꼬마 철학자79 - 알퐁스 도데
돌아온 탕아 2.
"잘 잤니, 다니엘! 기침이 너무 심해서 널 깨우지 않으려고 소파에서 잤어."
형이 아무렇지 않게 조용히 말했지만 방금
본 형의 그 끔찍한 모습에 다리가 후들후들 떨렸다.
나는 마음속으로 계속 울부짖고 있었다.
'하늘에 계신 하나님 아버지, 자끄 형을 지켜 주세요!'
깨어날 때는 침울했지만 아침나절은 기분이 꽤나 유쾌해져 즐거웠다.
지난밤 그곳을 빠져나올 때 입고 있었던 무대의상을 다시 입었다.
마직 반바지, 땅바닥까지 옷자락이 끌리는 긴 빨간 조끼...
그러한 내 모습을 거울에 비춰 보면서 옛날처럼 밝게 웃음을 터뜨렸다.
"저런! 내 준비가 부족했군.
세련되지 못한 돈 주앙들은 미녀를 납치할 때 혼수품을 생각해 둔다던데.
어쨌든 걱정하지 마. 새옷을 사러 가야겠구나...
그것 또한 네가 파리에 처음 올 때와 꼭 같구나."
자끄 형은 날 웃기려고 그런 말을 했다.
형 역시 이젠 나처럼 이젠 예전같지 않다는 것을 느끼고 있었다.
내 얼굴이 어두워지는 것을 보고 형이 말했다.
"자, 다니엘, 지나간 일은 더이상 생각하지 말자.
이제부터 앞으로 올 새로운 인생을 생각해. 후회나 자기비하 따위의 생각은 지워 버리고
인생을 다시 시작하는 거야. 지나간 전철을 다시 밟지 않도록 노력하면 되는 거야...
이제부터 무엇을 하려는지 묻지는 않겠어.
하지만 네가 다시 시를 쓰고 싶을 거라는 생각이 드는데...
이 호텔 방은 시쓰기엔 좋은 장소야.
주위도 조용하고 정원엔 새들이 지저귀고 창가에다 책상을 갖다 놓으면...."
나는 형의 말허리를 끊고 외쳤다.
"아니야! 형. 이제 더이상 시는 쓰지 않겠어.
그건 형한테 너무 많은 희생을 치르게 했던 헛된 꿈이었어.
이제 난 형처럼 일을 하고 싶어. 우리 집을 일으키기 위해 나도 돈을 벌어서 형을 힘껏 돕겠어,"
형은 웃음을 지으며 조용히 말했다.
"좋은 계획이로구나. 하지만 내가 원하는 것은 그게 아니야. 돈을 버는 게 문제가 아니야...
그만두자꾸나! 그건 나중에 이야기하기로 하고... 네 옷이나 사러 가자."
나는 자끄 형의 외투를 뒤집어서 입었다.
외투자락이 발목까지 내려오 모습이 마치 하프만 하나 들려 놓으면
영락없이 삐에몬떼 지방의 음악가 같았다.
몇 달 전만 해도 그런 괴상한 옷차림을 하고 거리에 나섰다면 아마 부끄러워 죽을 지경이었을 것이다.
그러나 이제 수치심의 내용은 달라져 있었다.
여인네들이 그런 우스운 몰골로 지나가는 나를 보고 웃어 댄다 해도
몇 달 전 고미다락방에서 살던 시절 순수했던 내가 느꼈던 그런 수치심은 아니었다.
그랬다, 나는 변해 있었다.
옷가게를 나오면서 자끄 형은 어머니처럼 말했다.
"이제 널 삘르와 호텔로 데려다 줄께.
나는 장부정리를 해주던 철물점 주인한테 가봐야겠어.
아직 나한테 일을 시킬 의향이 있는지 알아봐야지...
삐에로뜨 씨에게 빌린 돈은 언제까지나 살아갈 수 있을 만큼 충분하지 않으니까.
이제 먹고 살 길을 찾아 봐야 하지 않겠니?"
'알았어, 형. 철물점에 가 봐. 나 혼자서도 호텔에 돌아갈 수는 있어.'
나는 형에게 이렇게 말하고 싶었지만
그가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알고 있었기 때문에 그 말을 입밖에 꺼내지 못했다.
행여나 내가 몽빠르나스로 돌아갈까 봐 형은 걱정하고 있는 게 분명했다.
형이 내 생각과 영혼을 읽을 수 있으면 좋으련만!
형을 안심시키기 위해 나는 호텔까지 얌전히 따라갔다.
하지만 형이 나가자마자 나는 밖으로 나왔다. 나 역시 볼 일이 있었다.
내가 삘르와 호텔로 돌아왔을 때는 꽤 늦은 시간이었다.
어두운 정원을 검은 그림자 하나가 불안하게 서성거리고 있었다. 자끄 형이었다.
형의 떨리는 목소리가 들렸다.
"다니엘, 오길 잘했다. 지금 막 몽빠르나스로 가려고 했었어...."
나는 짐짓 화를 발칵 내며 소리쳤다.
"너무 날 의심하는 군, 자끄 형. 너그럽지 못하게 왜 그러는 거야?
우리 계속 이래야 해? 이제 나를 믿지 않기로 한 거야?
맹세하지만 형이 생각하고 있는 그곳에서 온 게 아니야.
그 여잔 이제 내겐 죽은 존재야. 다시는 그 여자를 만나지 않을 거야. 맹세해.
이제 형은 나를 다시 찾은 거라구. 그 끔찍했던 과거의 나날들이 내게는 통한으로 남아 있었어.
형의 도움으로 난 거기서 탈출할 수 있었지. 미련 같은 건 손톱만큼도 없어...
무슨 말을 해야 형이 날 믿어 주지? 정말 야속해! 내 가슴속만 열어 보일 수만 있다면 좋겠어.
그러면 내가 거짓말 하는 게 아니란 걸 알 수 있을 텐데 말이야."
형이 뭐라고 대답했는지는 기억나지 않지만
어둠 속에서 쓸쓸하게 고개를 끄덕이던 형의 모습은 지금도 눈에 선하다.
"그래 널 믿고 싶다...."
그때 나는 속으로 정말 진지하게 모든 것을 되짚어 보고 새로운 생활에 대해 각오를 다지고 있었다.
아마도 나 혼자였다면 결코 그녀에게서 빠져나오지 못했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그녀와 나를 얽어맸던 사슬이 끊어져 버리자 나는 뭐라 설명할 수 없을 만큼 마음이 가벼웠다.
마치 탄 가스로 목숨을 끊으려고 하다가 죽음이 눈앞에 성큼 다가서자
삶에 대한 미련이 짙어지며 자살을 후회하는 사람처럼 말이다.
그러나 때는 너무 늦었고 질식상태에 빠져 숨을 헐떡이고 몸은 점점 마비되어 가는데
갑자기 이웃 사람들이 달려와 문을 활짝 열어 젖혀 구세주 같은 신선한 공기가 방안에 퍼지면
가엾은 자살미수자는 허겁지겁 그 공기를 들이마시면서 아직도 살아 있다는 것에 대해
느닷없는 고마움을 느끼며 다시 새롭게 삶을 살아가야겠다는 의욕으로 충만해진다.
이처럼 나도 다섯 달 동안 도덕적인 질식상태를 보내고 난 뒤
성실한 삶이라는 강렬하고 순수한 공기를 깊숙이 들이마셨던 것이다.
나는 그 공기로 내 허파를 가득 채우고
또다시 타락의 길에 들어서지 않겠다고 하나님 앞에 맹세했던 것이다.
자끄 형조차 그것을 믿지 못했는데 하물며 다른 사람들이 어찌 내 진심을 믿을 수 있겠는가.
그날 밤 형과 나는 추운 겨울 밤처럼 불가에 앉아서 지새웠다.
방안에는 습기가 차 있었고 정원의 안개가 뼛속까지 파고들 정도로 찌뿌둥하게 추운 날씨였다.
슬픈 때에는 무엇보다 불꽃을 바라보노라면 마음이 훈훈해지고 아늑한 기분을 느낄 수 있다.
자끄 형은 장부를 정리했는데 그 결과 아주 엉망진창이 되어서 차변과 대변이 뒤죽박죽되었다.
그걸 제대로 정리하려면 한 달은 족히 걸려야 할 정도로 큰일거리가 되어 있었다.
나는 형의 일을 도와 주어야겠다고 생각했으나 셈을 전혀 이해하지 못했다.
붉은 선과 기이한 상형문자 같은 숫자들로 꽉 찬 두꺼운 상업장부와
한 시간쯤 씨름하다가 결국 나는 펜을 내던져 버리고 말았다.
그러나 자끄 형은 복잡하게 얽힌 그 일을 참을성 있고 훌륭하게 해냈다.
그는 빽빽하게 들어찬 숫자 위에 머리를 묻고 아무리 복잡한 사항에도 머뭇대지 않고 일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