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신에게 믿음의 비밀이 있는가?
희망고문이란 말이 있다. 거짓된 희망으로 오히려 괴로움을 주는 행위라는 뜻이다. 이 말투는 전도하는 사람들이 흔히 하는 말로, 예수를 믿고 복을 받으라면서 말이다. 이제는 그런 말에 귀를 기울이는 이들도 없지만, 어깨띠를 두르고 전단지를 나눠주면서 전도하는 이들이 전가의 보도처럼 사용하는 말이다. 그렇다면 예수를 믿으면 축복을 받아 행복하게 살게 되는가? 그 결과는 오랫동안 교회를 다니는 이들을 보면 어렵지 않게 알 수 있다. 성실하고 열정적으로 교회를 다니는 크리스천들이, 하나님을 모르는 세상 사람보다 더 행복하게 살고 있다는 증거는 없다. 만약 확연한 증거나 나타났다면, 교회는 사람들로 문전성시를 이루고 있어야 한다. 그러나 오히려, 사람들이 교회를 가자고 손을 잡아끌면 도망치는 이들이 대부분이다. 전도하는 이들이 말하는 대로, 예수를 믿고 교회에 나와서 행복하게 되었다면 이런 광경은 볼 수 없을 게다. 그래서 당신은 도대체 왜 예수를 믿고 교회에 나왔지만 행복하게 살지 못하는 이유에 대해 고민하면서 목회자를 찾아 상담을 해보셨는가? 그러나 이런 일로 목회자에게 상담을 요청하는 사람들은 거의 없다. 설령 진지하게 자신의 고단한 삶에 대해 상담하더라도, 목회자들의 답변을 예상하기는 어렵지 않다. 아직 때가 되지 않아 그렇다거나 믿음이 부족하다는 대답이 돌아올 것이다. 믿음이 부족하다는 대안은, 목회자가 요구하는 대로 교회에서 시행하는 예배의식에 성실하게 참석하고, 십일조를 넘치도록 드리며, 새벽기도회에 나오며 각종 희생적인 신앙행위를 열정적으로 따라해야 한다는 답변들이 나열될 것이다. 그러나 그런 신앙행위를 가장 성실하게 잘하고 있는 이가 누구인가? 바로 목회자 자신일 것이다. 그렇다면 목회자들은 죄다 사람들이 부러워하는 축복을 받아 행복하게 살고 있는가? 아닐 것이다. 그러므로 목회자들이 요구하는 믿음의 대안은 행복한 삶에 대한 해결책이 아니다. 그렇다면 때가 되지 않아서 그렇다는 답변은 어떤가? 이 말 역시 결과를 증명할 수 없는 말이다. 인내하고 기다리면 하나님께서 적당한 때에 삶의 문제를 해결해주고 가정이 회복되며 행복하게 살게 될 것이라는, 목회자의 답변을 듣고 고단한 삶에 대한 위안을 삼은 적이 한 두 번이 아니었을 것이다. 물론 인내가 성령의 열매이며 고난을 마주한 크리스천들이 가져야할 항목인 것은 틀림없다. 그러나 그런 처방전은 문제의 원인을 제대로 파악하지 못하다면 아무 짝에도 쓸모가 없다. 그래서 필자가 서두에 희망고문이라는 말을 쓴 까닭이다. 그래서 처음으로 돌아가서 예수를 믿으면 복을 받게 된다는 말을 찬찬히 살펴보고 싶다.
네가 네 하나님 여호와의 말씀을 삼가 듣고 내가 오늘 네게 명령하는 그의 모든 명령을 지켜 행하면 하나님 여호와께서 너를 세계 모든 민족 위에 뛰어나게 하실 것이라 네가 네 하나님 여호와의 말씀을 청종하면 이 모든 복이 네게 임하며 네게 이르리니 성읍에서도 복을 받고 들에서도 복을 받을 것이며 네 몸의 자녀와 네 토지의 소산과 네 짐승의 새끼와 소와 양의 새끼가 복을 받을 것이며 네 광주리와 떡 반죽 그릇이 복을 받을 것이며 네가 들어와도 복을 받고 나가도 복을 받을 것이니라(신28:1~6)
먼저 우리네 교회의 목회자들이 복에 대해 가장 많이 들먹이는 성경구절이 바로 신명기 28장의 약속의 말씀이다. 그러나 이 조건은 예수를 믿는 게 아니라, ‘네 하나님 여호와의 말씀을 삼가 듣고 내가 오늘 네게 명령하는 그의 모든 명령을 지켜 행하면’이다. 즉 하나님의모든 명령을 철저하게 지켜 순종하면 아래에 약속하신 놀라운 축복의 약속을 내려주시겠다고 말씀하고 계시다. 그래서 우리네 교회목회자들은 성경에서 말하는 모든 하나님의 뜻과 예수님의 명령에 순종하는 것에 몸부림치고 있는가? 솔직히 말해서, 하나님의 뜻에 대해 관심도 없는 교회가 널려 있다. 그들이 가장 많이 하는 것은 헌금이 들어오는 예배의식에 참석하라는 것과, 전도라는 이름하에 수단방법을 가리지 않고 헌금을 내는 교인 수를 늘리는 것이다. 그 이외에는 별다른 관심조차 없다. 그러므로 당신이 다니는 교회의 담임목사가 어떻게 가르치든 간에, 당신이 하나님의 모든 명령을 지켜 행하지 않는다면 당신이 고단하고 팍팍한 삶에서 벗어날 길은 요원해 보인다.
그러나 이 칼럼을 읽는 독자 중에는 성경에서 말하는 하나님의 명령을 지키려고 몸부림치며 애쓰는 사람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여전히 삶은 고단하고 인생은 팍팍하기 그지없다. 전지전능하신 하나님을 믿고, 믿음의 약속대로 축복해주시는 공의의 하나님을 철썩 같이 믿고 있다고 말이다. 오홋, 그런가? 그렇다면 당신이 믿는다는 근거가 무엇인가? 1분짜리 영접기도를 마치고 교회에 나와서, 오랫동안 담임목사가 요구하는 각종 희생적인 신앙행위를 하고 있다는 것으로 증거를 삼을 것이다. 그러나 이런 믿음의 잣대는 성경적이 아니다. 당신이 믿는다고 확신하는 것은, 자신의 생각을 근거로 삼는 것이 아닌가? 그러나 성경에는 그런 말이 없다.
이와 같이 집사들도 정중하고 일구이언을 하지 아니하고 술에 인박히지 아니하고 더러운 이를 탐하지 아니하고 깨끗한 양심에 믿음의 비밀을 가진 자라야 할지니(딤3:8,9)
당신이 믿는다고 확신하는 생각이 성경적인 믿음이라면, 위의 구절에서 말하는 믿음의 비밀에 대해 설명해보시라. 아니 예수를 믿는다고 생각하는 잣대에 무슨 비밀이 필요한가? 누구나 알고 있는 내용이 아니가? 비밀의 정의는 대다수의 사람들은 알지 못하고, 극히 소수의 사람들만이 극비리에 알고 있는 내용이다. 그렇다면 우리네 교인들이 알고 있는 믿음이 무슨 비밀이라고 말할 수 있는가? 믿음의 비밀은 자신이 믿는다고 확신하는 근거가 영접기도나 희생적인 신앙행위로 재는 게 아니라, 믿음의 능력이 드러나는 사람들을 말하고 있다.
온갖 좋은 은사와 온전한 선물이 다 위로부터 빛들의 아버지께로부터 내려오나니 그는 변함도 없으시고 회전하는 그림자도 없으시니라(약1:17)
찬송하리로다 하나님 곧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아버지께서 그리스도 안에서 하늘에 속한 모든 신령한 복을 우리에게 주시되(엡1:3)
믿음은 하늘에 계신 하나님이 주어지는 것인가 아니면 사람들이 자신의 생각이나 의지, 혹은 능력으로 얻어지는 것인가? 믿음뿐 아니라, 사랑이나 지혜 혹은 지식 등은 죄다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자녀들에게 주시는 것이다. 그러나 기이하게도 우리네 교회에서는 믿음을 스스로 얻어질 수 있다고 생각하고 있다. 그래서 자신이 믿는다고 생각하면 그게 성경적인 믿음으로 착각하고 있다. 그러나 믿음은 하나님이 주시는 선물이지, 인간적인 생각이나 능력으로 얻어지는 게 아니다.
주께서 이르시되 너희에게 겨자씨 한 알만한 믿음이 있었더라면 이 뽕나무더러 뿌리가 뽑혀 바다에 심기어라 하였을 것이요 그것이 너희에게 순종하였으리라(눅17:6)
너희가 기도할 때에 무엇이든지 믿고 구하는 것은 다 받으리라 하시니라(마21:22)
믿는 자들에게는 이런 표적이 따르리니 곧 그들이 내 이름으로 귀신을 쫓아내며 새 방언을 말하며 뱀을 집어올리며 무슨 독을 마실지라도 해를 받지 아니하며 병든 사람에게 손을 얹은즉 나으리라 하시더라(막16:17,18)
성경에서 말하는 믿음은 죄다 하나님이 주시는 것이다. 그래서 하나님이 인정해주시는 믿음은 죄다 기적이 일어나서 귀신이 쫓겨나고 고질병이 낫고 불구가 회복되는 놀라운 일이 생겨났다. 어디 그뿐인가? 그러한 믿음은 언제나 기도응답이 내려오고 기적이 동반된다. 그러나 자신들은 천국에 들어가는 믿음이 있다고 여기는 수많은 크리스천들이 무능하고 무기력하다. 즉 하나님의 능력으로 증명하지 못하는 믿음은 성경적인 믿음이 아니라 자의적인 착각일 뿐이다. 그래서 하나님의 능력이 드러나는 믿음의 소유자가 비로소 믿음의 비밀을 가진 사람이다. 그래서 당신은 믿음의 비밀이 있는가? 없다면 하나님과 아무런 상관이 없는 사람이다. 그렇다면 천국은 꿈도 꾸지 마시라. 또한 건조하고 냉랭한 영혼으로 이 땅에서 고단하고 팍팍하게 사는 게 지극히 당연한 일이다.
'━━ Joyful자료실 ━━ > 신상래목사' 카테고리의 다른 글
어둠의 영에 눌려 있는 가정은 예외없이 불행하다. (0) | 2019.01.29 |
---|---|
불행을 끊어내지 않으면 지옥으로 이어진다 (0) | 2019.01.28 |
천국이 좁은 문임을 실감하지 못하는 우리네 교회 (0) | 2019.01.26 |
이단의 행태를 분별하는 잣대 (0) | 2019.01.24 |
하나님을 부르는 기도로 바뀐 필자의 인생 (0) | 2019.01.23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