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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상륜(徐相崙)과 소래(松川)교회 설립(1884)

Joyfule 2018. 3. 9. 00:24

 

     서상륜(徐相崙)과 소래(松川)교회 설립(1884)  

 

서상륜의 생애 (8)

 

17) 다방면의 활동

선교사가 입국한 후 서상륜은 더욱 바쁘게 움직여야 했다. 그의 바쁜 발걸음을 몇 가지로 요약하면, 첫째는 개인 전도요, 둘째는 선교사의 조사 역할이요, 셋째는 개 교회 목회자요, 넷째는 성경 번역의 동역자이다. 이런 활동상을 잠시 살펴보기로 한다.

 

첫째, 개인 전도에 대한 기록을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是年(저자주: 1894년)에 宣敎師 元杜尤난 傳道의 方針을 擴張하야 徐相崙 . 金興京 . 朴泰善 . 劉興列 等으로 京城地方에 傳道케 하고...."

그는 단독으로 전도 여행을 할 경우 출발할 때 반드시 보따리 속에 쪽복음, 금계랍, 감자 씨를 지참하여 영혼의 구원과 치유를 위해 복음을 주고, 가난한 육신의 삶을 돕기 위해 약품과 감자 씨를 주면서 질병의 치료와 풍요로운 삶에 대한 희망을 심어 주었던 것이다.

그의 개인전도 지역은 매우 광범위하여 경기도 일원을 두루 다녔으며, 평안도는 평양을 중심하여 선천과 의주까지 복음을 들고 다녀야 했다. 황해도는 소래를 중심하여 황해도 전역에 그의 발걸음이 닿지 않은 곳이 없을 정도였고, 남으로는 부산지역까지 전도 여행을 한 흔적을 찾아 볼 수 있으니, 실로 한반도를 위시하여 만주 일원까지 그의 발길이 닿지 않은 곳이 없을 정도이다. 실로 그의 전도구역은 한반도 전역이었다.

 

둘째, 선교사의 조사로, 안내자로, 통역자로 동행하면서 전도한 사실도 기록에서 찾아 볼 수 있다. 1891년 봄에는 선교사 게일(James S. Gale)과 마페트(Samuel A. Moffett)를 인도하여 평양과 의주를 거쳐 남만주 일원과 북간도 그리고 회령·함흥·원산 등지를 다녀 다시 서울로 돌아오는 탐험 전도여행을 하였다.

그가 전국을 누비며 선교사와 함께 혹은 단독으로 전도하는 동안 때로는 가난한 농가에서, 때로는 양반집 사랑방에서, 때로는 동구 밖에서 만나는 사람들에게 복음을 전하였다. 그의 줄기차고도 기동성 있게 펼쳐진 전도여행은 한국 교회가 이 땅에 뿌리를 깊이 내리도록 하는 원동력이 되었고, 박력과 열정에 넘치는 설교, 굴하지 않는 용기와 담력 등은 교회사가들이 한결같이 높이 평가해 주는 신앙인 서상륜의 모습이다.

서재현씨도 그의 인품을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큰 할아버지는 활달하고 용기있고 말도 잘하실 뿐 아니라 물욕이 없어 신앙에만 매진하신 분입니다."

 

셋째, 그는 순회 전도자의 역할만 한 것이 아니라 개 교회 목회자이며 예배당을 건축한 조사이기도 하다. 선교사 기퍼드(Daniel L. Gifford)의 일기(1898년)에 다음과 같은 기록이 있다.

"1895년에 자신은 언더우드가 부인의 신병 치료차 잠시 미국에 있는 동안 서경조(저자주: 서상륜)와 함께 새문안교회를 맡아 목회하였고, 이 때에 예배당 신축 공사를 시작했다. ... (중략) ... 홍집사와 나의 조사는 건축 기술이 있는 사람이어서 건축 책임을 졌다"

이 부분에 대하여 언더우드 부인은 다음과 같이 기록하고 있다.

"사람들은 스스로 기꺼이 일하러 나왔고, 목사와 다른 전도사 한 둘은 옷을 벗어 젖히고 일을 도왔다"

그가 조사로 섬긴 교회는 새문안교회를 비롯하여 연동교회와 승동교회이며, 새문안교회 예배당 건축시에는 선봉장의 역할을 한 것 같다. 그는 과연 순회 전도자이면서, 한 교회를 담임한 목회자이기도 하다.

 

넷째, 그가 한국 교회에 남긴 업적 중 최대의 것은 로스와 함께 성경 번역을 한 것이다. 그의 성경 번역사역은 만주에서 끝이 난 것이 아니었고, 서울에서 다시 계속한 흔적을 찾아 볼 수 있다.

언더우드와 아펜젤라가 내한한 후의 일이다. 이들은 1887년, 내한한지 불과 2년만에 <마가의 젼한 복음셔 언해>를 번역해 출판한다. 우선 이 마가복음은 제목부터 이수정 역 <신약 마가젼 복음셔 언해>의 수정본일 것이라는 느낌을 준다. 이수정 역은 언더우드가 내한할 때 지참한 것으로 일본에서 이미 번역 출판된 성경이다. 이것을 언더우드와 아펜젤라는 수정하여 자신들의 역본으로 세상에 공개한 것이다. 그러나 이 역본은 미국 성서공회 본부에서조차 반역본(反逆本)으로 인정되어 추궁을 받기까지 하였다.

여하간 외국인 선교사가 내한한 지 불과 2년만에 성경 번역을 한다는 것은 거의 불가능한 일이다. 그러면 이런 불가능한 일이 어떻게 가능하게 되었을까? 그것은 한국인 조사의 적극적인 협조 때문이라고 쉽게 짐작할 수 있다. 이 부분에 대하여 김양선은 "마가 복음 번역자로 언더우드와 아펜젤러 외에 서상륜과 백홍준"을 거론한다. 서상륜의 성경 번역 사역은 만주에서 뿐 아니라 국내에서도 계속된 것을 이로서 알 수 있다.

그러면 그들은 왜 <로스·서상륜 공역 성경>을 수정 보완하지 않고, 이수정 역을 수정하였을까? 그 이유는 언더우드가 <로스·서상륜 공역 성경>에 대하여 가지는 부정적인 시각을 이해하면 쉽게 납득이 갈 것이다. 언더우드의 언급을 보도록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