멸망의 주범, 영적 교만에서 벗어나려면...
영적 교만은 자기 자신의 죄를 보지 못한다는 것입니다.
자기 자신의 타락한 상태에 대한 인식이 없이 다른 존재를 올바로 본다는 것은 불가능한 일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은혜의 기쁨을 체험하면 자신의 죄에 대해 절망적인 슬픔을 느낍니다.
이러한 현상은 흔히 빛에 비추어진 물이 든 잔에 비교합니다.
해가 비치게 되면 해가 비치지 않을 때 보이지 않던 불순물이 드러나기 때문입니다.
잔에 담겨 있는 물이 해가 비치지 않을 때는 깨끗하게 보이지만,
해가 비치게 되면 먼지가 가득함을 드러내게 됩니다.
우리 영혼도 하나님을 만나는 체험을 하기 전에는
하나님을 노엽게 하지 않기 위하여 조심하고 있는 것처럼 생각이 듭니다.
그러나...
이 단계에 이르게 되면 밝은 태양이 그것을 비추어 무수히 많은 불순물들을 보게 하는 것입니다.
성경은 우리가 하나님과 믿음에 대해 꽤나 알고 있다고 생각하는 것을 경고하고 있습니다.
"스스로 지혜롭다 하며 스스로 명철하다 하는 자들은 화 있을진저" (이사야 5장 21절)
"스스로 지혜롭게 여기지 말지어다 여호와를 경외하며 악을 떠날지어다" (잠언 3장 7절)
새벽기도 매일 나가는 것은 좋으나 누가 오늘 새벽기도에 나왔나 안 나왔나
누가 나처럼 꾸준하게 나오나 확인하려 한다거나 그것으로 그 사람의 믿음을 잣대삼아 판단하지 마십시오.
이는 영적으로 교만한 현상입니다.
저마다 사정이 있는 것이고 집에서도 더 열심히 기도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새벽기도는 나와 주님과 거룩한 소통을 위해 나오는 것이지
새벽기도 누가 나왔나 점검하러 오는 것이 아닙니다.
40일간의 장기간의 금식기도에 성공한 목회자들이 명함에다가 어디 기도원에서
40일 금식기도 통과했다고 기재하는 것 이런 경우는 차라리 금식기도 안 하느니만 못합니다.
금식기도는 자랑의 대상이 아니고, 애통함과 겸손의 대상입니다.
매일 기도 몇 시간, 일주일에 가족 예배 몇 번, 성경 완독 몇 번....
이렇게 하는 것은 좋으나, 이만하면 나는 믿음이 좋다고 판단하면 영적 교만입니다.
숫자관리 하지 말고 '나는 죄인입니다' 하면서 주님의 은혜를 구하는 것이 겸손하고 귀한 것입니다.
숫자 채우려고 하다 보면 율법이 되고 교만이 됩니다.
교회에서 목사라는 이유로, 장로라는 이유로, 권사라는 이유로
사랑이 담긴 권면이 아닌, 직위를 내세워 훈계하는 것은 대단히 악한 교만입니다.
형제자매는 훈계의 대상이 아니라 사랑과 기도와 권면의 대상입니다.
이웃을 위해 뭔가 좋은 행실을 하고 뿌듯해하지 마십시오.
그것은 뿌듯해 할 것이 아니라,
주님을 섬기는 성도로써 당연히 이웃에게도 해야 할 바이고, 일상일 뿐입니다.
그리고 그것을 잊어야 합니다.
머릿속에 오래 저장되어 있다면 내 의로 행한 교만한 것입니다.
믿음의 좋은 행실은 내 기억 속에 저장되는 게 아니라, 천국에 기록되어야 정상입니다.
겸손한 사람은 나중에 천국에 갔을 때 이와 같은 사실을 기억 못 해서
주님께서 알려주셨을 때 비로소 기억나야 합니다.
영적으로 교만한 지식 믿음인들에게 흔히 나타나는 현상이 있습니다.
남들이 나를 알아줬으면 하는 기대감으로 여러 수단을 이용하여 자신에 대하여 나타내길 즐겨합니다.
성경 말씀을 가지고 겸손히 나에게 적용하기보다는 남에게 적용하여 정죄하고 지적하길 좋아합니다.
성경 구절을 진리 논쟁의 명분 삼아서 상대를 타박하는 지식대결의 도구로 사용합니다.
내 눈의 들보보다, 남의 눈 속에 있는 티에만 관심을 나타냅니다.
이렇듯 거듭나지 못한 육적 속성이 여실히 드러납니다.
이는 그가 영적인 믿음이 아니라, 영적으로 교만한 육적 지식 믿음이라는 증거입니다.
"저는 교만하여 아무것도 알지 못하고(안다고 착각하여)변론과 언쟁을 좋아하는 자니
이로써 투기와 분쟁과 훼방과 악한 생각이 나며 마음이 부패하여지고 진리를 잃어 버려 경건을
이익(내 지식자랑)의 방도로 생각하는 자들의 다툼이 일어나느니라" (디모데전서 6장 4-5절)
지식 믿음은 믿음이 아닙니다.
그것은 믿음의 그림자이자 허상일 뿐입니다.
그저 문서적 지식으로만 많이 알면 거듭난 줄 착각하는 것입니다.
세상 난리와 소문, 어떤 현상을 많이 알면 자신은 깨인 줄 알고,
나는 이 정도인데 너는 왜 그 정도밖에 안 되느냐고 하면서 정신 차리라고 지적합니다.
나는 깨어있는데 너는 왜 잠자냐고 타박합니다.
머리로 정보를 아는 것이 대단히 큰 믿음인 줄 알고 자만에 빠진 영적 교만입니다.
기억하십시오.
세상 난리 소문 몰라도 성령으로 거듭난 사람이 있습니다.
깨인 것은 세상 정보를 많이 아는 것이 아니라,영적으로 거듭난 겸손한 자임을 아셔야 합니다.
이런 교만한 모습들은 예수님을 모신 것이 아니라, 예수님을 나타낸 지식만 감정에 의지하여 모신 것입니다.
이런 영적 교만은 돌이키지 않으면 언젠가 자신을 치는 강력한 부메랑이 되어 돌아올 것입니다.
아무리 성경을 많이 읽고 연구를 하고 신학박사가 되었다고 해도,
사람의 능력은 한계가 있고 부족할 수밖에 없습니다.
겸손한 성도님이라면 성경을 읽으면 읽을수록 자신이 부족하다는 것을 알고 더더욱 겸손하게 됩니다.
항상 배우나 끝내 진리의 지식에 이를 수 없느니라 (디모데후서 3장 7절)
나는 성경을 이 정도 아는데... 라고 생각하고 있다면
믿음이 좋다고 착각하는 교만한 지식 교인이라는 반증입니다.
성령께서 함께하신다면 결코 그렇게 생각할 리가 없습니다.
이런 현상은 거듭나지 않으면 전혀 발견할 길이 없습니다.
저 역시 그랬던 시절이 있었습니다.
지금 되돌아보면 얼마나 낮 뜨겁고 부끄러운지 모릅니다.
영적 교만은 구원의 문제에 지대한 악영향을 끼칩니다.
구원을 원한다면 이 문제는 반드시 해결해야 합니다.
마귀는 끊임없이 하나님이 아닌 내가 중심이 되어 뭔가를 하게 부추기고,
인본주의적 사고방식으로 끌어냅니다.
영적 교만은 주님을 내 안에 인격적으로 모시지 않고 내가 주인이기에 나타나는 악한 현상입니다.
그러나, 주님께서 임재하셔서 성령으로 거듭나면
성령의 비취심으로 말미암아 나의 더러운 모든 것이 드러납니다.
나의 더러운 죄가 너무나 상세하게 보이기 시작합니다.
남에 대한 문제가 아니라, 나 자신에 대한 문제임을 뚜렷하게 알게 됩니다.
그때서야 가슴을 치며 "나는 죄인이로소이다" 라는 이 소리가
저절로 내 입을 열어 뜨거운 눈물과 함께 고백하게 됩니다.
이것이 영적 교만에서 탈출하여 내 눈에 티를 빼는 것입니다.
그때부터 남을 향하던 교만한 나의 육적 시선이 나를 향하는 영적 시선이 되어 진정한 겸손이 자리 잡습니다.
세상의 방법으로 영적 교만에서 벗어나는 길은 없습니다.
강력한 회개의 영이 임하여 통회 하면서 성령님의 임재를 구하는 것 외에는 그 어떤 방법도 없습니다.
마귀가 장악한 세상의 영적 어둠 속에서는 세상의 그 어떤 것을 동원해도 내 모습이 어떤지 보이지 않습니다.
오직 성령님의 비취심만이 나 자신을 똑바로 보게 하는 역사가 있는 것입니다.
나 자신의 본 모습을 확인하는 것이 이렇게 어렵습니다.
강력한 회개의 영이 임하게 해달라고 구하십시오.
성령님의 임재를 구하십시오.
영적 교만에서 벗어나는 길은 그것 외에는 없습니다.
모두 성령님이 함께하시는 성도님들 되시길 권면 드립니다.
'━━ 보관 자료 ━━ > 초돌사에서' 카테고리의 다른 글
거짓 환상과 예언이 계속 생기는 현상에 대하여... (0) | 2018.08.13 |
---|---|
주님 다시 오실 때, 내 믿음이 참인지 거짓인지 증명될 것입니다. (0) | 2018.08.12 |
나의 마음은 마귀의 소굴인가, 주님의 성전인가... (0) | 2018.08.10 |
교리가 구원과 휴거를 결정하지 않습니다. (0) | 2018.08.08 |
성경 말씀을 생명으로 받는 방법 (중요) (0) | 2018.08.07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