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상륜(徐相崙)과 소래(松川)교회 설립(1884)
서상륜의 생애 (9)
18) 셔상륜 통신
1902년 5월 10일자 [그리스도 신문]에는 서상륜의 지방 순회 보고서가 [셔상륜 통신]이라는 제목으로 기재되었다. 이 통신문에는 성도들이 도우며 사는 아름다운 일화가 게재되어 있다. 물론 이 기사는 평산의 감바위교회, 우번리교회, 연안의 바루개교회 등 몇몇 교회의 미담이 소개된 것인데, 그가 순회한 지역은 송도(개성)·금천·연안·평산·해주 등지이며, 특히 우번리교회의 전도회 조직이 보도되는 것을 보아 순회 사역 중에 지교회의 기관조직을 도운 것 같다. 원문 그대로를 게재한다.
"황해도 해쥬와 연안과 백쳔과 평산과 금쳔과 숑도 등디의 잇난 각 교회 형편 (셔상륜)
하날에 계신 우리 아바지 하나님께셔 우리 쥬 예수 그리스도랄 인하샤 주신 은혜랄 감샤함나이다. 샹년에 그 곳들이 겸년을 당하야 타쳐로 떠난 교우들이 더러 잇사니 당한이와 보난이의게 매우 졀박 하오나 일쳔 팔백 오십여년 젼(행 八쟝)에 예루샬넴 문도들과 갓치 하나님 뜻대로 될줄을 아오니 감샤하오며 또 본토의 잇난 교우들의 사난 형편과 면모 형색을 보온즉 쥬 예수랄 아즉 밋지 아니하난 사람들보다 그 먹으며 주리난거산 더옥이 심하되 도로혀 몸도 셩하고 화색이 얼골에 나타나오니 이난 모든 걱졍과 금심은 쥬께 의탁하고 한푼 생애라도 힘쓰고부자런이 함이니 감샤하오며, 더옥이 감샤할거시 잇사니 평산 우번이교회에셔난 젼도회랄 셜시하고 누님 한분은 사람의 몸도 구졔하며 쇼년 형뎨 두분은 겸손한 말과 온유한 말노 령혼들을 쥬압호로 인도하고 또 평산 감바회교회도 이와갓치 서로 도아주고 또 연안 바루개교회에난 형뎨 한분이 그 집안 식구들과 쟉뎡하고 평산 우번이교회 형뎨 한분을 인쳥하야 자긔 잇난 교회 형뎨들을 인도하며 권면하여 달나고 집을 새로 짓고 이샤랄 식히난대 자긔가 돈량과 양식을 내여 재목을 담당하고 여러 교우들은 각각 힘을 내여 지금은 거의 사람이 들게되엿시니 이갓흔 겸년을 당한곳이라도 하나님 은혜 밧은 곳은 이러하오니 경향간 우리 쥬의 지톄된 형톄들은 이 몃곳을 위하야 우리 하날 아바지께 감샤도 하고 항샹 이보다 더 은혜 주시기랄 간졀이 긔도하심을 바라오며, 또 엇던 곳은 ㅅ갱각만 부자런이 하며 걱졍과 금심은 자긔들이 맛고 쥬께난 덜 의탁하난고로 주시난 은혜랄 잘 밧지 못하야 셥셥한 곳도 잇사니 이런 곳을 위하야 쥬께 더옥이 간구하기랄 바라나이다."(서상륜(1902.5.1). "셔상륜 통신" 그리스도신문. (영인본))
19) 선유위원
1905년 을사보호조약(乙巳保護條約)이 체결된 후 우국충정에 충만되어. 있는 분들이 의병을 일으켜 일제에 무력항쟁을 시도한다. 사실 항일의 기치를 높이 들고 일어난 의병의 뿌리는 멀리 임진왜란까지 소급해야 되나, 한말의 의병은 1895년에 있었던 명성황후 시해 사건과 동년에 선포된 단발령이 계기가 되어 봉기한 을미의병이 그 효시이다. 특히 을사보호조약 전후에는 병오의병이 있었고, 고종의 강제퇴위와 군대해산으로 야기된 정미의병은 강력한 힘을 가지고 항일전을 전개한 의병활동이었다.
이런 의병활동이 경기, 강원, 경상 등지에서 일어나 일제에 무력항거를 하자 의병운동은 요원의 불길처럼 전국적으로 확산된다. 이와 같이 의병활동이 전국에 확산되었지만 의병에 대한 기독교계의 반응은 매우 소극적이었던 것 같다.
을미의병 당시 구연영(具然英)은 300명의 의병을 일으켜 이천 중심의 민승천 부대에 합류하여 중군장으로 활약한 일이 있으나 이것도 그가 기독교인이 되기 전의 일이기 때문에 그의 의병활동이 기독교인의 의병 활동이라고 평하기에는 미흡하다. 의병활동에 대하여 기독교계가 침묵하고 있을 때 황해도에서만은 본격적인 기독교인들에 의한 의병활동이 전개된다.
황해도의 의병은 신천·장연·송화 등지에서 우동선·조윤봉·김만석·장동찬·고익균 등이 중심이 되어 항일전을 전개하였다. 이 때 우동선은 정동의려대장(正東義旅大將)으로 해서지방의 의병대장이 되었다.
그는 문화읍 출신으로 기독교인이며, 용맹하고 전술에도 능하여 정부군과 일본군을 여러 차례 격파하는 무공을 세우기도 한다. 이런 사회의 혼란을 극복하기 위하여 조정에서는 서상륜을 황해도 지역의 의병 선유위원(宣諭委員)으로 임명하였고, 저들의 해산과 귀순을 권고하는 역할을 부여하였다. 국가의 부름을 받은 그는 효유문과 면죄문빙(免罪文憑)을 의병대장에게 보냈는데, 우동선은 귀순을 거절하였을 뿐 아니라 기독교인으로 항일전에 참여하지 아니하는 서상륜 등을 꾸짖는 회신을 보내왔다.
때는 망국의 울분에서 의병을 일으킬 수밖에 없는 사회적 분위기가 고조되어 있었고, 국민 정서로 보나 교회와 교인들의 감정으로 보아 모두 의병을 동정하는 쪽으로 기울고 있는 시기이기에 의병들이 쉽게 귀순할 이유도 없고, 자신들을 회유(懷柔)하려는 서상륜을 비애국적인 사람으로 매도하는 것이 당연한 것처럼 여겨지는 추세였다. 그러기에 의병대장의 회답문도 부드러운 표현 대신 격렬한 표현으로 교회의 원로를 비난하고 있다.
이제 그 전문을 소개한다.
"아아, 교인동포여, 과연 신앙력이 있는가, 없는가. 조국의 위험한 경우와 백성들의 곤궁한 형편을 좀 생각해 볼지어다. 지금 이번 선유가 우리 백성들을 구원하기 위한 일이라고 하지만, 어찌 위원이라는 한 벼슬자리에 쏠려서 장곡천(長谷川), 이완용 두 원수의 앞에 머리를 숙이고 복종할 수 있는 일인가. 구미 역사상에서 보더라도 이태리의 가부이(加富爾)는 종교 신도로서 절대한 위업을 이룩했고, 미국의 화성돈(華盛敦)은 종교인으로서 혈전(血戰)하기 8년간에 독립의 터전을 이루었는데, 우리 나라의 교인 중에는 어찌 이런 인물이 없을 것인가. 이제 선유위원의 성질을 보건대 저렇게도 조잔(凋殘)한 것이 이렇게도 심하니 도리어 한심한 생각이 드는도다.") 기독교대백과사전. 제 12권. 1020쪽.
이 회답문에서 당시의 민족감정을 읽을 수 있다. 그러나 무모한 희생을 염려하며 사회의 안정과 생명 존중의 차원에서 선유에 임한 그의 심오한 심정을 이해하여야 할 것이다.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국가의 부름을 받고 사회의 안정을 위하여 봉사할 기회를 얻어 노력하였으나 그의 선유는 크게 주효하지 못하였다.
결국 우동선은 적탄에 맞아 부상을 입고 생포되어 투옥되었으나, 옥중에서 파수병의 총을 탈취하여 적군 8명을 사살하고 자신도 자결하여 조국 광복의 뜻을 이루지 못하고 순국하고 만다. 서상륜을 해서지역 선유사로 정부가 지정한 것은, 그가 교회를 섬기고 복음을 위하여 헌신한 업적을 인정하였을 뿐 아니라 많은 사람들에게 존경을 받기 때문이었을 것이라고 부연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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