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정 받는 자세 : 베드로와 가룟 유다의 비교.
베드로는 실수를 했지만, 교정을 순순히 받아서, 초대교회의 지도자가 되었고,
가룟유다는 교정을 받았을 때, 튀어나가서 반발하고서, 정반대가 되었다는 얘기입니다.
교정을 받을 때의 자세
-이것이 바로, 가룟유다와 베드로의 차이점이었습니다.
▲마16장에서, 베드로가 예수님더러 십자가를 지지 말라고 말렸을 때
예수님은 베드로에게 ‘사탄아, 내 뒤로 물러가라’고 혹독하게 책망하셨습니다.
아니 ‘사탄’이라니요!
예수님은 그 누구에게도, ‘사탄아!’ 라고 욕하신 적은 없습니다.
바리새인들을 보고서 ‘독사야’ 라고 하신 적은 있어도, 대놓고 ‘사탄아’라고 부르지는 않으셨습니다.
그런데 베드로보고는, ‘사탄아!’ 라고 하신 것입니다.
물론 주님이 베드로를 보고서 ‘사탄아’라고 하신 것은,
‘사랑하는 자를 책망하여 징계하신’ 것입니다. 계3:19
그러므로 주님의 책망과 징계를 받은 사람은, 더욱 열심을 내어 회개해야 합니다.
생명의 떡에 관한 설교를 듣고서, 떡을 먹었던 사람 대부분이 주님을 떠났을 때
베드로는, ‘영생의 말씀이 주께 있으매, 우리가 뉘게로 가오리이까?’ 하며
충성을 다했던 제자였습니다. 요6:60
그런 충성스런 제자에게, 예수님이 ‘사탄아, 물러가라’ 하신 것은
아무리 생각해도, 주님이 좀 심하신 것 같습니다.
어쨌거나, 주님은, 사랑하는 자를, 더 심하게 책망하시고 징계하십니다.
그 주님의 책망과 징계와 교정을 잘 견뎌내는 사람이,
주님께 쓰임 받는, 영적 지도자가 될 수 있다는 뜻입니다.
▲베드로가 또 한 번 더 예수님께 교정을 받았던 적이 있습니다.
최후의 만찬 자리에서 ‘다른 사람은 다 주님을 배반해도,
나는 죽을지언정, 그렇게 배반하지 않겠습니다.’ 라고 베드로가 장담했습니다.
그러자 예수님은, 닭 울기 전에, 네가 세 번 나를 부인하리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어떤 면에서, 베드로가 버럭 화를 낼 수 있는 상황입니다.
그러나 베드로는, 잠자코 있었습니다.
그렇게 교정을 순순히 받고, 참고 견뎌내는 사람..
그를, 주님은 들어서 사용하신다는 것이 - 이 설교의 주제입니다.
실제로 그는, 오순절 이후로, 초대교회의 최고 지도자가 되었습니다.
그리고 그런 자기 경험을 초대로 해서
베드로는 본문 베드로전서5:5절의 말씀을 기록했다고 봅니다.
“젊은 자들아 이와 같이 장로들에게 순복하고, 다 서로 겸손으로 허리를 동이라.
하나님이 교만한 자를 대적하시되, 겸손한 자들에게는 은혜를 주시느니라.”
위 말씀은, 베드로가 실제로 체험한 말씀이라는 뜻입니다.
공허한 이론을 말씀한 것이 아닙니다.
여러분, 반드시 이 말씀을 믿으십시다.
내가 겸손해서, 손해 볼 것은 결코 없다는 뜻입니다.
언젠가는 하나님으로부터 높임을 받게 되어 있습니다.
▲이제는, 베드로와 비교해서, 가룟유다의 <교정 받는 태도>를 살펴보겠습니다.
한 여인이 예수님 발에 값비싼 향유를 깨어서 부었을 때
유다는, ‘저것은 낭비다.. 차라리 팔아서, 그 돈을 가난한 자에게나 주어라’
라는 식으로 냉소적으로 말했습니다. (요12:5, 마26:10)
그때 예수님은 아주 부드럽게, 유다를 나무라셨습니다.
‘저 여자가 그렇게 하도록 내버려두라. 그녀는 내게 좋은 일을 행했느니라.’
그러나 유다는, 이 예수님의 교정을 듣고, 반발했습니다.
그대로 받아들이지 않았습니다.
이어지는 마26:14절에 보면, 이 사건이 있은 직후에,
유다는, 대제사장에게 가서, 예수님을 팔 것을 흥정합니다.
여기서 유다가 예수님을 팔기로 결심한 타이밍을 유의해서 보십시오.
유다는, 제자들이 다 보는 앞에서, 자기가 잘못해서, 예수님께 공개적으로
나무람을 들었습니다.
그 즉시로, 튀어나가서, 예수님을 팔아버리는, 앙갚음을 해버렸던 것입니다.
보십시오. 깨어지지 않은 사람(유다)은,
작은 책망에도, 부드러운 교정에도.. 이렇게 격렬하게 반응해 버립니다.
하나님이 이런 사람을, 지도자로 세우실 수 있겠습니까?
▲물론 여러 가지 다른 고려 요인들이 있겠지만,
<교정을 받을 때의 자세>
그것도 ‘초대교회의 지도자’ 와 ‘영원히 저주받을 자’로 나누는
어떤 구분점이 되기도 했습니다.
그런데 오늘날 우리도
똑같이 이와 같은 시험에 직면하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공개적으로 지적을 당했을 때, 내 속에서 부아가 치미는 이유가 무엇일까요?
그것은 내가 교만하다는 증거요,
내가 사람의 영광(평판)을, 필요이상으로 높이 두고 있다는 증거입니다.
그런 자아도 깨어져야 하며, 내려놓아야 합니다.
십자가에서, 자기 자아가 예수와 함께 죽은 사람은,
자기 자아가 망가지는 것을.. 그리 펄쩍 뛸 정도로, 격하게 반응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하나님은,
그런 나 자신의 실상을 깨달아라고,
대적을 격동시켜서, 나를 공개적으로 모욕하도록, 상황을 조성하시는 것입니다.
우리 각자가 그 시험에 통과하지 못하면,
대적은, 통과할 때까지, 나를 계속 격동시킬 것입니다.
시험은, 시험에서 이겨져야, 비로소 끝나게 되니까요!
▲베드로처럼, 우리가 공개적인 교정을 당할 때,
또는 성령님으로부터 책망을 당할 때,
우리는 순순히 자신을 돌아보며, 회개할 수 있게 되기를 바랍니다.
그때 베드로처럼,
예수님은 우리 각자를 높이실 것입니다.
그리고 우리도, 베드로처럼,
벧전5:5절의 말씀으로, 젊은 자들에게 충고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내 자아가 깨어지지 못하면,
내가 교정을 받을 때마다, 반발하면,
어쩌면 남은 평생을, 우리는 홀로 외롭게 살게 될지도 모릅니다.
절대 남에게 책망 받기 싫어하는 사람, 복종할 줄 모르는 사람은,
결국은 홀로 외롭게 살 수밖에 없습니다.
그가 지도자라도, 외로운 지도자가 되고 말 것입니다.
아무도 자기를 따르는 사람이 없는, 외로운 지도자!
다른 어떤 사람에게도, 자기에게 싫은 소리 하는 사람을, 곁에 두기를 거부하고
오직 자기 말에는 100% 순종만 해 주는 사람들만, 곁에 두고 일하기를 원한다면,
그가 바로 덜 깨어진 사람이요, 그는 지도자로 세워지지 못할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 주변에, 그런 사람들이 의외로 많다는 현실입니다.
그래서 그들은, 이 공동체 저 공동체로, 나비처럼 떠돌아다닙니다.
나비가 예쁜 꽃들을 찾아서, 떠돌아다니듯이 말입니다.
그들은 자기 생을 허비하게 됩니다.
그리고 성취하는 것도 없을 것입니다.
그들은 가인같이 방황하게 될지도 모릅니다. 창4:12
가인은, 주님의 교정을, 기꺼이 받아들이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그런 외로운 자에게, 영적인 지도력을 주시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그리스도의 몸”을 건축하고 계시며,
그 몸은, 반드시 여러 기관과 지체가 연결된 몸이기 때문입니다.
자기 혼자 동떨어져 있지 않고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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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1) 전략된 부분
▲장차 되어질 영적인 지도자는, 깨어진 사람이 되어집니다.
장래의 영적인 지도자를, 하나님은 어떻게 준비시키시는가 하면,
그를 ‘깨뜨림’을 통해서 준비시키는데,
그 ‘깨어짐’은.. 주로.. 자기 위의 권위자로부터 혹독하게 당하게 됩니다.
그 윗권위자에게 복종(순종)을 배움을 통해서.. 그가 깨어지는 것입니다.
예수님도 어느 날 하루아침에 짠 하고 지도자로 나타나신 것이 아닙니다.
그 전에 벌써 30년 동안이나, 집에서
아버지 요셉과 마리아의 권위 아래서, 복종하는 훈련을 거치셨습니다.
그 다음에, 영적인 지도자로 서실 수 있었습니다.
‘복종의 법칙’은, 특별히 그리스도의 몸된 교회에 있어서, 매우 중요합니다.
이것을 제가, 이해하기 쉽게, 우리 몸의 비유를 들어서, 설명 드리겠습니다.
오른 손은, 오른 팔에 붙어서 한 팀을 이룹니다.
오른 손은, 언제나 오른 팔의 지도력에 복종합니다.
그러나 왼손은, ‘오른 팔 팀’에 소속되어 있지 않습니다.
왼손은, ‘왼 팔 팀’에 소속되어, 왼팔에게 복종합니다.
‘그리스도의 몸’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 모두가, 우주적인 그리스도의 몸의 각 지체요, 각 부분이지만,
그 지체와 부분이, 다른 지체들보다, 자기와 특별히 가깝게 연결된 ‘팀’이 있습니다.
지역교회나 선교회가, 바로 그 팀이 될 것입니다.
▲하나님은 두 가지 방향으로 우리를 인도하십니다.
-<개인적으로>, 또는 <팀으로 연합해서> 입니다.
영어로는 “individually and corporately”입니다.
머리는, 오른 손이, 혼자서 스스로 움직이라고 명령할 수도 있습니다.
실제로 우리 몸을 보면, 팔이 전혀 움직이지 않은 상태에서, 손만 움직일 수 있습니다.
실제로 우리의 결혼, 직업, 이사 갈 때, 또는 개인적인 삶에 있어서,
이렇게 우리는, “머리”의 지시를 직접 받아서, “손”이 혼자서 스스로 움직일 때가 있습니다.
그런 사사건건 모두에, “팔”의 지시를 받지는 않습니다.
물론 그런 사사건건한 일에도, 교회 지체의 조언을 받을 수 있지만,
내 개인적 삶의 결정권은, 내가 내립니다. 내가 주체입니다. “팔”의 명령에 복종할 필요는 없습니다.
그러나 “머리”가,
“손”에게 직접 명령을 내리지 않고,
“팔 전체”에게 명령을 내릴 때가 있습니다.
‘팔을 들어 올려라’고 명령하면, 그때는 팔의 전체가 함께 들어 올립니다.
“손”이 ‘내게는 머리가 명령하지 않으셨다’고 하면서, 거부할 수 없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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