뉴에이지 운동의 음악들. - 곽용화
데이비드 란쯔(David Lanz)의
'지평선에서의 불춤' (The Skyline Firedance)을 중심으로
오케스트라 편곡과 피아노 솔로로 구분되어진 이 앨범은
데이비드 란쯔가 신봉하는 뉴에이지 운동의 사상으로 가득차 있다.
그는 앞으로 십년 내에 이 지구의 모든 인간들이 엄청난 변화에
직면하게 된다고 말하면서 이 변화를 통과하기 위해서는 모든 인간들이
오케스트라처럼 하나가 되어야 한다고 말한다.
데이비드 란쯔가 십년이라는 표현을 쓴 이유는 이천년을 십년 앞둔 시점부터
인간에게는 새로운 변혁이 일어나고 새로운 각성의 움직임이 일어난다는
뉴에이지 운동의 이론 때문이다.
그리고 여기서 말하는 변화라는 것은 새로운 시대를 향한 변화이며
유한한 인간이 무한한 존재가 되어 사는 시대를 의미 한다.
이 앨범의 제목을 살펴보면 겉보기에는 일출부터 일몰의 과정을
묘사하고 있는 것처럼 보이지만 사실은 인간이 마음 속에 있는
신의 본질을 찾는 과정을 그리고 있다.
이 앨범 중 '지평선에서의 불춤 모음'(The Skyline Firedance Suite)이라는
곡을 통해 데이비드 란쯔는 사람들이 자신이 신(God)이라는 사실을 깨닫는
자아각성(introspec-pion)과 신비(mysticism)를 탄생시키는 두번째 태양이 있는
자신의 내면세계로 들어 가도록 도움을 받을 것이라고 말한다.
그리고 이것을 위해서 자신이 '고귀한 검은 짐승'(noble dark beast)이라고 부르는
피아노를 사용해서 음악을 만든다고 말한다.
데이비드 란쯔가 인간의 마음 속에 신의 본질이 있다고 말하는 것은
그가 뉴에이지 사상에 빠져있음을 잘 설명해 준다.
뉴에이지 운동에서는 인간이 내면 속에 신의 본질을 가지고 있는데
인간은 이 사실을 망각하고 있다고 말한다.
그러면서 여러가지 수행방법(요가, 기,단,선 ,마인드 콘트롤,초월명상등)을 통해
내면에 있는 신의 본질을 발견하여 유한한 인간이 무한한 신으로 진화한다고 주장한다
데이비드 란쯔의 앨범은 반기독교적인 내용으로 가득차 있는데
그 중 세 가지를 지적하면 다음과 같다
첫째는, 기독교의 유일신론을 반대하고 거짓신들을 친근한 이미지로 묘사한다.
이 앨범에는 사단의 무리들인 화신과 반인반수의 판신을
마치 인간의 친구처럼 묘사하고 있다
이러한 거짓신들이 인간과 교통하며 인간의 삶에
긍정적인 영향을 준다고 주장하는 것이다.
'베수비오' (Vesuvius)에서는 전기기타를 사용한 하드 록 사운드를 배경으로
휘몰아치는 불길 속에서 영흔들이 집단으로 추는 춤을 느끼게 하며
불의 신이 그 춤을 주관하는 것처럼 묘사한다.
'판의 장난' (Escapades of pan)에서는 팬 플룬의 연주로 반인반수인
판과 함께 들판을 가로지르며 즐기는 상상에 빠지게 한다.
이처럼 거짓신들을 친근하게 묘사하고 인간에게 유익을 주는 신들로 묘사를 하는데
성경은 이러한 행위를 절대적으로 금지하고 있다.
하나님은 "나 외에는 다른 신들을 네게 있게 말찌니라"(출 20.3)고
단호하게 말씀하신다.
그리고 그 한 예로 모세가 산에서 하나님과 대화하면서 여러가지 지시를 받는 동안
기다리다 지친 이스라엘 백성들이 금송아지를 만들어 경배하며
그 주위를 춤을 추고 돌면서 노래를 불렀는데 얼마나 그 행위가 요란하였는지
마치 싸우는 소리 같을 정도로(출 32: 17) 요란법석을 떨었을 때
하나님은 모세로 하여금 그 금송아지를 부수어 가루를 만들어 이스라엘 백성들이
마시게 한 후 레위자손을 통해 삼천명을 도륙하도록 하시었다.(출32장)
이만큼 하나님은 하나님외에 거짓신들을 숭배하는 것을 금하셨고
구약성경을 통해 이러한 행위를 영적음란이라고 표현하실 정도였다
요즘 온갖 형태의 귀신들이 친한 친구처럼 묘사하는 뉴에이지 운동의
영화나 만화들이 범람하고 있는데 이것 또한 우리로 하여금
영적인 음란을 저지르도록 만들고 있는 것이다
둘째는, 인간의 완전성에 대한 강한 믿음이다.
성경은 인간이 하나님의 피조물이며(창2:7) 죄로 인해
불완전한 존재(롬 3:23)라고 말한다.
인간은 결코 무한한 존재인 신이 아니다.
그리고 내부에 신이 될 수 있는 본질을 가지고 있지도 않다.
인간은 죄로 인해 하나님과 멀어졌으며 예수 그리스도의 사랑과 희생으로 인해
다시 하나님과 관계가 회복된 나약하고 미천한 존재인 것이다.
그러나 뉴에이지 운동은 인간이 완전한 존재라고 하며
인간이 스스로를 구원할 수 있다고 주장한다.
어떻게 인간이 스스로를 구원할 수 있겠는가?
죽음조차 극복하지 못하는 인간이 스스로의 영혼을 구원한다는 말은
엄청난 거짓말에 불과한 것이다.
인간은 결코 스스로를 구원하는 것이 아니라 구원을 받을 수 있는데
그것은 오직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만(요3'16)가능하다.
예수 그리스도 외에는 구원이 있을 수 없는 것이다.
그런데 데이비드 란쯔는 내면세계에 들어가 자신이 신이라는 것을 깨닫는
자아각성과 신비를 탄생시키는 두번째 태양을 보라고 유혹한다.
데이비드 란쯔는 인간의 내면에 태양이 또하나 있는데 그 존재가 바로
인간 스스로 무한한 존재라는 것을 깨닫도록 도와주는 역할을 한다고 믿는 것이다.
이 얼마나 우매한가?
셋째는, 하나님이 주관하시는 질서에 대한 도전이다. 데이비드 란쯔가
'크리스토포리의 꿈' (Christofori's Dream)이라는 앨범에서
프로콜 하룸 (Procol Harum)의 '창백한 하얀 그림자' (A White Shade of Pale)를
편곡했던 것처럼 이 앨범에서는 무디 블루스 (Moody Blues)의
'하얀 비단에 쌓인 밤' (Night in White Satin)을 편곡해서 연주한다.
이 두 곡은 모두 프로그레시브 록이다.
프로그레시브 록은 여러 가지 면에서 기독교적인 요소를 발견할 수 없고
더구나 초현실주의적인 내용의 곡이 많기 때문에 기독교인들이 듣기에는
좋지않은 음악장르다.
더구나 피카소가 사람의 형상을 비대칭적으로 그림으로 하나님의 질서에
대항했던 것처럼 프로그레시브록도 비정상적인 모습을 지니고 있다.
데이비드 란쯔는 `하얀 비단에 쌓인 밤`이 사랑과 희망의 노래라고 하면서
육십년대 이상주의를 나타내고 있다고 말한다.
육십년대의 이상주의는 사단의 연출아래 마약과 히피에 의해 주도되었고,
인도의 구루들과 힌두교 사상에 의해 각색된 반기독교적인 평화의 시대를 의미한다.
그리고 이러한 이상주의는 지금 뉴에이지 운동가들이 기독교가 방해하고 있다고
주장하는 뉴에이지의 유토피아를 의미한다.
어떤 사람들은 뉴에이지 음악에 왜 그렇게 큰 의미를 두느냐고 말하면서
그냥 가볍게 들으면서 스트레스를 해소하면 되지 않느냐고 말한다.
그러나 뉴에이지 음악은 듣는 사람으로 하여금
뉴에이지의 명상에 빠지게 만들며 반기독교적인 사상을 세뇌시킨다.
그래서 이음악에 깊이 심취한 사람들은 여러 가지 영적인
부작용을 경험하게 되며 하나님으로부터 멀어지게 된다.
만일 뉴에이지 음악을 들으면서 처음에 편안함과 안식을 느낀다면
그것은 절망으로 들어가기 위한 서곡에 해당된다는 사실을 기억해야만 한다.
계속해서 깊이 빠지게 되면 고통스러운 기억들이 되살아며
염세주의와 허무를 느끼고 우울해지는 경험을 하게 된다.
필자는 수많은 상담을 통해 뉴에지지 음악을 통해
이러한 고통을 경험하는 사람들을 만나고 있다.
스트레스가 쌓이고 근심과 걱정이 있을 때 찬송가를 듣는 것이 좋다.
왜냐하면 뉴에이지 음악을 포함한 일반 대중음악들은 인간의 문제에 대한
해답이 없지만 찬송가는 예수 그리스도라는 절대적인 해답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데이비드 란쯔와 같은 뉴에이지음악이나 대중음악 보다는
교회음악이 정서생활이나 정신건강 등 여러 가지 면에서 도움이 된다는 사실을
다시 한번 강조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