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꼬마 철학자80 - 알퐁스 도데

Joyfule 2012. 8. 3. 00:03
 
 
꼬마 철학자80  - 알퐁스 도데  
 
  돌아온 탕아 3.
  이따금씩 형은 고개를 들어 말없이 꿈꾸고 있는 듯한 내 모습이 
  걱정스러운 듯 말을 걸곤 했다.
  "괜찮지? 심심하지 앉니?"
  나는 심심하지는 않았지만 그렇게 열심히 일하고 있는 형의 모습에서 
  어쩐지 슬픔과 쓰라림을 느꼈다.
  '나는 왜 살아가는 것일까? 
이 멀쩡한 두 팔로 나는 아무것도 할 줄 모르다니... 
나는 인생의 절정기에 내 자리값 하나 지불하지 못하고 있어. 
그저 날 사랑하는 사람들에게 고통을 주는 일밖에 못하더니....'
그렇게 생각하면서 나는 검은 눈동자를 떠올렸다. 
자끄 형의 의도적으로 괘종시계 위에 얹어놓은 듯한 
금색 끈으로 묶인 작은 상자를 고통스럽게 바라보았다. 
그 당시는 내게 참으로 많은 것들을 말해 주고 있었다.
 '검은 눈동자는 네게 자신의 마음을 주었어. 그걸로 너는 무얼 했지? 
너는 그걸 짐승의 사료로 썼어, 그러면서 내 잘못을 좀 줄여보려고 위안하듯 생각했다.
 '내가 아냐! 꾸꾸블랑이 먹어 버렸어!... 꾸꾸블랑이 먹어 버렸어!'
벽난로 앞에 앉아, 일과 회상 속에서 보낸 그 길고 우울한 밤은 
형과 내가 걸어온 인생과 앞으로 걷게 될 삶의 모습 그대로였다. 
다가올 매일매일도 그날 밤과 엇비슷한 모습으로 지나갈 것시다. 
물론 회상에 잠겨 눈을 꾼 것은 자끄 형이 아니다. 
형은 10시간 동안이나 숫자 속에 파묻혀 두꺼운 장부와 씨름을 했다. 
그가 일하는 동안 나는 불을 쑤셔 일으키며 금색 끈으로 묶인 작은 상자와 대화를 나누었다.
  '검은 눈동자, 우리 이야기를 하자! 괜찮니 ?'
자끄 형에게는 차마 내가 먼저 검은 눈동자의 얘기를 꺼낼 수 없었다. 
이런저런 이유를 들어 형은 의식적으로 그녀 이야기를 꺼내는 것을 조심스레 피하곤 했다. 
형은 삐에로뜨 씨에 관해서조차 단 한마디도 꺼내지 않았다. 
그래서 나는 작은 상자를 바라보며 그녀에 대한 궁금함으로 꿈꾸듯 작은 상자와 대화를 나누었다.
정오쯤 되면 자끄 형의 기분이 한결 좋아진 듯해서 
나는 문쪽으로 살며시 다가가서 조용히 말하곤 했다.
"잠깐 나갔다 올께, 형!"
한번도 형은 내가 어디 가느냐고 묻지 않았다. 
그러나 나는 형의 서글픈 표정에서, "나가니?" 하는 걱정어린 말투에서, 
나를 전적으로 믿고 있지 않다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그 여자에 대한 생각을 형은 떨쳐 버리지 못했던 것이다.
 '다니엘이 그 여자를 만나게 되면 우린 서로를 잃게 돼.'
형은 그렇게 생각하는 듯했다. 
형의 생각처럼 내가 마녀 같은 그 여자를 다시 보게 된다면 어쩌면 나는 
매력적인 황금빛 머리칼과 입가의 하얀 흉터 때문에 다시 그녀에게 빠져 버릴지도 모르는 일이었다. 
그러나 나는 그 이후로 그 여자를 다시는 보지 못했다. 
아침 8시에서 10시 사이에 자선을 베푸는 신사를 만나는 그녀는 
지금쯤 그 재미에 빠져 이미 다니당을 잊어버리게 되었을 것이다. 
누군지 모르는 그 신사 덕에 나는 그 여자가 읊어 대는 찢어지는 듯한 연극대사나 
꾸꾸블랑의 구슬픈 후렴구도 다시는 듣지 않게 되었다.
며칠 동안 나는 형에게 사실을 밝히지 않고 외출해 왔다. 
그러던 어느날 저녁이었다. 
그날 난 돌아와서 너무나 기뻐 형에게 소리쳤다.
"자끄 형! 형! 좋은 소식이 있어. 일자리를 찾았어. 
그동안 형한테 아무 말도 안하고 열흘이나 길거리를 휘젓고 다니면서 일자리를 구하러 돌아다녔어. 
드디어 됐어. 일자리를 구했다구. 내일부터 몽마르뜨르에 있는 울리학원의 사감으로 일하게 됐어. 
여기에서 아주 가까운 곳이야... 아침 7시부터 저녁 7시까지 일하게 될 거야... 
형하고 함께 지낼 수 있는 시간은 줄어들었지만, 
이제는 나도 돈을 벌게 됐어. 형을 조금은 도울 수 있을 거야."
자끄 형은 숫자 속에 파묻었던 얼굴을 들며 냉정을 잃지 않으려고 애쓰면서 대답했다.
 "나를 도와주겠다는 건 정말 고마운 일이야... 
요즘 들어선 나 혼자서 감당하기엔 좀 힘겹다는 생각이 들더구나. 
무슨 일인지는 확실히 모르지만 꽤 오래 전부터 내 몸이 별로 좋지 않은 것 같아."
심한 기침 때문에 형은 말을 잇지 못했다. 
형은 펜을 힘없이 내려놓고 소파 위에 쓰러지듯 드러누웠다. 
무시무시할 정도로 창백한 형이 소파에 누워 있는 
모습을 보자 또다시 꿈에 보았던 끔찍한 모습이 눈앞을 스치고 지나갔다. 
그러나 번개처럼 짧은 순간이었다. 
자끄 형은 눕기가 무섭게 몸을 일으켜 앉아서 당황해 하는 내 얼굴을 보며 웃음을 터뜨렸다.
"아무 일도 아니야, 이 소심한 녀석아! 좀 피곤할 뿐이야. 
요즘 들어 좀 무리한 것 같아. 
네가 일자리를 구했다니 이제 좀더 휴식을 취하면 일주일 후엔 말짱해질 거야."
 형이 아주 자연스럽게 웃는 얼굴로 말했기 때문에 
죽음의 검은 날개짓소리를 내던 불길한 예감은 자취를 감췄다.
그 다음날 나는 울리학원에 들어갔다.
울리학원은 외관은 번듯하고 호화스러워 보였지만 우스우리만치 규모가 작은 학원이었다. 
그 학원은 윤락녀였다가 새 삶을 살고 있는 늙은 부인이 경영하고 있었는데 
아이들은 그녀를 '좋은 친구'라고 불렀다. 
그 학원에 다니는 스무 명 정도의 어린 꼬마들은 간식 바구니를 손에 들고 
셔츠자락이 삐죽 빠져나온 정말 개구장이 꼬마들이었다.
울리 부인은 아이들에게 찬송가를 가르쳤고 나는 알파벳을 가르쳤다. 
게다가 나는 휴식시간에도 그애들을 보살펴 주어야 했다. 
정원에 암탉 몇 마리와 인도산 수탉이 한 마리 있었는데 아이들은 그 닭들을 몹시 무서워했다.
 '좋은 친구'가 감기라도 걸릴라치면 교실 청소를 하는 등 
사감이 하기엔 민망한 자질구레한 일들도 모두 내가 했다. 
그러나 나는 한 번도 짜증내는 일 없이 열심히 그러한 일들을 해냈다. 
나는 돈을 번다는 사실에 가슴 뿌듯한 행복을 느끼고 있었다. 
저녁이 되어 삘르와 호텔에 돌아오면 형이 저녁식사를 준비해 놓고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저녁식사 후엔 형과 함께 정원을 거닐다가 벽난로 가에서 도란거리며 밤을 보내곤 했다. 
그것이 형과 나의 변함없이 반복되는 생활이었다. 
이따금 아버지와 어머니로부터 편지를 받곤 했는데 그것이 형과 내게는 가장 큰 즐거움이었다. 
어머니는 여전히 바티스트 삼촌 댁에 살고 있었고 
아버지는 포도주 회사 일로 여행을 하고 있었다. 
아버지가 다니는 회사 사정은 그다지 나쁜 편이 아니라서 
리용에서 진 빚을 거의 4분의 3쯤은 갚을 수 있었다. 
일이 년 후면 빚문제가 말끔히 해결되고 온 가족이 모여 살 수도 있을 것 같았다.
한번은 빚을 몽땅 청산하기 전에 일단 어머니만 삘르와 호텔로 모셔와 
같이 사는 게 어떻겠냐고 자끄 형에게 물어 보았다.
  "안 돼! 아직은, 아직은 안 돼... 잠시만 기다려."
 형은 이유는 설명하지 않고 한사코 안 된다는 대답만 했다. 
그럴 때마다 나는 마음이 몹시 상했다.
'형은 아직도 나를 믿지 않는 거야... 
어머니가 이곳에 와 계시면 내가 또 미친 짓거리를 하지 않을까 걱정하는 게 분명해. 
그래서 좀더 기다리자고 하는 걸 거야...."
그러나 나는 아무것도 모르고 있었다... 
자끄 형이 기다리자고 했던 것은 그 때문이 아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