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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령과 동행하는 삶은 기도의 습관에 달려있다.

Joyfule 2018. 1. 27. 00:17

 

 

    

성령과 동행하는 삶은 기도의 습관에 달려있다.

 

 

우리가 사는 시대는 정보의 홍수 속에서 살고 있다. 그래서 분별력을 갖추지 못하면 홍수에 빠져 허우적거리며 살아가게 된다. 신앙의 분야도 마찬가지이다. 우리네 주변에는 편의점 숫자보다 교회가 더 많이 있으며, 교회건물에 달랑 총회신학이라고 붙인 신학교에서 엄청난 수효의 목사들이 쏟아져 나와서 목사의 질을 형편없이 떨어뜨리고 있다. 그러나 정통을 주장하는 거대교단의 목회자나 이름 없는 군소교단의 목회자나 공통점이 있다. 그들은 성령과 동행하는 삶의 모본을 보여주지 않는다는 것이다. 그래서 성경지식이나 신학지식, 학문적 성취감, 출생배경, 가문, 교양, 말솜씨 등은 차이가 있을지 몰라도, 그들 모두는 성령이 함께 하는 증거나 능력, 변화나 열매가 보이지 않는다는 공통점을 드러내고 있다. 그래서 교인들은 성령과 동행하는 삶의 모습이나 열매 등으로 하나님의 종을 분별하는 기준으로 삼지 않고, 교회의 교단이 무엇인지, 교인 수가 몇 명인지, 교회가 얼마나 웅장하고 럭셔리한지, 교인 중에 유명인사가 얼마나 있는지, 교회에 얼마나 많은 편의시설과 다양한 프로그램이 있는 지로 평가하고 있다. 이렇게 성령과 동행하는 지도자가 없다는 게, 우리네 교회의 치명적인 폐해이다. 그래서 오늘은 성령과 동행하는 기도의 습관을 들이려면, 어떻게 해야 하는지 살펴보고 싶다. 예수님을 비롯해서 성경의 위인들이 내세운 것은, 우리네 교회의 목회자가 내세운 기준이 아니라 성령과 함께 하는 증거와 능력이었다. 그렇다면 그들은 어떻게 하였기에 성령과 동행하는 기도의 습관을 들이게 되었는가? 그래서 그들의 행적을 따라가 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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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러므로 너희는 장차 올 이 모든 일을 능히 피하고 인자 앞에 서도록 항상 기도하며 깨어 있으라 하시니라(21: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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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께서 나가사 습관을 따라 감람산에 가시매 제자들도 따라갔더니(22: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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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시다시피, 예수님은 하나님이 항상 자신과 함께 계신다고 말씀하셨다. 그렇다면 예수님은 어떻게 그런 놀라운 삶을 살 수 있었을까? 바로 위에 해답이 있다. 예수님은 항상 기도하는 습관을 들였다는 것이었고, 그 모습이 바로 항상 기도하며 깨어 있는 것이라고 말이다. 예수님은 집도 없었으며 항상 광야에서 기도하며 기거하셨다. 그러나 열악하기 짝이 없는 환경이었지만, 예수님은 그곳에서도 기도의 습관을 들이셨다. 성령께서는 필자에게, 이천년 전에 나는 기도의 사람으로 사람이 하는 것과 똑같은 훈련을 했다. 네 주인도 기도하는 습관이 필요한 만큼, 너희들은 기도하는 습관이 마땅하지 아니하냐고 말씀하시기도 하셨다. 그러나 당신은 예수님은 하나님이시니까, 태어날 때부터 우리와는 다른 남다른 능력을 지니고 있을 거라고 생각할지 모른다. 그래서 다른 사도들의 행적을 따라가 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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쉬지 말고 기도하라 ... 이것이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너희를 향하신 하나님의 뜻이니라(살전5:17,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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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리가 일제히 일어나 고발하니 상관들이 옷을 찢어 벗기고 매로 치라 하여 많이 친 후에 옥에 가두고 간수에게 명하여 든든히 지키라 하니 그가 이러한 명령을 받아 그들을 깊은 옥에 가두고 그 발을 차꼬에 든든히 채웠더니 한밤중에 바울과 실라가 기도하고 하나님을 찬송하매 죄수들이 듣더라 이에 갑자기 큰 지진이 나서 옥터가 움직이고 문이 곧 다 열리며 모든 사람의 매인 것이 다 벗어진지라(16:22~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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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의 구절은 바울이 어떻게 기도하였는지를 보여주는 대목이다. 바울사도가 요구하는 것은 쉬지 말고 기도하라는 것이었고, 빌립보에서 선교하다가 죽을 만큼 맞고 감옥에 갇혔을 때도 기도한 것으로 쉬지 않고 기도하는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 이 모습을 보면, 바울이 쉬지 않고 기도하는 게 어떤 모습이라는 것을 여실히 보여주고 있다. 예수님이 광야에서 기도하셨던 것이나, 바울이 감옥에 갇혔어도 기도하는 모습을 보이 는 것은, 기도의 습관이 들이지 않으면 불가능한 일이다. 그래서 당신은 항상 깨어서 기도하고, 쉬지 않고 기도하고 계시는가? 그 증거는 성령이 함께 하시는 증거나 변화, 능력과 열매로 보여주셔야 할 것이다. 아쉽게도 우리네 교회는 새벽기도나 금식기도, 작정기도 등의 기도행위는 하지만, 성령과 동행하는 삶을 사는 이들을 눈 씻고 찾아볼 수가 없다. 그도 그럴 것이, 1분짜리 영접기도를 마치며 성령이 자동적으로 들어오신다고 가르치고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더 이상 성령과 동행하는 기도의 습관을 들이 생각조차 하지 않는다. 그러나 울 영성학교는 아니다. 필자가 오랫동안 쉬지 않고 기도하는 습관을 들이고 난 후에, 성령과 동행하는 증거와 능력 그리고 열매를 보고 찾아온 사람들에게 성령과 동행하는 기도의 습관을 훈련시키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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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다면 먼저, 기도의 습관의 경지는 무엇일까 생각해보자. 성령께 말씀해주신 습관의 경지는, 몸이 기도로 반응할 때까지 기도하라고 하셨고, 기도하는 기계가 되어야 한다고도 말씀하셨다. 다른 표현으로는, 입에서 단내가 나도록 철저하게 기도의 삶을 살아야 한다고도 말씀하셨다. 그래서 하나님과 하나가 될 때가 되는 것이, 성령이 함께 하시며 동행하는 삶을 사는 것이 된다. 그렇다면 어떻게 해야 성령과 동행하는 기도의 습관을 들일 수 있는 지 살펴보도록 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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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아침과 밤에 정해진 시간에 1시간 이상씩 하나님을 부르는 기도를 하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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필자는 아침, 저녁에 고요한 시간을 내어 기도하는 습관을 들이고 있다. 그리고 낮에는 가끔씩 하고 있다. 성령께서 필자에게 다니엘의 기도습관을 본받으라고 하셨기에, 하루 세 번 기도를 하려고 애쓰고 있지만, 그게 생각보다 만만치 않다. 그러나 기도가 부족하면 즉각 신호가 온다. 그러므로 성령의 내주하는 상태를 민감하게 느끼기 때문에, 항상 신경을 곤두세우고 기도를 하고 있음은 두말한 나위가 없다. 성령이 내주하는 기도를 유지하려면 분위기를 잘 타야한다. 필자가 말하는 분위기란 기도 시에 집중하는 상태를 말한다. 기도할 때마다 집중이 잘 되게 하려면 최소한 아침, 저녁의 기도시간이 적어도 1시간 이상이 되어야 한다. 그래서 필자가 하루에 두 시간의 기도를 강조하는 이유이다. 1시간이상 기도가 필요하냐면, 하나님을 부르는 기도에 집중하려면 최소한 이 정도의 시간이 필요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주세요주세요하는 기도를 하는 사람들은 10분만 기도해도 기도할 게 없다고 한다. 그러므로 이런 기도는 자신만족일 뿐이지 하나님과 아무런 상관이 없는 기도이다. 그러므로 성령과 깊고 친밀한 기도를 하려면 아침기도의 습관을 잘 들여야 할 것이다. 그러나 많은 사람들이 아침에 기도시간을 내지 못한다. 그 이유는 밤늦게 잠자리에 들기 때문이다. 필자도 최소한 6시간 수면을 하고 있다. 그래서 필자는 늦어도 1230분 이전에는 잠자리에 들어 항상 오전 730분이면 일어난다. 그리고 아침에 2시간동안 기도하는 것을 규칙적으로 하고 있다. 그리고 밤에도 잠자리에 들기 전에 1시간~2시간정도 기도하고잠자리에 들고 있다. 이렇게 규칙적으로 방해받지 않는 시간에 기도하는 습관을 들이지 않는다면 성령과 동행하는 삶은 꿈도 꾸지 마시라. 언제가 성령께서 하루에 1시간도 기도하지 않는 사람이, 어떻게 나를 만나겠냐고 하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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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시간과 장소를 구분 짓지 말고 기도하는 습관을 들이라. 

우리네 교회에서는 기도회를 만들어서, 특정한 시간에 교회에 모여서 기도하는 것을 습관으로 들이고 있다. 그러나 그런 기도의 방식은 쉬지 않고 기도할 수 없다. 교회에서 사는 이가 없기 때문이다. 쉬지 않는 기도의 습관을 들이려면 시간과 장소에 상관없이 기도해야 한다. 그러므로 가장 많이 시간을 보내는 가정에서 기도하여야 하고, 학교나 직장에 가서도 혼자 있을 때나 틈을 내서 하나님을 부르는 기도를 해야 한다. 또한 운동을 할 때나, 직접 운전을 하거나, 차를 타고 여행을 하거나, 병원 등에서 차례를 기다리거나, 누군가를 기다릴 때도 기도하는 습관을 들여야 한다. 그러나 사람들은 그런 시간에 스마트폰을 들여다보거나, 음악을 듣거나, 멍하니 있거나, 아무런 의미 없이 시간을 보내고 있다. 미혹의 영들은 쉬지 않고 하나님을 부르는 기도를 방해하려고 집요하게 공격하고 있다. 그래서 필자는 기도행위를 인지하게 하기 위해서, 엄지손톱만한 계수기를 손가락에 끼워서 숫자를 누르면서 예수피를 외치라는 기도를 주문하고 있다. 왜나면 낮에는 이런 저런 일에 정신이 팔려서, 틈이 날 때도 기도하려는 생각조차 들지 않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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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돈 욕심을 버려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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돈 버는 일에 바빠서 그럴 것이다. 대부분의 직장인이라면 출근시간에 맞추는 일이 버겁다. 새벽처럼 일어나 세수하고 밥 먹고 옷을 챙겨 입고 나가서 전철이나 자동차로 출근하더라도 빠듯한 일이다. 게다가 밤늦게까지 일하고 나면 파김치가 되어 전철에서 꾸벅꾸벅 졸다가 퇴근하자마자 저녁을 먹는 둥 마는 둥 하고 TV뉴스를 보다가 잠자리에 드는 이들이 적지 않을 것이다. 자영업을 하는 사람들은 퇴근시간이 밤 열시가 넘는 게 다반사이다. 그래서 자정이 넘어서 피곤에 절어 집에 돌아오는데 어떻게 기도할 수 있겠는가? 설령 기도를 시작하였다고 하더라도 졸려서 10분을 채우지 못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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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입을 줄이는 것은 살을 베어내고 뼈를 깎는 아픔을 동반하는 일이다. 자신이 죽어야 가능한 일이다. 예수 그리스도의 제자가 되려면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십자가를 지고 목숨을 바쳐야 하며 모든 소유를 버려야 할 것을 요구한다. 순교까지는 아니더라도, 수입이 줄어드는 것을 감수하더라도 기도할 시간을 내고 기도할 수 있는 환경을 만들어야 한다. 이런 결연한 각오가 없다면 성령과 내주하는 기도습관을 들이는 일은 어렵다. 많은 사람들이 돈 버는 일에 바빠 기도할 시간을 내지 못한다고 한다. 그래서 예수님은 재물과 하나님 중에 하나를 선택해야 한다고 말씀하신 이유이다. 돈을 많이 버는 직업이나 자영업도 버리거나 수입이 줄어드는 것을 감수해야 할 것이다. 그래서 기도할 시간을 내고 몸이 고단하게 만들지 말아야 한다. 그래서 시간이 나면 푹 쉬고, 육체와 마음을 항상 가벼운 컨디션으로 유지해야 할 것이다. 그런 결연한 각오를 실행에 옮긴다면 당신은 이미 성령과 동행하는 기도습관을 들인 것과 진배없다.

 

4. 삶의 가지치기를 해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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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도에 가장 필요한 자질은 집중력이다. 성령이 내주하는 기도의 강을 건너기 위해 가장 필수적인 조건이 기도에 집중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최소한의 삶에 필요한 행위를 제외하고는 기도에 집중해야 한다. 그러나 많은 분들이 기도에 집중하지 못하고 있는 것도 사실이다. 바빠서 기도할 시간이 없다고 하는 이들은 사실, 기도에 집중하지 못하고 있다고 말하고 있는 것이다. 잡념이 들어오고 졸린다고 하는 이들도 그렇다. 남편을 챙기고 자녀를 돌보느라, 직장 일을 하느라, 친구들을 만나느라, TV나 영화, 게임을 하느라, 쇼핑을 하느라 기도하지 못했다는 말도 기도에 집중하지 못했다는 뜻이다. 일하는 데 바빠서, 집안일 하느라고, 몸이 고단해서 기도하면 졸기 바쁜 사람도 그렇다. 시간이 없어 기도 못하는 게 아니라, 기도를 삶의 최우선순위에 놓지 못한다는 말이다. 기도란 하나님이 가장 기뻐하는 행위이다. 하나님은 자신을 간절히 찾아오는 자를 가장 기뻐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어떤 이들은 예배의식이나 교회 봉사, 심방 심지어는 기도회에 참석하느라고 기도하지 못한다고 한다. 기도회에서 기도한다고 다 같은 기도가 아니다. 자신들의 요구사항을 큰소리로 외치는 기도가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기도가 아니라, 하나님을 찾고 찬양하고 경배하고 회개하고 감사하고 십자가의 보혈의 의미를 깨닫는 기도가 하나님이 기뻐하는 기도이다. 그런데 하나님이 기뻐하지 않는 기도를 하는 기도회에 참석하느라고, 성령이 내주하는 기도를 하지 못하는 아이러니한 일이 생기는 것이다. 기도를 못하는 이유가 무엇이든 간에, 기도하지 못하는 것은 기도에 집중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그렇지만 집중에 필요한 특별한 비결은 없다. 오직 기도만이 살길이라는 생각을 가지고 기도를 삶의 최우선 순위에 두어야 한다. 그리고 생존에 필요한 것을 제외하고는, 기도하는 일에 최선을 다해야 한다. 삶의 가지치기를 하지 않으면 기도에 집중할 수 없다. 기도하는 시간을 내기도 어렵고, 설사 기도자리에 앉아 있더라도 잡념으로 인해 몰입을 할 수 없다. 하나님은 질투의 하나님으로, 당신의 자녀가 자신보다 더 사랑하는 것이 무엇이든 간에 용납하지 않으신다. 기도에 전부를 거는 사람만을 찾아오시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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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 인내하고 기다려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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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도의 습관을 들이는 또 다른 자질은 인내심이다. 하나님은 기도에 집중하기만 하면 금세 오시는 분이 아니다. 끈기를 가지고 찾는 지를 관심 있게 지켜보신다. 그래서 혹독하게 자신을 찾는 자녀 중에서, 절대로 놓지 않겠다는 다부진 인내심을 읽었을 때 비로소 찾아오시는 분이시다. 그러므로 기도를 시작하면 하나님을 전심으로 찾고 성령의 내주를 간구하면서, 성령이 내주할 때까지 기도의 끈을 놓아서는 안 된다. 그러나 아쉽게도 적지 않은 사람들이 기도를 하다가, 오지 않는다고 불평을 하고, 어렵다고 푸념을 하며, 힘들다고 내려놓는 사람들은 거들떠보지 않으신다. 사실 하나님이 누구신가? 우리의 생사화복을 주관하실 뿐 아니라, 지옥에 던져 놓으실 수 있는 두려운 분이시다. 그런데 그분이 우리를 찾아오는 게 어디 보통일인가? 그러므로 하나님을 끈기 있게 기다리지 못한다면 믿음이 없다는 증거이다. 하나님이 가장 기뻐하시는 조건이 믿음이다. 그분은 자신을 간절히 찾는 자들에게 찾아오신다고 성경에 약속하지 않으셨는가? 그런데 그 기간을 못 참아서 불평을 하고 푸념을 늘어놓는 것은 하나님의 약속을 믿지 못한다는 증거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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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브라함은 떠날 곳을 알지 못했어도 하나님의 명령에 즉각 순종했지만, 죽을 때까지 약속의 땅을 알지 못하고 이 땅을 떠났다. 그럼에도 그는 불평 한마디 하지 않았다. 요셉은 16세에 애굽의 종으로 팔려 지하 감옥에서 죽음을 기다리다가, 30세에 되어서야 비로소 하나님의 능력으로 밖으로 나올 수가 있었다. 그가 십여 년이 넘는 세월을 기다리지 못하고 자포자기했다면 하나님이 그를 애굽의 국무총리로 사용하셨을까? 모세는 40세에 애굽을 도망쳐 80세가 되어서야 비로소 하나님의 부름을 받았다. 호호백발 할아버지가 될 때까지 굳건한 믿음을 버리지 않았기에, 놀라운 능력을 지닌 하나님의 종으로 사용하셨다. 하나님은 그들의 인내심을 오랫동안 지켜보다가 낙점하신 것이다. 그런데 겨우 몇 달을 참지 못하고 기도를 내려놓는 당신에게 찾아오시는 하나님은 없다. 하나님이 오실 때까지 겨우 몇 달을 참고 기다리는 것은, 불타는 지옥에 떨어져 영원히 고통을 당하는 것보다 훨씬 쉬운 일이다. 그러나 아쉽게도 믿음의 눈이 없기에, 기다리지 못하고 손을 털고 일어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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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렇게 하나님을 만나는 비결은 바로 집중력과 인내심이다. 그러므로 하나님이 오실 때까지 기도를 삶의 최우선순위를 두고 집중하여야 하며, 오실 때까지 참고 기다리는 인내심을 보여주어야 한다. 세상에 쉬운 일은 없다. 쉬운 일이 있다면 그만큼 가치 없는 일다. 가치 있고 귀중한 일일수록 송곳 같은 집중력과 인내심을 요구한다. 천국의 자격을 얻으며 이 땅에서 평안하고 형통한 삶을 얻는 대가로, 성령이 내주하실 때가지 혹독하게 하나님을 부르며 끈기 있게 기다리는 것쯤은 아주 쉬운 일일 것이다. 그런 쉬운 일도 하지 못한다면, 당신에게 다가오는 하나님의 손길은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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필자는 지금까지 수백 명의 사람들에게 성령이 기도하는 기도의 훈련을 해오고 있다. 감사하게도, 필자의 뒤를 따라서 성령과 동행하는 기도의 습관을 들인 사람들이 나타나고 있다. 그러나 적지 않은 이들은 기도하다가 중도에 포기하였거나, 기도는 하고 있지만 지지부진에 빠져 있는 이들도 허다하다. 하나님은 공의의 하나님이시기에, 누구에게나 똑같은 잣대를 들이대신다. 그동안 우리네 교회에서 성령과 동행하는 사람들이 나타나지 않은 이유는 하나님을 목숨을 다해 사랑하지 않아서이고, 그래서 죽기 살기로 하나님을 찾지 않아서 이다. 그러나 영성학교는 그런 사람을 훈련시켜 악한 영과 싸워 승리하는 정예용사를 양육하고 있다. 끝으로 성령께서 필자에게 말씀해주셨던, 성령이 찾아오시는 조건을 올려드리면서 마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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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으로 나를 찾는 자는 기도의 본질을 모르는 자다. 기도의 본질은 나이고 자기도 알 수 없는 자를 만나는 것이므로, 그분이 누구인지 알려면 마음으로 만날 분을 사모하고 이름을 부르면서 자기에게 오시도록 마음을 다하고 뜻을 다하고 나를 찾아주시도록 보이지 아니하고 들리지 아니한다 해도 오직 기도하는 일에 모든 집중을 다해서 일상에서도 기도하는 마음이 떠나지 아니하고 자기에게 오시도록 집요하게 조르는 것이다. 모든 이들이 이 기도를 하지 않고 중도에 포기하고 내가 그를 만나려고 주리고 목마른 자가 오로지 나를 찾고자 하는 것을 혹독한 마음을 읽었을 때 내가 그를 만나려고 하고 있는데 그들은 중도에 포기하고 자기들의 입으로 하나님은 자기에게 오시지 않는다고 불평만 하고 있다. 이렇게 기도하는 자는 어떤 일에서도 인내하지 아니하고 자기 고집대로 모든 일을 하나님 없이도 자기의 일을 하겠다는 사람이다. 이런 사람은 나를 만날 수도 나는 그런 사람의 아버지도 아님도 알 것이라. 모든 사람들이 이런 기도를 하고 정성스럽고 끈질긴 자들이 나를 만나는 것이지 조급하고 자기중심으로 나를 마나려고 하는 사람은 나도 그들을 만날 수 없다는 걸 알려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