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감성을 위한 ━━/세계문학

불신 시대 - 박경리

Joyfule 2012. 8. 21. 11:25
 
  불신 시대  -  박경리 
그러나 진영은 약점을 안 후 거절을 해버리는 것이 
무슨 악마(惡魔) 취미 같아서 아무렇지 않는 얼굴로, 
「같이 저도 가지요」
그러자 아무 것도 모르는 어머니가 점심을 차려 왔다. 
점심을 먹으면서 아주머니는 한결 마음이 후련해졌는지 여러 가지 잡담을 꺼냈다. 
「글세 돈이 있어도 문제야. 이제 당초에 겁이 나서 남 줄 생각이 없어」
진영은 무표정하게 밥을 삼키고,
「아무 말씀 마시고 돈 찾거든 장사허세요. 
체면이고 뭐고…… 저도 자본이나 장만해서 장사할래요」
「너야 뭐 취직하면 되지」
「취직이 그리 쉬운가요? 하다 안되면 거리 빵이라도 구워 팔아야지요」
「너야 공부 많이 했으니까 하려면 취직 못할 것 없잖아? 
난 정작 장사라도 해야겠어. 그러나 돈벌이론 계가 제일이야. 힘 안 들고……」
아주머니는 숟갈을 놓고 성냥개비로 이빨을 쑤시면서 말한 것이었다. 
진영은 아무렴 그렇겠지. 그런 베짱이면……하다 말고 아주머니의 눈을 들여다본다. 
아무런 악(惡)의 그늘도 없는 맑은 눈이었다. 
「아무튼 돈을 벌어야 해. 돈이 제일이야. 세상이 그런걸……」
이번의 말투에는 어느 사인지 모르게 저지른 
자신의 일에 대한 짜증과 반발 같은 것이 있었다. 
「그럼. 옛날 속담 말마따나 자식을 앞세우고 가면 배가 고파도 
돈을 지니고 가면 든든하다고 안하던가」
어머니의 맞장구다. 
진영은 가벼운 현기증을 느낀다. 
시야 속에서 그들의 얼굴을 지워버리듯이 얼른 고개를 돌린다. 
「형님, 이래서 천당 가겠습니까? 돈, 돈 하다가 호호……」
아주머니는 까르르 웃으며 일어서서 장갑을 낀다. 
진영은 그 웃음 속에서 또 불안과 저포에 대한 반발을 느낀다. 
진영은 고개를 들어 아주머니를 쳐다보았다. 
역시 괴롭고 고독한 사람이고…….
아주머니가 가 버린 뒤 진영은 자리에 쓰러졌다. 
솜처럼 몸이 풀어진다. 
진영은 방안에 피운 구멍탄 스토우브에서 
가스가 분명히 지금 바에 시고 있는 거라고 생각한다. 
방안에 가득히 가스가 차면 나는 죽어 버리는 거라고 생각한다. 
어느새 진영은 괴로운 잠이 드는 것이었다. 
내장이 터진 소년 병이 꿈에 나타났다. 
진영은 꿈을 깨려고 무척 애를 썼다.
「모래가 명절인데 절에도 돈 천 환이나 보내야겠는데……」
어렴풋이 들려오는 어머니의 말소리다. 
진영은 몸을 들치며 눈을 떴다. 
「귀신이나 사람이나 매한가진데…… 남들은 다 저 몫을 먹는데 
우리 문수는 손가락을 물고 에미를 기다릴 거다. 」
잠이 완전히 깬 진영은 벌떡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는 외투와 목도리를 안고 마루에 나와 그것을 감았다. 
진영은 부엌에서 성냥 한 갑을 외투주머니에다 넣고 집을 나갔다. 
오랫동안 마음 곳에서만 벼르던 일을 오늘에서야말로 해치울 작정인 것이다. 
진영은 눈이 사복사복 밟히는 비탈길을 걸어 올라간다. 
진영은 고슴도치처럼 바싹 털이 솟은 자신을 느낀다. 
목도리와 외투 자락이 바람에 나부낀다. 
그러면은 참나뭇가지 위에 앉은 눈이 외투 깃에 날아 내리는 것이었다. 
진영은 절로 가는 것이다.  
진영이 절 마당에 들어갔을 때, 
<당신네들 같으면 중이 먹고 살갔수>하던 늙은 중이 막 승방에서 나오는 도중이었다.           
절은 괴괴하니 다른 인적기는 통 없었다. 
진영은 얼굴의 근육이 경련하는 것을 의식하며, 중 옆으로 다가선다. 
「저말이지요, 저이들이 이번에 시골로 가는데 아이 사진과 위패를 가지고 가고 싶어요」
고개를 푹 숙인 채 진영은 나지막하게 말한다. 
허옇게 풀어진 눈으로 진영을 쳐다보던 중이 겨우 생각이 난 모양으로,
「이사를 하신다고요? 그럼 어떠우. 그냥 두구려. 
명절에 우편으로라도 잊어버리지 않으면 되지」
진영은 숙인 고개를 발딱 세우더니 옆으로 홱 돌리며,
「참견할 것 없어요. 사진이나 빨리 주시오!」쏘아붙인다. 
중은 좀 어리둥절해 하더니 무엇인지 모르게 중얼중얼 씨부렁거리며 법당으로 간다. 
이윽고 중이 문수의 사진고 위패를 가지고 나오자 진영은 
그것을 빼앗듯이 받아들고 인사말 한 마디 없이 절문 밖으로 걸어나간다. 
화가 난 중은 진영의 뒷모습을 꼬느어보다가 중얼중얼 씨부렁거리며 뒷산으로 간다. 
진영은 중에게 화를 낸 것은 아니었다. 
다만 진영으로서는 빨리 사진을 받아 가지고 절문 밖으로 나가고 싶었던 것이었다. 
그래서 초조했던 것이다. 
진영은 비탈길을 돌아 산으로 올라간다. 
올라가면서 진영은 이리저리 기웃거린다.
어느 커다란 바위 뒤에 눈이 없는 마른 잔디 옆에 이르자 진영은 그 자리에 주저앉는다. 
그리하여 문수의 사진과 위패를 놓고 물끄러미 한동안 쳐다본다. 
한참 만에 그는 호주머니 속에서 성냥을 꺼내어 사진에다 불을 그어댄다. 
위패는 이내 사르어졌다. 
그러나 사진은 타다 말고 불꽃이 잦아진다. 
진영은 호주머니 속에서 휴지를 꺼내어 
타다 마는 사진 위에 찢어서 놓는다. 
다시 불이 붙기 시작한다. 
사진이 말끔히 타 버렸다. 
노르스름한 연기가 차차 가늘어진다. 
진영은 연기가 바람에 날려 없어지는 것을 언제까지나 쳐다보고 있었다.
<내게는 다만 쓰라린 추억이 남아 있을 뿐이다. 
 무참히 죽어 버린 추억이 남아 있을 뿐이다>
진영의 깎은 듯 고요한 얼굴 위에 두 줄기 눈물이 흘러내리고 있었다. 
겨울 하늘은 매몰스럽게도 맑다. 
참나무 가지에 얹힌 눈이 바람을 타고 진영의 외투 깃에 날아 내리고 있었다. 
<그렇지. 내는 아직 생명이 남아 있었지. 항거할 수 있는 생명이>
진영은 중얼거리며 참나무를 휘어잡고 눈 쌓인 언덕을 내려오는 것이었다.

'━━ 감성을 위한 ━━ > 세계문학' 카테고리의 다른 글

지(知)와 사랑2. - Herman Hesse.   (0) 2012.08.25
지(知)와 사랑1. - Herman Hesse.   (0) 2012.08.24
불신 시대 - 박경리  (0) 2012.08.20
불신 시대 - 박경리  (0) 2012.08.18
불신 시대 - 박경리  (0) 2012.08.1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