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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 100대 영화(98)ㅡ<피아노>

Joyfule 2017. 11. 9. 13:30

 

 

  피아노(Piano, 1994) : 여성의 억압된 성과 사랑

  제인 캠피온(Jane Campion) 감독

 

  뉴질랜드에서 태어난 오스트레일리아의 영화감독 제인 캠피온이 우리 나라에 알려지게 된 데는 <피아노>의 위력을 빼놓은 채 이야기할 수 없다. 그는 이 영화로 칸 영화제와 미국 아카데미 영화제를 통해 세계적인 감독으로 부상했고, 그 여파로 한국의 극장들은 <내 책상 위의 천사>나 <스위티> 같은 이전 영화들을 속속 불러들였다.

 

  그는 이제 뉴질랜드와 오스트레일리아라는 영화산업의 지역적 변방성에 여성이라는 성적 변방성이 지운 이중의 한계를 극복한 대표적인 여성 감독이 됐다. 이렇게 되기까지는 개인의 노력뿐만 아니라 국가의 엄청난 재정 지원에 힘입은 오스트레일리아 영화의 국제적 부상과 그 안에서 나날이 이루어지는 여성 영화인구의 증가라는 빼놓을 수 없는 원인이 있었다. <스위티>에서 시나리오, 촬영, 편집을 여성들과 함께 한 그는 <피아노> 역시 여성 제작자인 잔 채프만과 결합해 만들었다. 여성들로 일단 전선을 구축한 다음, 여성을 주인공으로 해서 여성의 삶과 여성으로 산다는 것의 의미를 탐구하는 것이 그의 작업 스타일인 셈이다.

 

  얼핏 보기에 진부한 삼각관계 이야기인 듯싶은 <피아노>는 빅토리아 시대의 영국 식민지였던 뉴질랜드를 배경으로 시대와 공간이 여성에게 주는 억압을 보여준다. 주인공 에이다는 이름도 성도 모르는 새 남편과 아버지의 교환수단이 된다. 그리고 자기의 표현수단인 피아노는 자신의 허락도 없이 남편과 낯선 남자 사이에 거래된다.

 

  여기서 에이다는 벙어리다. 이 여성의 침묵과 피아노라는 표현수단의 설정은 억압적인 가부장제 언어체계 안에서 침묵이 저항수단이 될 수 있음을 암시한다. 그의 목소리는 입술을 통하지 않고, 손가락의 움직임에 따라 열정적인 피아노 소리로, 딸에게 보내는 신호로, 종이 위에 연필로 쓰는 글로, 연인의 몸을 쓰다듬는 손길로 표현된다. 하지만 그의 자기표현이 남편에게 충분히 위협적이며 이해하기 어려운 것이라는 것은 남편이 그의 손가락을 잘라버리는 데서 확실히 드러난다.

 

  그렇다면 제인 캠피온은 에이다의 성적, 정서적 각성을 왜 빅토리아 시대라는 이미 지나간 시대 속에 구조화시켰을까? 우선 빅토리아 시대는 여성 성욕의 억압과 동의어인 시대다. 또한 남성 지배적인 역사에서 여성의 경험은 거의 완전히 감추어져 왔고, 여성들의 상상력을 해방시키고 현재에 대한 의미를 이해하는 수단으로 과거는 가장 흔한 공격대상이 된다. <피아노>가 한 여성의 과거에 대한 단순한 여성영화가 아닌 것은 바로 이 지점에서다.

 

  또한 이 영화는 남성들 사이의 차이를 보여주고 어떤 것이 여성들의 공감을 자아낼 수 있는지를 묻는다. 에이다가 구획 짓기에 익숙한 자본주의적 인물이자 도끼로 상징되는 스튜어트라는 남편을 버리고 원주민과 친한 베인즈를 선택하는 것은 두고두고 논쟁거리가 될 만하다.

 

  할리우드적 관습을 버리지 않고, 오히려 그것을 이용한 이 영화의 접근법은 분명 아직도 낭만적인 사랑의 각본을 믿고 싶은 대다수의 사람들에게 이 영화가 친근하게 다가가는 데 상당한 영향을 미쳤으리라.

 

  ㅡ변재란

 

 

  간단한 소개

 

  19세기말. 뉴질랜드 미개척지에 20대의 에이다는 9살짜리 딸 플로라를 데리고 얼굴도 모르는 남자와 결혼하기 위해 도착한다. 어린 시절부터 스스로 침묵을 선택하여 말을 하지 못하는 에이다는 피아노와 딸 플로를 통해 세상과 의사소통한다.

  낯선 땅에 찾아온 에이다와 플로라를 데리러온 스튜어트는 에이다가 목숨같이 소중히 여기는 피아노를 해변에 내버려둔 채 집으로 향한다. 에이다는 해변가에 버려진 피아노를 옮기기 위해 문신을 한 얼굴에 글조차 읽을 줄 모르는 남편의 친구 베인즈의 도움을 받는다. 베인즈는 에이다가 피아노를 치는 동안 자신이 원하는 어떤 행동이든 할 수 있도록 허락한다면 피아노를 돌려주겠다고 약속한다.

  이를 통해 에이다와 베인즈는 복잡한 감정과 성적 욕망에 휩싸이고 결국 그들은 비밀스런 사랑에 빠진다. 이 사실을 알게 된 에이다의 남편 스튜어트는 질투와 분노에 휩싸여 에이다의 손가락을 잘라버리는데…… 

 

  페미니즘이다 아니다 말이 많았던 영화, 음악이 아름다운 영화, 느낌이 좋은 영화.

  1993년 칸영화제 대상, 1994년 아카데미상 3개 부문 수상작

 

  

 

 

  <감상문 1>('네티즌 리뷰'에서 가져옴)

 

  이 영화를 보는 120분 동안 난 무엇인가 사로잡혀 있는 느낌을 받았다. 첫 장면에서는 에이다가 자신의 손으로 세상을 바라보는 이 모습에서 마치 세상과 자신을 격리시켜지는 것처럼 보여졌다. 주인공 에이다는 자신의 딸 플로라를 데리고 얼굴도 모르는 남자와 결혼한다. 여기에서 에이다의 피아노도 함께 보여지는데 목숨처럼 아끼는 피아노를 바닷가에 두고 간다. 거친 파도가 치는 그 곳에 홀로 남겨진 피아노는 에이다의 앞날이 평탄하지 않음을 말해주는 것 같았다. 그 피아노는 에이다가 세상에 자신의 감정을 말할 수 있고 에이다의 또 다른 한 면으로 보여진다.

 

  에이다는 어린 시절부터 말을 하지 못하였고 피아노와 플로라를 통해 세상과 이야기를 한다. 그 피아노는 남편의 친구인 베인즈에게 넘어가고 그 피아노를 찾기 위해 베인즈가 원하는 행동을 들어줌으로써 피아노를 통하여 에이다와 베인즈는 사랑에 빠지게 된다. 하지만 그 둘의 사랑은 해선 안 될 금기 사항이었다. 이런 사랑을 에이다의 남편이 알았지만 그는 그 사실을 인정하고 그들을 보내주게 된다.

 

  에이다는 바다에 가라앉는 피아노를 보며 같이 따라 들어갔지만 죽음 직전에 그녀는 다시 삶을 선택하게 된다. 이 영화를 통해 사랑에 대해서, 사람의 욕심에 대해서, 삶의 의지에 대해서 다시 한번 생각해보게 되었다. 이 영화의 주인공 에이다는 어렸을 때부터 말은 못하지만 피아노와 자신의 딸을 통해서 자신의 모습을 나타낸다. 이 여인이 피아노를 칠 때야말로 진정한 아름다움을 느끼고 볼 수 있다고 생각한다. 여기서 피아노로 그녀의 사랑을 알 수 있게 되지만 그녀에게는 남편이 있고 가정이 있다. 하지만 그 여인은 가정보다 자신의 감정과 사랑의 그 무언가에 이끌려 자신도 억제할 수 없는 사랑에 빠져버린다. 그녀가 택한 사랑은 다른 이들이 보기에는 불륜이고 해선 안 될 사랑이었지만 그녀는 그런 것들을 생각 할 수 없었고 자신을 억제할 수도 없게 보였다.

 

  여기서 보여지는 그녀의 사랑의 모습은 나에게로 하여금 다시 한번 사랑이란 것에 대해서 생각해 보게 만들었다. 자신의 모든 것을 버려도 그 사랑을 찾는 모습은 닫혀있는 그녀를 세상 밖으로 이끌어 내는 것 같았다. 그 사랑이 있음으로 그녀는 당당해 질 수 있었고 자신을 사랑하게 되고 피아노를 통해서 이야기했던 그녀가 사랑을 통해서 세상을 다시 바라 볼 수 있게 만든다고 생각된다. 그녀의 피아노는 자신의 분신과도 같은 그녀 자신의 비슷한 한 존재로 보여진다. 거친 파도가 치는 바닷가에 홀로 남겨진 피아노는 그녀의 평탄하지 않은 앞날을 말해주고 마치 그녀가 다른 세상을 살고 있는 모습으로 보여지는 것 같았다.

 

  그녀가 피아노를 치고 있을 때는 자신의 온몸으로 무언가를 말하고 그 모습이 사람들에게 동요를 일으켜 주었다. 그녀는 그런 자신의 분신과도 같은 아끼는 피아노를 바다 속으로 버리며 자신도 따라 들어가게 된다. 여기서 그녀가 왜 죽음을 택했는지는 모르겠지만 그녀는 가라앉는 피아노를 버리고 다시 삶을 택하게 된다. 삶이란 그 의지가 그 무엇보다도 강하고 사람이 자기 스스로가 버릴 수 없는 그 누군가가 우리에게 준 가장 소중한 어떤 것이라고 생각했다.

 

  에이다의 남편은 그녀의 겉모습을 보고 실망하고 그녀가 바라는 것이 무엇인지는 전혀 생각하지도 않는다. 그녀의 인격체를 무시하는 느낌도 받았다. 같은 인간으로 세상에 나와서 모습을 보고 그 사람을 평가하는 그는 매우 이기적이게 보였다. 그는 그녀가 피아노를 치고 싶어하는 모습을 오히려 이상하게 생각한다. 그는 그녀를 사랑으로 보지 않았으며 단지 노력이란 단어로 사랑을 얘기하려고만 한다.

 

  비록 그녀는 남편을 기만하고 베인즈란 사람을 사랑하게 되었지만 그 모습은 당연한 결과라는 생각이 든다. 베인즈란 사람은 그녀가 피아노를 치는 모습에 진정으로 반하고 그녀의 존재를 인정하고 소중하게 생각하며 자연스런 사랑으로 그녀를 대한다. 그의 남편은 그녀의 사랑을 인정하지 않고 분노와 배신감에 그녀가 이야기 할 수 있는 매개체인 손가락 하나를 자르게 된다. 하지만 나중에는 그녀의 사랑을 인정해주고 자신의 분노를 덮어버리고 그녀를 떠나보내는 인내를 보여준다.

 

  그가 그녀를 대하는 태도는 강압적이고 질투에 찬 모습이었지만 그 모든 것을 참아내고 인내하는 모습에서 처음과는 달리 그가 좀 더 낳은 사람으로 보여졌다. 이 영화는 나에게 이해하기 어려운 것이었다. 그냥 단순하게 보고 단순하게 생각한다면 아무 것도 아니지만 그 영화 안에는 사람이 사람을 이해할 수 있는 모습과 자기 자신의 욕망과 집착으로는 모든 것을 망쳐 버리고 자기 자신 또한 불행해질 수 있다는 것을 보여준다. 삶이란 자기 스스로가 가볍게 버릴 수 있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이 세상에 살고 있는 것은 절대적인 이유가 있고 목표가 있다고 생각한다.

 

  <감상문 2>(카페 '컬트영화동시상영'에서 가져옴)


  1. 제인 캠피온

  제인 캠피온 영화의 특성은 등장인물들의 독특한 자기 현시다. <피아노>의 주요 등장인물들은 모두 약간씩 가치 파괴적이고, 자기중심적이면서도 외줄타기를 하듯 관객에게 보여지는 객관성을 잃지 않는다. 자기 자신의 이야기를 하면서도 마치 남 이야기인 것처럼, 한 발 물러서서 보여주는 영상 화법, 이 영화에서는 에이다의 무표정한 얼굴과 침묵, 거울을 들여다보는 것으로 표현되고 있다. 이는 제인 캠피온이 대학에서 심리학과 교육학을 전공한 후, 인류학을 다시 공부한 것과 무관하지 않을 것이다.

  인간, 그중에서도 여성에 대한 관찰과 사색, 그것이 제인 캠피온 영화의 가장 중심적인 주제이다. 우리 사회에서 여성은 억압받고 차별받고 고통 받는 존재에 다름 아니므로, 제인 캠피온 영화의 주인공들이 ‘피아노’의 에이다처럼 그려지는 것도 무리는 아니다.

 

  제인 캠피온 영화의 여성들이 밝게, 순수하게 그려지기 보다는 음울하고, 기괴하고, 신경증적으로 그려지는 것이 바로 그 때문이다. 이런 분위기는 제인 캠피온의 장편 데뷔작 <스위티>에서부터 그 전조를 보인다. 가족애와 이 시대에 대한 절망을 독특한 분위기의 색체, 아카펠라풍의 음악, 초현실주의적인 영상으로 담아낸 <스위티>는 제인 캠피온에게 ‘뉴질랜드의 데이비드 린치’라는 별명을 안겨주며 89년 칸느영화제에 노미네이트된다.

  <피아노>는 이런 제인 캠피온이 만들어 보고 싶었던, 낭만적인 고딕 로맨스이자 인간과 이국적인 문화에 대한 인류학적 탐구이다. 피아노는 굉장히 격정적인 사랑 이야기임과 동시에 한 여성의 처절한 자아 정체성 탐구의 냉정한 보고서이다. 제인 캠피온은 피아노에서뿐만 아니라 다른 작품들, <내 책상 위의 천사> <여인의 초상> 등에서 일관적으로 여성을 짓누르는 사회, 문화적 관습과 도덕에 반발하는 여성들을 과감하게 그렇지만 객관적이고 차분하게 그리고 있다. 그리고 그런 제인 캠피온의 필르모그래피가 그녀를 90년대를 대표하는 여성감독계의 선두주자로 부각되게 만든 것이다.

  2. 뉴질랜드

  <피아노>의 배경이 되는 뉴질랜드는 제인 캠피온의 고향이기도 하면서 모든 영화인들의 정신적 고향이기도 하다. 태고의 거칠고 다듬어지지 않은 자연풍광과 현실적이지 않은 분위기는 제인 캠피온과 같은 작가들의 정신을 자극하는데 안성맞춤일 것이다.

  게다가 피아노의 시대적 배경은 19세기이다. 빅토리아풍의 어둡고 음침한 도덕율이 지배하는 영국과 뉴질랜드의 사회적 분위기는 영화가 말하고자 하는 주제에 부합하는 시대라고 하지 않을 수 없다. 제인 캠피온이 이 시대, 이 배경을 선택한 것은 단지 영화의 분위기와 잘 맞기 때문만은 아닐 것이다.

  빅토리아 시대는 그 시대의 기준으로 생각해 보아도, 숨이 막힐 것 같은 예의범절과 상상을 초월한 엄격한 도덕성을 갖추어야 하는 보수적인 시대였다. 본토에서 엄청나게 멀리 떨어진 변방 뉴질랜드에서조차 아낙네들은 남들과 다른 에이다를 이상한 눈으로 쳐다보며 수군거리고 소변을 볼 때조차 도움을 받아가며 긴 천으로 타인의 시선을 차단하는, 그런 시대였던 것이다. 그리고 그것은 이 영화가 줄곧 회색과 블루의 두 가지 색상의 톤으로 표현되는 것과 무관치 않다. 차가우면서도 냉정한 느낌을 주는 이 두 가지 색은 영화가 끝날 때까지 이 시대의 분위기와 도덕관을 상징적으로 관객에게 나타내 보인다.

  그리고 또 한 가지, 뉴질랜드라는 공간적 배경이 상징하고 있는 것이 있다. 당시 뉴질랜드는 미개척지, 이제 막 사람들이 이주하기 시작한 신천지의 식민지였다. 아직 원주민들이 그들의 문화를 지키려 애쓰고 있고, 백인들이 그 언저리에서 삶을 개척하기 시작한 자연의 공간. 영화 속에서는 에이다의 남편 스튜어트가 원주민들과 토지매매를 둘러싸고 갈등을 일으키는 부분이 있다. 이는 에이다를 억압하던 사회적, 제도적 분위기와 동일시되는 스튜어트가 순수하고 상처받지 않은, 때묻지 않고 행복한 처녀지인 여성성의 땅을 정복하고, 자기 식으로 개발하려는 의도가 숨어 있다.

 

  스튜어트와 원주민간의 충돌은 곧 에이다와의 또 다른 충돌에 다름 아니며, 에이다가 마지막에 원주민들의 배를 타고, 원주민들의 도움을 받으며 새 생활을 찾아 떠나는 것은 에이다가 자기 안의 순수성과 사랑을 찾았다는 것에 다름 아니다. 또한 고향과 아내를 버리고 원주민들과의 우정과, 삶을 택한 베인스가 에이다의 새 남편인 것 또한 의미심장한 사실을 얘기하고 있다.

  3. 영화가 관객과 대화하기, 수화, 독백, 그리고 플로라

  영화는 에이다의 일인칭 독백으로 시작되어 역시 에이다의 독백으로 끝이 난다. 하지만 우리가 에이다의 목소리나 생각을 들을 수 있는 것은 이 부분뿐으로, 나머지는 에이다의 표정, 행동, 수화, 그리고 딸이자 분신이기도 한 플로라가 들려주는 이야기로 추측할 수 있을 뿐이다.

  이는 처음에 이야기했던 제인 캠피온 영화 캐릭터들의 객관성을 그대로 나타내는 부분이다. 에이다의 시점인 듯, 주관적인 것 같으면서도 우리는 에이다의 생각과 말을 들을 수 없다. 나머지는 관객의 시선으로 객관적으로 판단하고 추측할 수밖에 없다.

  이것은 곧 여성성과 연결된다. 폭력적이고 억압적인 사회상하에서는 자신의 여성으로서의 주체성을 공공연히 내세우는 것은 자살행위와 다름없다. 또한 그 길은 굉장한 고독과 고통이 따르는 가시밭길이다. 에이다가 선천적 장애자가 아니라 후천적으로 말을 하고 있지 않을 뿐이라는 설정이 이것을 뒷받침한다. 에이다는 자신을 억누르는 폭압적 사회와 맞서 싸우기 보다는 단절과 침묵을 선택했던 것이고(혹은 강요된), 때때로 나타나는 에이다의 신경질적인 행동과 냉정함, 무심함은 어쩔 수 없이 터져 나오는 주체적 여성으로서의 자기 내면의 투쟁적 일면이었을 것이다.

  영화의 또 하나의 화자이자 주인공인 플로라 또한 아주 흥미로운 캐릭터이다. 에이다와 가장 가깝고, 에이다를 가장 잘 이해하는 듯 하면서도 자신과 멀어지는 에이다에게 불안과 두려움을 느끼고 끝내 엄마를 배반하게 되는 비운의 주인공인 플로라는 에이다의 또 다른 자아이자, 에이다의 무의식적 불안감과 죄의식이기도 하다.

  어린 플로라는 아직 어른이 되기 전의 에이다이다. 즉 여성으로서의 정체성을 찾기 이전의 미성숙된 자아이고, 그렇기 때문에 에이다의 사랑을 이해하지 못한다. 에이다가 피아노 때문에 베인스와 육체관계를 맺는 것을 목격하면서 플로라는 본격적으로 에이다의 또 다른 무의식을 대변하기 시작한다(에이다가 겉으로 드러난 자아라면, 플로라는 에이다의 초자아이다). 태어나면서부터 몸에 밴 도덕관념이 죄의식을 낳고, 그것이 또 두려움을 낳은 것이다. 플로라는 스튜어트에 동조해 적극적으로 에이다가 베인스 집으로 가는 것을 막고, 서슴없이 에이다를 나쁘다고 비난한다.

 

  (플로라가 에이다의 억압된 보수적 무의식을 대변하고 있다는 것을 극명하게 드러내는 장면이 모녀가 뉴질랜드 해안에 도착했을 때이다. 이 때 플로라는 겉으로 스튜어트를 아빠라 부르지 않을 거라며 에이다의 심정과 동일시되어 말한다. 그렇지만 영화가 진행됨에 따라 플로라가 스튜어트를 스스럼없이 아빠라 부르고 친밀감을 표현하고 있는 것을 발견할 수 있을 것이다.)

  에이다의 수화, 행동으로 표현할 수 없었던 마음 속 깊은 곳의 내면의 소리가 플로라라는 캐릭터를 통해, 제인 캠피온의 의도대로 그대로 노출되고 있는 것이다.

  4. 피아노, 그리고 여성의 자아정체성

  영화를 이끌어가는 중요한 축 중의 하나는 악기인 피아노이다. 이것은 에이다의 유일한 취미이자, 특기이고, 자기가 소유하고 있는 것, 즉 유일한 ‘내 것’이기도 하다(스튜어트가 땅과 피아노를 바꿔 버리자 에이다가 ‘내 것’이라며 강조하며 내미는 쪽지를 보라).

 

  에이다에게 있어서 말을 잃고, 자신을 억압하는 세상과 소통할 길을 닫아버린 자신에게 유일하게 자신을 드러낼 수 있는 길은 피아노를 연주하는 길뿐이다. 베인스를 만나기 전까지 에이다는 자신의 자아를 드러내려면 피아노가 필요했고, 그것은 곧 세상과 싸우는 길이었기 때문이다.

  뉴질랜드로 오기 전 에이다가 피아노 연주를 하려 할 때 멈추게 한 어머니(혹은 하녀?), 처음부터 피아노에 대해 이유 없는 불편함을 드러내며 애써 외면하려 하는 남편 스튜어트 등의 존재가 이를 뒷받침한다.

 

  에이다가 피아노를 연주할 때마다 주변인들은 불안함과 불쾌감을 느끼게 된다. 주변인들은 결코 피아노를 연주할 수 없고(원주민들), 연주하더라도 에이다와 결코 똑같게 연주할 수 없다(스튜어트 집안의 여인들).

  그리고 이 사실이 에이다가 베인스와 사랑에 빠지게 되는 이유를 설명해준다. 에이다의 자아를 나타내는 유일한 도구이자 창구인 피아노에 관심을 가지게 되는 사람은 베인스 뿐이다. 베인스는 피아노 연주를 미끼로 에이다의 육체를 요구하는데, 이것은 얼핏 이창동 감독의 <오아시스>를 연상시킨다. 피아노에서 유일하게 불편함을 느끼게 하는 이 장면은 우연하게도 오아시스가 느끼게 하는 불편함과 같다.

  오아시스의 공주는 장애자이다(또한 여성이기도 하다), 피아노의 에이다는 억압받는 자아를 가진 정신적 장애자이다(또한 남들이 보기에는 언어장애자이기도 하다). 이 둘은 똑같이 남성에게서 즉 강간(혹은 그와 비슷한 거래)을 당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두 여인에게 그것은 상대 남성에게 사랑을 느끼게 하는 촉매제이다. 두 영화 모두 억압받고 소외받던 여성의 자아를 유일하게 이해하고 인정하는 남자와 이어진다는 공통점이 있다. 오아시스의 경우 그것은 공주의 신체적 장애였고, 피아노의 경우 에이다는 피아노 연주였다.

  한층 더 나아가 베인스는 적극적으로 에이다의 자아를 지켜주려 한다. 피아노를 돌려주려 하는 행동이 그것이다. 에이다는 여기서 피아노로 대변되는 자신의 자아를 자신의 감정으로 표출시킬 계기를 얻는 것이다. 그것이 베인스와의 사랑이다. 처음으로 자신을 인정해주고, 자신의 피아노 연주를 불쾌하거나 이상한 눈으로 바라보지 않는 사람을 만난 것이다. 에이다가 베인스에게 사랑을 전달하는 도구 또한 피아노의 건반이다. 스튜어트 또한 에이다와 베인스와의 관계를 알게 되자 본능적으로 피아노를 도끼로 부수려 한다.

  피아노는 또한 감정의 배출 도구이다. 수화나 행동, 플로라의 말로 표현되지 않는 자잘한 감정들이 에이다의 연주로 나타나는 장면이 많다. 처음 뉴질랜드 해안에서의 불안한 연주, 피아노를 해변에 두고 온 후 탁자에 건반을 그리고 가상 연주를 하는 장면, 스튜어트가 플로라에게 피아노를 연주해달라고 하자 에이다가 플로라에게 너는 그 곡을 아는 게 없다고 하는 장면 등이 사소한 내면의 소리를 전달해줌으로서 영화를 이끌어 가는 중요한 소재이자 축 역할을 하고 있는 것이다. 

  5. 에이다는 행복을 찾았는가?

  영화의 말미, 에이다와 베인스는 스튜어트에게서 떠나며 피아노를 가지고 나온다. 원주민들이 노를 젓는 배 안에서 에이다는 자신을 대변하는 도구인 피아노를 바다에 버리라고 한다. 제인 캠피온이 피아노에서 신화와 문화에 대한 인류학적 탐구를 해보고 싶다고 말했듯이 이 장면은 피아노에 대한 제인 캠피온의 신화학적 해석이다. 에이다는 고전적 신화에서 그렇듯 마지막에 자신의 자아를 찾는 모험에서 승리를 거두었다. 그리고 그것은 곧 자신이 예전에 가지고 있던 자아를 버리고, 혹은 죽임으로서 다시 태어난다는 것을 뜻한다(헤라클레스가 죽음으로서 비로소 신이 되었듯이, 피닉스가 자신을 불태움으로서 다시 태어나듯이).

  피아노를 버릴 때 에이다가 같이 끌려들어가는 것도 같은 맥락이다. 에이다는 깊은 바다 속에서 자신의 죽음을 경험했다. 혹은, 어머니의 자궁 속으로 다시 들어가는 재탄생의 경험일지도 모른다.

  '죽음! 우연! 놀라움! 내 의지는 삶을 선택했는가'라는 독백처럼 에이다는 피아노와 함께 그 바다 속에서 죽음으로서 재탄생했다. 그럼으로써 그녀는 삶을 선택했다.

  그렇지만 영화의 결말은 묘한 여운을 남긴다. 마지막 장면에서 에이다의 삶은 결말지어진 것이 아니다. 자신의 자아를 이해해주는 사랑을 찾았고, 세상과 소통할 수 있는 말을 배우고 있으며 자신을 속박하는 모든 굴레에서 벗어난 것처럼 보이지만, 에이다의 표정 한 구석에는 알 수 없는 그늘이 져 있다.

  ‘가끔은 거기에 떠 있는 나 자신을 본다.’라는 독백은 과연 어떤 의미일까? 에이다의 선택은 옳았던 것일까? 그리고 앞으로 펼쳐질 에이다와 세상과의 소통은 무리 없이 이루어질까? 베인스는 결국 또 다른 스튜어트가 되지 않을까? 이 모든 불안감이 에이다의 마지막 독백에 어우러져 있다. 그리고 그 불안감은 에이다에게서 관객들에게까지 전염된다.

 

  그리고 에이다로 대표되는 모든 여성들의 선택과 행복은 다시 우리들의 몫으로 남겨진다. 결국 여성의 자아정체성은 여성들 자신의 손으로 찾아야 하는 것이기 때문에.

 

The Heart Asks Pleasure First - Michael Nyman
영화 The Piano / Main Theme

https://youtu.be/MLpzo_nwZpE

 

ㅡ 펌 ㅡ