그날 밤처럼 새하얀 식탁보 위에 깔끔한 저녁식사가 우리를 기다리고 있었다.
맛좋은 냄새를 풍기는 파이, 오래된 포도주, 유리잔에 비친 촛불의 영롱한 불꽃...
그러나 예전과 똑같은 것은 아니었다.
그 당시의 그 행복은 다시 시작될 수는 없었다.
저녁식사는 그때와 다름없이 똑같았지만 우리 마음을 설레게 하는 희망도 없었고,
파리에 도착했다는 부푼 꿈과 아름다운 열정도 없었으며
우리 집안을 세워야 한다는 앞날에 대한 계획도, 영광에 대한 환상도,
웃음과 시장기를 느끼게 해주던 소박한 감상도 없었다.
파리에 갓 도착했던 그날 밤의 저녁식사에서 느낄 수 있었던 기쁨이
삘르와 호텔 방에서는 도무지 느껴지지 않았다.
그 시절의 기쁨은 이제 모두 쌩 제르멩 종탑 속에 고스란히 묻어 두고 떠나온 것이었다.
다시는 우리 형제에겐 축제 같은 분위기를 느끼며
즐거운 시간을 보내는 일은 없을 거라는 생각이 밀려들었다.
나는 끊임없이 눈물을 흘리며 자끄 형이 나를 유심히 살펴보는 눈길을 피했다.
자끄 형 역시 마음속으로는 울고 싶으면서도 의연하게 자신을 자제하며 쾌활하게 말했다.
"이봐, 다니엘, 실컷 울었잖아. 한 시간 전부터 내내 넌 울기만 했어.
마차 안에서 내가 이야기하는 동안에도 내 어깨에 기대어 계속 울며 왔잖아.
참, 어처구니없고 우스꽝스러운 환영파티가 되어 버렸구나!
너를 보니 옛날 생각이 나. 그 풀단지하며 네가 날더러 얼간이라고 놀려 대던 시절 말이다.
이제 그만 눈물을 닦고 거울 좀 봐봐. 아마 웃음이 날 걸."
나는 거울을 보았다. 하지만 웃음이 나오지 않았다. 부끄러웠다...
노란 가발은 이마를 덮고 허연 분과 빨간 루즈로 범벅이 된 얼굴,
그 위로 땀과 눈물이 얼룩져 있는 내 모습은 흉칙한 꼬락서니였다.
그 모습이 너무나 혐오스러워 나는 가발을 벗어선 내던지려다 조심스레 벽에 걸었다.
자끄 형이 놀라서 쳐다보았다.
"왜 거기다 걸어 놓는 거니, 다니엘?
아파치 전투에서 얻은 전리품 같은 그 가발은 몹시 천해 보이는데...
인디언에게서 벗겨 낸 머리가죽 같은 느낌이 든다니까."
"아니 자끄 형, 이건 전리품이어서 그런 게 아니고 내 회한의 모습이야.
만질 수 있고 볼 수 있는 내 회한이란 말이야.
그래서 늘 볼 수 있도록 여기에 걸어 놓고 싶은 거야."
자끄 형의 입가에 슬픈 미소가 스치고 지나갔다.
그러나 곧 그는 즐거운 표정으로 돌아왔다.
"그런 건 내버리자꾸나. 이젠 넌 어리석은 꿈에서 깨어났고 나는 네 귀여운 얼굴을 다시 보게 되었잖니.
자, 우선 굶주린 배를 채우자. 배가 고파 죽을 지경이다."
사실 형이나 나는 배가 고프지도 않았고 먹고 싶은 마음도 없었다.
형을 생각해서 나는 억지로라도 기분좋은 얼굴을 해보이고 싶었지만
먹을 것이 목구멍에 걸려 넘어가지 않았다.
참아 내려고 무진 애를 썼는데도 결국 나는 파이 위에 눈물을 쏟고 말았다.
자끄 형도 눈시울을 적시면서 힐끔힐끔 내 눈치를 살피더니 말을 꺼냈다.
"왜 우니? 이곳에 온 걸 후회하고 있는 거냐?
너를 납치해 와서 나한테 무슨 감정이라도 있는 거야?"
"자끄 형, 그런 말 하지마! 그게 아니란 걸 알잖아!
형은 내게 무슨 말이든 할 권리가 있지만 말이야."
우리는 묵묵히 식사를 계속했다. 아니다, 단지 먹는 시늉만 냈을 뿐이었다.
잠시 무겁게 가라앉은 분위기를 깨고 자끄 형이 접시를 밀어 놓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제대로 식사를 하지 못할 것 같구나. 잠이나 자는 게 좋겠어...."
'번뇌와 고민은 잠자리 친구가 아니다'라는 속담처럼
그날 밤 나는 이런저런 생각으로 엎치락뒤치락하며 밤을 꼬박 새우고 말았다.
어머니 같은 자끄 형이 내게 베풀어 준 온갖 사랑에 대해 나는 고작 이런 식으로 보답을 하다니...
나의 악행들이 줄줄이 떠올랐다.
형과 내 삶을 연결해 준 고리들, 형의 끝없는 희생과 내 이기주의,
'이 세상에서 유일한 행복은 타인의 행복을 위해 살아가는 것'이라는 믿음으로 살아가는
형의 헌신적인 영혼과 내 비겁하고 어린애 같은 영혼을 비교하는 일은 진정 고통이었다.
'이제 내 인생은 엉망이 돼 버렸어. 이제 자끄 형의 사랑도,
검은 눈동자의 사랑도 잃어버리고 내 자존심마저도 잃어버리고 말았어. 이제 난 뭐가 될까?'
동창이 희끄무레 밝아 오고 있었다.
나는 끔찍한 고통으로 인해 뜬눈으로 밤을 새웠다. 형벌을 받는 듯했다.
자끄 형 역시 잠들지 못했다.
나는 형이 이리저리 뒤척이는 소리와 끊임없이 계속되는 마른 기침소리를 들었다.
한번은 조심스럽게 물었다.
"자끄 형, 기침을 그렇게 심하게 하는데, 어디 아파?"
"아무렇지도 않아. 어서 자...."
형이 짤막하게 대꾸해 버려서 혹시 속으로 내게 몹시 화를 내고 있는 게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렇게 생각하니 나는 더욱더 가슴이 메어지면서
슬픔이 복받쳐 이불을 뒤집어쓰고 소리를 죽여 가며 울기 시작했다.
울다 지친 끝에 나는 어느결엔가 어렴풋하게 잠이 들었다.
고통은 잠을 방해했지만 눈물은 마취제처럼 잠을 몰고 왔다.
내가 선잠에서 깨어났을 때는 날이 훤하게 밝아 있었다.
침대에 누운 채 옆자리를 더듬어 보았지만 자끄 형은 없었다.
나는 형이 벌써 나간 줄 알았다.
그런데 자리에서 일어나 커튼을 열려다가 문득
방 한켠의 소파 위에 잠들어 있는 창백한 얼굴의 형을 발견했다.
형의 얼굴은 백지장같이 하얗다. 그 순간 불길한 예감이 뇌리를 스치고 지나갔다.
나는 형 품에 뛰어들며 소리쳤다.
"자끄 형!"
형은 깊은 잠에 빠져 내 외침에도 깨어나지 않았다. 정말 두려운 일이었다.
잠들어 있는 형의 얼굴에는 전엔 한번도 보지 못했고 슬픈 고통의 그림자가 짙게 깔려 있었다.
뼈만 앙상한 야윈 몸매, 홀쭉해진 얼굴, 창백한 뺨,
병색이 완연한 투명해 보이는 손, 형의 모습을 찬찬히 뜯어보았다.
고통스러웠다. 언젠가 형의 그런 모습을 보고 무척 고통스러웠던 적이 있었다는 생각이 언뜻 스쳤다.
언제일까? 자끄 형은 한번도 아파 본 적이 없었고 또한 한번도 저렇게 뼈만 앙상하게 남고,
눈 밑에 푸르스름한 반점 같은 것이 떠오른 적은 없었는데...
그럼 대체 나는 언제 어디에서 지금과 똑같은 형의 환영을 보았던 것일까?
그 순간 내가 그토록 시달렸던 악몽이 되살아 났다.
그렇다! 무시무시할 정도로 창백한 자끄 형이 소파에 누워 죽어 있던 바로 그 꿈,
형을 죽인 건 다니엘 에세뜨 바로 나였다.
그 순간 한줄기 햇살이 창문을 통해 조용히 스며들어 죽은 듯이 누워 있는
창백한 형의 얼굴 위를 도마뱀이 기어가듯 비춰 부었다.
그 따스한 햇살을 받은 누워 있던 자끄 형이 눈을 비비며 잠에서 깨어나
곁에 서 있는 내 모습을 바라보며 상냥한 미소를 지어 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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