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엄상익 변호사 에세이 - 검은 은혜

Joyfule 2024. 4. 26. 18:35

 

엄상익 변호사 에세이 - 검은 은혜  

 

기억의 빙하에서 떨어져 나온 고통의 기억들이 마음속 강물 위를 둥둥 떠내려오고 있다. 마주하는 첫번째 고통의 얼음덩어리 속에는 이십대가 스산하게 저물어갈 무렵의 내가 들어 있었다. 나는 부천에서 서울로 가는 시외버스의 맨 뒷좌석에서 차창 밖을 보고 있었다. 짙은 절망감이 검은 안개처럼 온 몸에 퍼지고 있었다. 어찌할 수 없이 나의 꿈을 접어야 할 때가 온 것이다. 남들이 대학생이 되어 즐겁게 어울려 놀 때 어둠침침하고 쿰쿰한 냄새가 나는 고시원에서 웅크리고 있었다. 사랑대신 야망을 품고 암자의 뒷방에서 뒹굴었다. 더 이상 앞길이 보이지 않았다. 들판에 홀로 남겨진 허수아비처럼 나만 덩그라니 혼자 남아 지나가는 바람에게 절망을 호소하고 있었다. 나는 처음부터 안 될 존재였었다는 사실이 비로서 깨달아졌다. 이상하게 속에서 돌소금 냄새가 솟아 오르는 느낌이면서 구역질이 났다. 깊은 절망감 속에서 나는 알맹이가 빠져나간 빨래같다고 할까. 그때의 절망감이 인식의 깊은 벽에 단단하게 붙어 더러 꿈속에서 재연되고 있다.​

오십대 초 앞이 잘 안 보이기 시작했다. 한쪽 눈에 고장이 났다. 고장은 다른 쪽 눈에도 옮겨진다는 소리를 듣고 무서웠다. 책을 읽는 것이 나의 주된 일인데 그걸 못하면 죽은 목숨이나 마찬가지일 것 같았다. 수술을 했는데 천분의 일 확률의 부작용이 내게 왔다. 확률이 작아도 내게 오면 백퍼센트였다. 보지 못해 책을 읽을 수 없다면 차라리 죽는 게 낫다는 생각이 들었다. 세상 풍경이 내게서 떠나면 그때 어떻게 죽지? 하고 고민했다. ​

내 나이 육십이 되는 해 갑자기 성경속 광야로 들어가고 싶은 마음이 들었다. 어떤 존재가 갑자기 내 마음을 움직여 그렇게 중동의 사막 지역으로 끌고 갔다. 운명이 사람을 어떤 장소로 데리고 간다는 글을 읽은 적이 있다. 나는 또 천문학적인 나쁜 확률에 걸렸다. 중동에만 사는 독충에 물린 것이다. 그 독충의 알은 몸속에 숨어 있다가 거기서 부화 되어 둥지를 틀고 내 몸을 숙주로 해서 성장하는 존재였다. 광야에서 돌아온 몇 달 후 팔목에 빨갛게 종기 같은 것이 솟아올랐다. 그 종기는 다시 부글부글 끓어오르면서 수많은 알들을 내뿜었다. 다리에도 구멍이 뚫리고 그 구멍은 점점 커져갔다. 내 몸이 산채로 벌레에게 먹히고 있었다. 국내에 그 걸 고칠 수 있다는 의사는 없었다. 나는 혼자 골방에 앉아서 울었다. 그 사실을 아는 사람들이 죽어가는 나를 보면서 안타까운 눈길을 보냈다. 나는 무서웠다. 살고 싶었다. 그런 것들이 마음속 강물을 떠내려 오는 커다란 빙하조각들이다. 나는 칠십이 넘은 지금까지 살아있다. 보이지 않는 존재가 나를 여기까지 데리고 온 것 같다. 내게 왜 그런 희귀한 고통들이 다가왔던 것일까. 그 고통이 전하려고 한 암시는 무엇이었을까.​

이십대 말 내게 다가온 절망의 고통은 내가 빈정거리기까지 한 신에게 간절히 기도하게 했다. 나 자신이 먼지 같은 존재라는 걸 자각하게 했다. 주제를 알게 하고 헛된 야망을 내면에서 불태워 없애버리게 했다. 그 고통은 나를 조금은 겸손하고 부드럽게 만든 것 같았다.​

앞이 잘 안 보이는 고통도 그 나름대로 의미가 있는 것 같다. 나는 고쳐 달라고 빌었다. 내면의 깊은 곳의 어떤 존재가 내게 속삭이는 것 같았다. 됐다고 그냥 받아들이라고.​

아직 한쪽 눈이 남아 있는데 왜 ‘완전성’이라는 관념에 집착을 하느냐고 되묻는 것 같았다. 나는 받아들이기로 했다. 어쩔 수 없는 상황에서의 단념이다. ​

독충에 물렸을 때 겁을 먹고 울었지만 다른 한 편으로는 계단 틈의 작은 제비꽃 같은 즐거움이 무엇인지를 발견했다. 죽음을 두려워 하면서도 나는 따뜻한 물이 담긴 욕조에 들어가 몸을 담그고 싶었다. 그게 그렇게 즐거운 일인지 건강할 때는 전혀 몰랐다. 진부한 일상 자체의 작은 일들이 감사였다.​

칠십년이 넘게 고통의 바다를 건너 왔다. 변호사를 사십년 가까이 하면서 매일같이 다른 사람들의 고통과 슬픔을 보고 들었다. 사람들은 저마다 자기가 가장 괴로운 존재라고 생각하는 것 같다. 인간에게 던져지는 고통들의 정체는 무엇일까. 고통과 슬픔이 있을 때에야 나는 진정한 나의 그림자 정도를 볼 수 있었던 것 같다. 슬픔과 고통의 극한까지 가야 그분과 진정한 만남이 이루어지는 건 아닐까.​

성경을 읽다 보면 ‘주의 지팡이와 막대기’가 나타난다. 양치는 목자가 길을 벗어난 양을 초원으로 몰기 위해 가지고 있는 지팡이로 때리는 것 같다. 인간의 고통이란 그분의 지팡이에 얻어맞는 괴로움이 아닐까. 고통은 인간을 강하게 만들기도 하고 그걸 인내하는 과정에서 인간으로서의 정체성이 형성되기도 한다. 고통은 그분이 주는 검은 은혜가 아닐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