꼬마 철학자76 - 알퐁스 도데
납치극 2.
"어제던가, 다니엘이 2루이를 빌려 오라고 무시무시하게 생긴 흑인 하녀를 보냈더군요.
딱 잘라서 거절했읍니다.
우선 굴뚝청소부 같은 얼굴의 그 하녀가 미더워 보이지가 않더라구요.
에세뜨 씨도 아시겠지만 난 부자가 아닙니다.
게다가 당신 동생이 꾸어간 돈이 벌써 4백 프랑이나 된다 이 말입니다."
"알겠읍니다. 걱정 마십시오. 그 돈은 곧 갚아드리겠읍니다."
형은 대담하게 말하고 자신이 받은 충격이 드러날까 봐 재빨리 그곳을 나왔다.
길거리로 나와서 형은 담 모퉁이 근처에 풀썩 주저앉고 말았다.
여자와 함께 도망가 버린 동생, 출판업자에게 갚아야 할 빚, 말란 방세,
수위, 모레로 다가온 어음 만기일, 그 모든 것이 형의 뇌리를 맴돌며 윙윙 소리를 내고 있었다.
형은 홀연히 자리에서 일어났다.
"우선 빚을 갚아야 해. 그게 급선무야."
그리고 내가 삐에로뜨 씨에게 용서받지 못할 행동을 했음에도 불구하고,
형은 주저하지 않고 그의 집으로 갔다.
형이 라루트 상회에 들어서자 카운터 뒤쪽에 앉아 있는
얼굴이 누렇게 뜨고 푸석푸석 부은 사람이 눈에 들어왔다.
처음엔 누구인지 알아 보지 못했다.
그러나 문소리를 들은 그 얼굴이 자리에서 일어나 방금 들어온 사람이 누구인지 알아 보고 중얼댔다.
"이런 경우네 꼭 들어맞는 말인데...."
그 말을 듣는 순간 형은 그가 누구인지 알았다. 가엾은 삐에로뜨 씨였다.
자기 딸의 슬픔이 그를 딴 사람으로 만들어 놓았던 것이다.
그토록 쾌활하고 명랑하던 예전의 삐에로뜨 씨의 모습은 간 곳이 없었다.
자기 딸이 다섯 달 전부터 줄곧 흘려온 눈물 때문에
그의 눈 또한 빨갛게 충혈되었고 뺨은 짓물러 버렸다.
예전에 맑은 웃음을 터뜨리던 입술은 갈라터졌고 차갑고 조용한 미소,
과부나 버림받은 여인의 미소 같은 웃음을 짓고 있을 뿐이었다.
그것은 예전의 삐에로뜨 씨 모습이 아니었다.
가게 안에서 변한 것이라고는 삐에로뜨 씨밖에 없었다.
진열대 위쪽에는 채색한 목동과 통통한 보라색 중국인 인형이 보헤미아산 유리잔과
큰 꽃무늬가 그려진 접시들 사이에 놓여진 채로 태평스럽게 웃고 있었다.
오목한 스프 그릇과 자기 카르셀 등은 여전히 진열장 뒤쪽에서 반짝이고 있었으며
가게 뒷방에는 예전의 그 플루트소리가 여전히 은은하게 울려나오고 있었다.
형은 목소리에 힘을 주어 말했다.
"삐에로뜨 씨, 나에요. 어려운 부탁을 하러 왔어요.
천오백 프랑을 좀 빌렸으면 합니다만...."
삐에로뜨 씨는 아무 말 없이 금고를 열고 돈을 찾았다.
그러더니 서랍을 열어 보고는 조용히 자리에서 일어섰다.
"지금 이곳엔 현금이라곤 한푼도 없군. 좀 기다려 보게나. 위층에 갔다올 테니."
그가 나가려다 말고 주춤하며 덧붙였다.
"자네에게 올라가 보라고 않겠네. 딸애가 자네를 보면 꽤나 힘들어 할 거야."
형은 한숨을 내쉬며 대답했다.
"그래요, 삐에로뜨 씨는 천 프랑짜리 수표 두 장을 손에 쥐고 돌아왔다.
형은 그걸 받지 않으려 했다.
"천오백 프랑만 있으면 됩니다."
형이 한사코 거절했지만 삐에로뜨 씨 역시 고집을 부렸다.
"자끄, 부탁이야. 이걸 다 받아 가게나. 난 2천 프랑을 꼭 주고 싶네.
자네 어머님이 내게 빌려 줬던 그 돈이란 말일세.
만일 거절한다면 난 평생 자넬 원망하게 될 거야.
내가 자네 어머니의 은혜를 갚을 수 있는 좋은 기회야."
형은 감히 거절할 수가 없었다.
형은 돈을 호주머니에 넣고는 삐에로뜨 씨의 손을 잡고 아주 짧게 말했다.
"안녕히 계세요, 삐에로뜨 씨. 고마워요!"
삐에로뜨 씨 역시 형의 손을 잡았다.
그들은 잠시 묵묵히 서로의 얼굴을 마주 본 채 서 있었다.
두 사람 모두 다니엘이라는 내 이름이 목구멍까지 올라왔지만 입밖에 내지 못했다.
아버지와 어머니 노릇을 해야 하는 형과 삐에로뜨 씨는
서로의 처지를 너무도 잘 이해하고 있었던 것이다.
형이 먼저 가만히 손을 뺐다. 눈물이 쏟아졌다.
형은 서둘러 그곳을 빠져나왔다. 삐에로뜨 씨가 큰길까지 쫓아나와 그를 배웅했다.
길가에 이르러 불쌍한 삐에로뜨 씨는
가슴 가득했던 슬픔을 더이상 참지 못하고 힐난하는 투로 이야기를 시작했다.
"오! 자끄... 자끄... 이건 이런 경우에 꼭 들어맞는 말인데...
이건 이런 경우에 꼭 들어맞는 말인데...."
그러나 그는 너무나 감정이 격해 있어서 말을 잇지 못하고 똑같은 말만을 되풀이했을 뿐이었다.
"이건 이런 경우에 꼭 들어맞는 말인데... 이건 이런 경우에 꼭 들어맞는 말인데...."
삐에로뜨 씨를 남겨두고 형은 출판업자에게 되돌아갔다.
알자스인이 괜찮다고 했음에도 불구하고 형은 그 자리에서 내가 빌린 4백 프랑을 돌려 주려고 했다.
게다가 그 알자스인이 계속 걱정해 댈까 봐 지불만기가 된 세 장의 어음도 결재해 주었다.
한결 가벼워진 마음으로 형은 중얼거렸다.
"이제 다니엘을 찾아야겠다."
불행하게도 나를 찾아나서기엔 너무 늦은 시간이었다.
게다가 여행으로 인한 피로와 충격,
그리고 오래 전부터 계속되어 온 기침 때문에 가엾은 자끄 형은 완전히 기진맥진해 있어서
잠시나마 휴식을 취하러 보나파르뜨 가로 돌아가지 않으면 안 되었다.
10월의 저녁 햇살을 받으며 다락방에 들어섰을 때
형은 방안에 있는 물건들 모두가 내 이야기를 해주는 것 같은 느낌을 받았다.
창가에 놓인 시를 쓰는 책상, 유리컵, 잉크병, 대가 짧은 제르만느 신부님의 파이프,
그 모든 것을 보니 마치 나를 보는 것 같았다.
안개 때문에 약간 탁하게 여겨지는 쌩 제르멩의 종소리를 듣자
형은 내가 늘 서글픈 저 종소리를 몹시도 좋아했었다는 생각이 들었다.
젖은 유리창에 저녁기도 종소리가 와 닿을 때, 형이 느꼈던 감정은 오직 어머니만이 알 수 있으리라....
형은 방안을 두서너 바퀴 둘러보았다.
구석구석 살펴보고, 장농 서랍은 모조리 다 열어 보았다.
혹시 도망가 버린 동생의 흔적 같은 거라도 찾게 될까 하는 희망을 갖고 말이다.
하지만 장농은 텅 비어 있었다.
낡은 속옷과 남루한 옷가지만 남아 있을 뿐이었다.
방 전체에서 타락과 파탄만이 가슴이 서늘하도록 느껴졌다.
방바닥 한구석에 촛대가 나뒹굴고 벽난로에는 타버린 종이더미 밑에
금실로 묶은 하얀 상자가 버려져 있었다.
형은 그 상자를 알아 보았다.
까미유에게 온 편지를 넣어 두던 상자였던 것이다.
그런데 그 상자가 잿더미 속에 내팽개쳐져 있다니, 도저히 믿기지 않은 섬찍한 일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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