줄거리 :
어느 겨울날, 베를린에 내려온 두 천사(다미엘과 가서엘)가 인간 세계의 여러 면을 두루 살펴보는 줄거리와 2차대전 직후(45년) 독일 출신 미국인이 형사 콜롬보를 유명한 피터 포크를 형사(사설탐정)로 채용하여 자기 동생의 자식을 찾으러 보내는 내용의 영화를 베를린에서 실제 촬영하는 두 스토리가 하나로 용해되어 진행된다. 그 위에 인간의 모습이 천사에 가장 가까웠던 어린 시절의 특징을 천사 다니엘의 내면의 소리로 간간히 들려줌으로써 이 영화의 주제를 강조하는가 하면, 각기 맡은 구역의 인간 세계를 돌아본 두 천사가 다시 만날 때는 지구의 역사를 훑어보기도 하고, 서구의 불멸의 서사시인 호메로스를 등장시켜, 세상이 변화된 모습에 대한 회한을 드러내는 가운데 인간들이 이야기를 잃어버렸음을 애석하게 여기고 있다.
뿐만 아니라 형사 피터 포크는 눈에 보이지 않는 천사의 존재를 느끼고 있다는 설정과 더불어 천사 다니엘이 어느 날 서커스단의 여자 공중곡예사 마리온이 겪는 고독과 인생살이와 실직에 대한 두려움, 예인의 길의 어려움 등을 내면 깊이 들여다보게 함으로써, 다니엘이 천사의 직분을 버리고 인간화하는 계기를 만들고 있다. 그리하여 다니엘은 카시엘의 경고와 만류에도 불구하고 외로운 여인 마리온의 반려가 되고 자신의 존재를 알아본 피터 포크의 촬영현장으로 찾아가 도움을 받는 한편, 그 역시 전에는 천사였다는 사실과 인간화된 천사가 적지 않음을 알게 된다. 결국 카시엘은 천사의 직분을 다하고 다시 승천하게 되나 다니엘은 한 여인의 남자로 남게 되고, 인류의 영원한 이야기꾼이요 노래꾼인 호메로스는 인간들이 자신을 다시 찾아줄 날을 기대하며 지상을 떠난다. (작성 홍성진)
해설: 제발 좀 들어줄래
“아이가 아이였을 때, 놀이에 열중했다.” (영화 <베를린 천사의 시> 중)
유년기는 인간에게 꿈과도 같은 시기이다. 유아는 세상과의 합일감과 감각의 자유로운 표출 속에서 살아간다. 그러나 모든 인간은 성장하고, 유아에서 성인이 됨에 따라 자신이 자신의 의도와 상관없이 세상에 내 던져져 죽음을 향하는 생명이라는 사실을 자각하게 된다. 또한 모든 감각의 일회성을 깨달을 때 인간은 생이라는 과업의 무게를 느끼기 시작한다.
우리가 겪는 모든 사건과 그에서 비롯되는 기쁨과 슬픔은 순간으로밖에 존재하지 않는다. 시공간 앞에서의 인간의 무력함은 고대 동굴 벽화 등의 유물에서 볼 수 있듯이 오래 전부터 영원을 갈망하는 인간을 만들어냈다. 한 현상에 불과할 지도 모르는 삶을 초월하려는 염원과 고독 속에서 인간은 예술과 철학을 창조한 것이다. 반면 <파리, 텍사스>, <부에나비스타소셜클럽>으로 알려진 빔 벤더스 감독의 <베를린 천사의 시>에 등장하는 두 천사에게 시간은 일회적인 것이 아니다. 그들은 마치 유아기의 우리들처럼 시공간의 유한성을 알지 못하고 있다. 그들은 방대한 천상에서 날개를 펄럭이는 모습과도같이 한없는 자유와 영원을 가지고 있는 것이다.
영화의 무대가 되는 베를린은 동서의 분단과 더불어 미국문화의 급속한 유입과 신구문화의 혼재로 보는 이에게 시종일관 공허와 불안을 느끼게 한다. 그러한 혼돈의 베를린을 빔 벤더스 감독은 천사의 시각인 흑백 화면을 통해 유보적으로 바라보고 있으며, 가끔 나타나는 인간의 컬러 세계는 상당히 자극적인 원색으로 이루어져 인간적인 생동감을 보여준다.
천사는 흑백 화면과 저음의 현악기 연주를 장치로 다양한 인간을 보여준다. 폐허가 된 포츠담 광장에서 과거와 현재를 혼동하고 인간에 대한 회의를 계속하는 노인과 자신신의 처지를 고민하고 슬퍼하는 마리온과는 달리, 놀이와 서커스에 열중하는 어린이들은 걱정이 없으며 심지어 천사를 발견하고 그와 대화하기도 한다. 자신의 선택(천사직 포기)에 몹시 만족한 듯 보이는 전직 천사는 다미엘에게 커피와 담배를 권하며 영화 <커피와 담배>에 나오는 수많은 커담 찬양론자들의 모습을 상기시킨다. 어떤 이는 고뇌 속에서 삶의 의미를 발견하지만 다른 이는 결국 자살을 택하고, 또 다른 이들은 고된 일상을 마무리하며 시끄러운 록음악에 몸을 내맡기기도 한다. 어린이들을 제외한 모든 인간은 의식 혹은 무의식중에 죽음을 갈망하지만 그만큼 큰 삶에의 집착을 저버리지 못하고 도 다시 삶으로 되돌아가는 매일을 되풀이하고 있는 것이다.
문명 이전에 자연과 짐승들로부터 몸을 지켜야 했던 인간은 현재까지도 일하지 않으면 생존할 수 없고, 타인과의 완전한 소통을 꿈꾸지만 그 불가능에 좌절하여 자신 속으로 파고 들기도 한다. 인간은 결국 혼자 태어나 혼자 죽어야 하는, 철저히 외로운 존재인 것이다. 그렇다면 모두가 자살을 택하지 않고 인류를 지속시키는 삶의 불가항적인 매력은 무엇인가?
심장의 박동과 바다의 냄새, 태양의 눈부심과 열매의 달콤함, 머리칼을 흔드는 바람과 외계와의 순간적인 합일은 인간을 다시 한 번 대지에 발 딛게 하는 원동력이 된다. 한 인간은 먹고, 자고, 사랑하고, 좌절하지만 춤추고 노래하고 또 다시 ‘고도를 기다리며’ 죽어가는 존재인 것이다. 비록 어떠한 예술도 신적인 영원을 창조할 수 없다 하더라도, 그토록 순간적이고 소진적인 삶은 모든 인간의 가장 강력한 본능이다. 시지포스에게 주어진 완전히 비생산적인 과제는 포기하기에는 너무도 매력적인 우리의 삶을 상징하는지도 모르겠다.
결국 천사 다미엘은 인간의 세계로 뛰어든다. 붉고 뜨거운 자신의 피를 맛보고, 저물어 가는 해를 느낀다. 물건을 팔아서 알록달록한 옷을 사 입고, 거리를 달리며 바람에 몸을 싣는다. 그는 클럽에서 춤추고 있는 마리온을 만나 그녀의 붉은 입술과 어깨 곡선의 매력을 느끼고, 두 사람은 키스를 나눈다. 다미엘은 삶의 매혹과 비견될 그녀와의 사랑을 “단 한 번의 영원이지만 계속 그 속에서 살아갈 것”이 표현하고 영화는 막을 내린다. 그리고 130분간의 흑백 필름은 우리에게 마지막 질문을 던진다. 과연 신기루 같은 인생은 천사에게 영원을 포기하게 할 만큼의 가치가 있는 것일까? (작성: 라쥬망)
해설 : 인간을 사랑한 한 천사의 여정
지구 위에 서서는 지구가 둥글다는 걸 느낄 수 없듯이 자신이 선 자리에서만 진리를 구한다는 건 무모한 짓일지도 모른다. 그래서 이런 사실을 느끼는 순간 인간은 진리를 찾기 위해 길을 떠나곤 했다.
오래 전 성현들이 고행(苦行) 그 자체가 진리를 얻는 길이라고 했던 것처럼 많은 이들이 자신들의 정체성을 확인하고 구원을 얻고자 길을 떠났다. 아마도 출발과 다다름 그 사이의 모든 것이 답이고 진리이고, 여행은 존재에 대한 회피라기보단 ‘도전’일 것이다.
영화인들에게도 ‘존재 속에 숨쉬는 갈망’을 ‘길’과 ‘길을 따라 가는 여행’ 속에서 풀어 보려는 노력이 계속되어 왔다. 고대 신화 속의 숨가쁜 여정들은 1940~50년대 흔했던 모험활극 영화에서 펼쳐지고 이후 ‘길’과 ‘여행’은 작품의 보조적인 소재가 아니라 그 자체가 이야기되는 ‘길’의 시대가 도래하여 ‘로드 무비(Road Movie)’라는 새로운 영화 장르가 형성된다. 독일의 거장 빔 벤더스는 꾸준히 ‘길 위에서’ 인간의 문제를 탐구해온 로드 무비의 대표적인 주자이다.
길 위에서 인간을 탐구하는 로드 무비
1987년 작 <베를린 천사의 시>는 우리나라에서도 많은 관심을 끌었던 빔 벤더스의 대표작이다. 한 천사의 천상에서 인간 세계로의 여정을 담아낸 이 영화의 원제는 ‘베를린의 하늘(Der Himmel Ueber Berlin)’이며, 그 ‘하늘’은 구원에 대한 ‘희망’을 의미한다.
줄거리는 이렇다. 천사 다미엘과 카시엘은 베를린의 하늘에서 사람들을 살펴보고 기록하는 임무가 있었다. 다미엘은 그렇게 베를린 시민들 사이에서, 때론 그들의 마음도 어루만지며 그냥 존재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러던 어느 날 다미엘은 서커스에서 가짜 날개를 달고 공중곡예를 하는 여인을 발견하곤 깊은 연민과 사랑을 시작한다. 이 여인은 또 다른 의미에서의 ‘천사’같은 인간 마리온이었다. 천사 다미엘은 천사였다가 인간으로 환생한 영화배우 피터 포크를 만나게 되고, 결국 다미엘은 천사로서의 생명을 끝내고 한 인간으로서 마리온을 찾아간다.
이 영화는 독일의 수도이자 분단의 상징이었던 ‘베를린’을 빼놓고는 얘기할 수 없다. 감독 빔 벤더스가 바로 머리 위 베를린 하늘에 구원을 바라는 침묵의 기도를 보내듯 천사 다미엘 역시 그 하늘에서 이 음습한 잿빛 도시를 사랑했다.
영화 속의 그 우울함과 그늘은 빔 벤더스 감독에게도, 천사 다미엘에게도 헤어나기 힘든 굴레인 것만 같다. 신은 베를린 하늘의 천사들이 수차례의 사악한 전쟁을 막지 못한 이유로 그들을 불신한다. 독일인들은 신이 그들의 조국을 얼마나 미워하는지 두렵다. 베를린 하늘을 배경으로 다미엘이 올라서 있던 ‘승리의 여신상’은 독일의 많은 전쟁을 기리는 ‘전승기념탑’이었다.
수차례의 전쟁과 2차대전의 패배가 개개인에게 준 현실적인 고통은 심각했다. ‘천사’인 다미엘이 고통받는 베를린 시민을 어루만질 때 그것은 그저 아무도 듣지 못하는 무의미한 독백에 지나지 않았다. 그래서 그는 ‘인간’이 되어 그들 속으로 들어가기로 결심했던 것이다. 이처럼 진심을 드러내고 진정한 위로를 주기 위해선 희생이 필요하다. 인간을 사랑하기 위해 천사가 불멸도 버리는데 인간이 인간을 해치고 죽이는 것에는 과연 어떤 명분이 있겠는가.
천사이기를 저버리고 인간이 된 다미엘이 패전의 상흔 같은 베를린 장벽을 따라 걷는 것은 그가 앞으로 ‘인간’으로서 가야 할 길을 보여주는 것이리라.
불멸을 포기하게 한 인간애
<베를린 천사의 시>는 베를린이라는 도시 자체를 드라마로 느껴지게 한다. 젊은 시절 빔 벤더스 감독은 로드 무비만 찍는 감독으로 알려질 만큼 그는 여행자와 길, 여정, 도착지와 출발지 그 자체를 영화 속에 담아냈다.
이 영화에선 천사의 발걸음(?)을 따라 베를린이란 도시와 그 속에서 이리저리 흔들리는 베를린 시민들을 그렸다. 통일 전의 베를린은 독일국민에게 그리 편한 장소가 아니었고, 감독에게도 심각한 고민이 담겨 있는 곳이었을 것이다. 군국주의, 나치, 전쟁, 분단, 이념대립 등등.
감독은 시공을 초월한 천사가 그 초월성을 포기하고 인간 세계에 구속되면서 베를린을 해방하는 모습을 그리고 싶어했던 것 같다. 안주할 수 있는 세계에서 벗어나 다른 사람들을 만나고 사랑하는 과정, 그것이 바로 ‘구원’에 이르는 길임을 말하고 싶었던 것 아닐까.
감독은 이 영화에서 ‘나’ 아닌 다른 사람, 더 나아가 인류에 대한 사랑을 구현하는 과정으로서의 ‘여행’을 그리고 있는 것이다. 현재의 베를린은 영화 속과 또 다른 모습을 하고 있다. ‘브란데부르크 문’은 프러시아 군국주의 시대의 개선문이었고, 독일 통일 후 지금은 동서 화합의 문으로 다시 태어났다. 좀 억지스럽긴 해도 말이다.
과거를 극복하고 진보하는 베를린
이런 독일 역사의 상징인 베를린은 문명화된 문화 도시로서의 의미도 지니고 있다. 국립박물관, 독일역사 박물관, 페르가본 박물관, 보데미술관 등 그 다종다양한 독일 역사의 ‘실재(實在)’를 품고 있다.
또 현대의 역동성 역시 같은 곳에서 숨쉰다. 포츠담 광장을 중심으로 우람한 소니 센터를 비롯해 시네마 쿠프, 비즈니스 센터, 그리고 메르세데스 센터 등의 현대적 문명이 함께 어울린다. 빔 벤더스 감독이 <베를린 천사의 시>에서 표현한 베를린을 어떻게 받아들이던 현재는 또 다른 진보와 발전의 그림을 확실히 그려내고 있는 것이다.
영화 속에서 나오던 기차역과 다리 등 많은 장소가 사라지고 현대적인 건물이 들어선 걸 가지고 ‘옛날이 좋았다’고 운운하는 건 감상이다. 이곳의 현대화가 인간의 욕심이 만들어낸 결과이긴 하지만 그걸 마땅치 않게 보는 건 ‘보는 이’의 더 못난 욕심이 아닐까. 어쨌든 천사 다미엘이 안타까이 바라보던 그 때에 비해 발전된 희망의 모습을 보이고 있는 것이다.
분단의 장벽을 허물고 통일의 성지(聖地)가 된 베를린의 하늘 아래에서 인간 다미엘은 또 어떤 구원을 꿈꾸며 기나긴 여행을 계속하고 있을까……. (작성: cheese02)
아래는 영화에 나오는 시의 전문
Peter Handke
아이가 아이였을 때
팔을 휘저으며 다녔다
시냇물은 하천이 되고
하천은 강이 되고
강도 바다가 된다고 생각했다
아이였을 때 자신이 아이라는 걸 모르고
완벽한 인생을 살고 있다고 생각했다
아이가 아이였을 때
세상에 대한 주관도, 습관도 없었다
책상다리를 하기도 하고 뛰어다니기도 하고,
사진 찍을 때도 억지 표정을 짓지 않았다
아이가 아이였을 때 질문의 연속이었다
왜 나는 나이고 네가 아닐까?
왜 난 여기에 있고
저기에는 없을까?
시간은 언제 시작되었고
우주의 끝은 어디일까?
태양 아래 살고 있는 것이 내가 보고 듣는 모든 것이
모였다 흩어지는 구름조각은 아닐까?
악마는 존재하는지, 악마인 사람이 정말 있는 것인지,
내가 내가 되기 전에는 대체 무엇이었을까?
지금의 나는 어떻게 나일까?
과거엔 존재하지 않았고 미래에도 존재하지 않는
다만 나일 뿐인데 그것이 나일 수 있을까
아이가 아이였을 때
시금치와 콩, 양배추를 억지로 삼켰다
그리고 지금은 아무렇지도 않게 모든 것을 잘먹는다
아이가 아이였을 때
낯선 침대에서 잠을 깼다
그리고 지금은 항상 그렇다
옛날에는 인간이 아름답게 보였지만
지금은 그렇지가 않다
옛날에는 천국이 확실하게 보였지만
지금은 상상만 한다
허무 따위는 생각 안 했지만
지금은 허무에 눌려 있다
아이가 아이였을 때
아이는 놀이에 열중했다
하지만 지금에 와서 열중하는 것은 일에 쫓길 뿐이다
아이가 아이였을 때
사과와 빵만 먹고도 충분했다
지금도 마찬가지다
아이가 아이였을 때 딸기만 손에 꼭 쥐었다
지금도 그렇다
덜 익은 호두를 먹으면
떨떠름했는데 지금도 그렇다
산에 오를 땐 더 높은 산을 동경했고
도시에 갈 때는 더 큰 도시를 동경했는데 지금도 역시 그렇다
버찌를 따러 높은 나무에 오르면 기분이 좋았는데 지금도 그렇다
어릴 땐 낯을 가렸는데 지금도 그렇다
항상 첫눈을 기다렸는데 지금도 그렇다
아이가 아이였을 때 막대기를 창 삼아서 나무에 던지곤 했는데
창은 아직도 꽂혀 있다
<원문>
Song of Childhood
Peter Handke
When the child was a child
It walked with its arms swinging,
wanted the brook to be a river,
the river to be a torrent,
and this puddle to be the sea.
When the child was a child,
it didn’t know that it was a child,
everything was soulful,
and all souls were one.
When the child was a child,
it had no opinion about anything,
had no habits,
it often sat cross-legged,
took off running,
had a cowlick in its hair,
and made no faces when photographed.
When the child was a child,
It was the time for these questions:
Why am I me, and why not you?
Why am I here, and why not there?
When did time begin, and where does space end?
Is life under the sun not just a dream?
Is what I see and hear and smell
not just an illusion of a world before the world?
Given the facts of evil and people.
does evil really exist?
How can it be that I, who I am,
didn’t exist before I came to be,
and that, someday, I, who I am,
will no longer be who I am?
When the child was a child,
It choked on spinach, on peas, on rice pudding,
and on steamed cauliflower,
and eats all of those now, and not just because it has to.
When the child was a child,
it awoke once in a strange bed,
and now does so again and again.
Many people, then, seemed beautiful,
and now only a few do, by sheer luck.
It had visualized a clear image of Paradise,
and now can at most guess,
could not conceive of nothingness,
and shudders today at the thought.
When the child was a child,
It played with enthusiasm,
and, now, has just as much excitement as then,
but only when it concerns its work.
When the child was a child,
It was enough for it to eat an apple, … bread,
And so it is even now.
When the child was a child,
Berries filled its hand as only berries do,
and do even now,
Fresh walnuts made its tongue raw,
and do even now,
it had, on every mountaintop,
the longing for a higher mountain yet,
and in every city,
the longing for an even greater city,
and that is still so,
It reached for cherries in topmost branches of trees
with an elation it still has today,
has a shyness in front of strangers,
and has that even now.
It awaited the first snow,
And waits that way even now.
When the child was a child,
It threw a stick like a lance against a tree,
And it quivers there still toda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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