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상륜(徐相崙)과 소래(松川)교회 설립(1884)
서상륜의 생애 (7)
16) 연동교회 설립
새문안교회의 설립에서부터 주동적 역할을 하던 서상륜은 활동무대를 동대문 방면으로 옮긴다.
이태조는 서울로 도읍지를 옮기자 모든 주민들에게 그 신분에 맞게 주거 건축용지를 분급하였다. 이런 신분에 의한 주거지 분화 현상으로 종로와 을지로 지역은 상가와 시장, 그리고 환락가 등으로 구분되어 상공업과 서비스업에 종사하는 서민들이 모여 살게 되었으며 특히 연못골에는 나막신바치, 찬우물골에는 갖바치, 방아다리에는 배추장수, 두다리목에는 병졸 등 주로 양민(良人)들과 천민(賤民)들이 살았다. 이들은 모두 양반들의 착취와 억압 속에 사는 계층들이었다. 이 곳에서 서상륜은 선교사 리(Graham Lee, 한국명 이길함)와 함께 전도하여 가난하고 눌린 자들에게 영혼의 안식처를 마련해 주며 천국의 소망을 깊이 심어 주기 위하여 노력한다. 연동교회의 설립에 서상륜이 주동적 역할을 한 것으로 기록된 글들을 찾아보면 다음과 같다.
이찬영 목사는 연동교회는 "1894년 1월 8일 서상륜과 이길함에 의하여 설립되었다"고 하였고, 전필준 목사에 의하면 "서상륜씨와 그램 리 선교사의 활동으로 설립되었다"고 하였다.
그러나 연동교회 측은 정확한 설립연도는 알 수 없고 "1934년 10월 21일 교회창립 40주년 기념식을 거행한 것으로 보아 1894년에 설립된 것이 사실(史實)인 것 같다"고 하며, 이렇게 "설립 연도가 부정확한 것은 선교사들이 세운 교회가 아니기 때문이라"고 한다. 이 교회의 초대 교인은 이승두라고 한다.
선교사들이 직접 설립하지 아니하여 설립연도를 정확하게 알지 못하는 교회이기에 한국인 전도인들에 의하여 설립된 것이 더욱 분명하며 그 중에서도 서상륜의 활동이 절대적이었다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이 연못골에는 1892년, 46세의 나이로 내한하여 주로 천민들 특히 백정(白丁) 전도에 심혈을 기울인 선교사 무어(Samuel F. moore)도 한국인 조사 김영옥·천광실 등의 협력을 얻어 전도한 흔적이 있다.
이 곳에서 서상륜은 전도와 아울러 교회 건물을 준비하기 위하여 적극적으로 노력하여, 현 연동교회가 위치하고 있는 연지동 136번지 17호의 초가 한 채를 염준창의 소개로 매수하여 예배 처소를 삼도록 주선하였고, 이곳에 예배당을 건축하여 1896년 10월 4일에 헌당식을 거행한다. <사기 상>에는 연동교회 설립을 1896년으로 기록하였으나 이것은 설립연대가 아니라 예배당 건축연대이다.
17) 승동교회 조사
1904년에는 다시 선교사 웰번(A. G. Welbon), 클라크(C. A. Clark)등과 협력하여 탑골공원 뒤에 승동교회를 설립하고, 이여한과 함께 조사로 시무하게 된다.
<사기 상>에 의하면 승동교회의 전신은 홍문동 교회라고 한다. 이 교회가 내부 분쟁으로 해산되면서 일부 교인들이 동현에 있는 헤론의 병원에서 예배를 드리게 된다. 헤론은 동현에 병원을 설립하고 환자를 치료하는 한편 복음을 전파하면서 은밀히 예배를 드리고 있었다. 이 예배에 홍문동 교회의 성도 일부가 합류하여 예배를 드리게 되었는데 이 병원이 이전할 형편에 이르러 모였던 성도들은 다시 분산할 수밖에 없어 그 일부가 인사동에서 승동 교회를 설립한 것이다. 승동교회 개척의 주역은 박성춘·박중근·정윤수·송인순·다동의 김부인·박서양·김필순 등이라고 하였다.
그러나 승동교회가 자체적으로 보유하고 있는 자료는 이와 판이하게 다르다. 승동교회는 1893년 공당골에서 시작된 교회라고 하며, <사기 상>에서 승동교회의 전신이라고 주장하는 홍문동 교회는 승동교회에서 세웠던 지교회였다고 한다. 그러나 <사기 상>은 홍문동 교회에 대하여 다음과 같이 설명하고 있다.
홍문동 교회(홍문수골교회)는 서흥 사람 황모와 상동교회 교인 백모가 철도부설 관계로 개인적 이익을 목적으로 교인들을 규합하여 설립한 교회였으나 내부 분쟁으로 필경 해산하게 되어 다수의 교인들이 공당골 교회에 합류하게 되었고, 여타는 새문안교회와 연동교회에 편입함으로 교회의 재산도 처분하여 이상 세 곳 교회에 분배하였다.
그러나 승동교회 자체의 자료는 <사기 상>과 같이 주장하지 아니한다. 승동교회의 주장을 들어본다.
1884년에 입국한 의료선교사 알렌은 구리개에 제중원을 설립하고 방 한칸을 얻어 서상륜·송석중·김필준 등과 함께 예배를 드렸는데, 알렌이 주미 한국 공사관 비서로 전임, 귀국하자 1885년 6월에 입국한 헤른(Jhon W. Heron)이 원장으로 취임하게 된다. 이무렵(1893) 공당골에 교회가 설립되었는데 이것이 승동교회의 전신이다. 이 교회는 다음해(1894)에 낙현으로 이전하였고, 1898년에 홍수문골 교회(홍문동교회)와 합하여 인사동으로 이전하게 된다.
이전 당시는 낡은 집을 구입, 보수하여 예배당으로 사용하였으나 교세가 확장됨에 따라 1905년에 새 예배당을 건축하였다. 이렇게 시작된 승동교회에 서상륜은 조사로 시무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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