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엄상익 변호사 에세이 - 제3의 인생

Joyfule 2023. 11. 6. 12:08





      엄상익 변호사 에세이 제3의 인생



회색 구름이 바다를 묵직한 납빛으로 만들어 놓은 아침이다. 가느다란 빗방울이 창문에 사선을 비쳤다. 내가 묵고 있는 실버타운의 어느 방에선가 낮고 잔잔한 색소폰 소리가 흘러나와 잔디 정원의 허공에서 너울을 일으키고 있다. 흘러간 옛노래인 황성옛터가 나온다. 예전에 박정희 대통령의 애창곡이라고 했다. 이어서 귀에 익은 찬송가가 연주된다. 얼핏 이름이 생각나지 않는다. 

어떤 노인이 색소폰을 연주하는지는 몰라도 그 소리가 부드럽고 경지에 오른 느낌이다. 나이 팔십의 ‘이대령’이 부는 색소폰인가? 연대장 출신의 그를 실버타운 사람들은 ‘이대령’이라고 불렀다. 

얼마 전 식당에서 만난 이대령은 시골교회에서 색소폰을 연주하기로 했다면서 한 곡을 천 번은 반복해서 연습해야 한다고 했다. 아마도 그의 끊임없는 연습이 마침내 한 경지를 넘어섰는지도 모른다. 

실버타운 노인들 중에는 뒤늦게 악기를 배우는 분들이 많다. 공과대학에서 전기기술에 대해 평생 가르치던 교수분이 있다. 한쪽 눈이 시력을 잃어 불편하면서도 피아노를 배우고 있다. 열정이 대단한 것 같다. 시골마을에 음대를 졸업했다는 분이 있다는 걸 듣고 찾아가서 특별 레슨을 받는다고 했다. 실버타운의 피아노실을 지나가다 보면 ‘도도솔솔 랄라솔’이라는 계명이 생각하는 동요를 치는 그의 모습이 보이곤 했다.

칠십중반의 나이에 뭘하려고?하는 생각이 들곤 했다. 그런데 그게 그렇지 않은 것 같다. 요즈음 그의 피아노 소리를 들은 사람이 어느새 그가 상당한 경지에 오른 것 같다고 했다. 실버타운에서 맞이하는 제삼의 인생은 세상의 눈치를 보지 않고 자기가 하고 싶고 좋아하는 걸 마음대로 하는 게 아닐까. 신문에서 뒤늦게 피아노를 배워 꿈을 이룬 사람의 얘기를 읽은적이 있다. 예순 세 살의 일본인 도쿠나가 요시아키씨는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김양식을 하면서 살아왔다. 유일한 취미인 파친코를 즐기고 일본 전통가요 엔카를 듣고 부르기를 좋아했다. 

그가 쉰 두살이던 어느날 텔레비젼에서 육십대 나이에 데뷔한 피아니스트가 연주하는 리스트의 ‘라 캄파넬라’를 들었다. 전혀 관심이 없던 클래식 음악이었지만 난생 처음 감동을 느끼며 눈물이 흘렀다. 그는 자신이 무엇을 추구하며 살아왔는지 회의가 느껴지고 슬픈 마음이 들었다. 그는 피아노를 쳐보고 싶었다. 그렇지만 배운적이 없었다. 당연히 복잡한 악보를 볼 줄도 몰랐다. 

그러나 그가 감동을 받은 ‘라 캄파넬라’를 칠 수 있게 된다면 새롭게 태어날 것 같다는 느낌이 들었다. 그는 유튜브에서 음에 맞춰 건반에 불이 들어오는 ‘라캄파넬라’연주 영상을 발견했다. 건반 하나하나를 독학으로 익혔다. 일이 끝나면 집중해서 하루에 여덟시간씩 연습했다. 팔이 아팠다. 통증이 심해 매일 밤 찜질을 해야 잘 수 있었다. 그의 그런 피아노 연주 연습영상은 유튜브로 세계에 퍼졌다.

그는 또 다른 의미에서 세계적인 연주자가 됐다. 많은 일본인들이 그의 영상을 보고 응원을 보냈다. 지금 그는 어부 일을 하며 일본 전역에서 초청받아 연주를 이어가고 있다. 한 유치원의 꼬마가 그의 연주를 듣고 일년 후 그의 앞에서 ‘라 캄파넬라’를 능숙하게 연주 했다. 많은 사람들이 그의 영향으로 피아노를 배우기 시작했다. 그는 마침내 그가 처음에 감동을 받았던 피아노연주자와 함께 무대에 섰다. 그에게 절대 이루어질 수 없었을 것 같은 꿈이 이루어졌다. 그의 삶을 다룬 극영화가 만들어지고 있다. 폴란드 감독이 그의 김양식장과 연주회등 일거수 일투족을 뒤쫒으며 다큐멘터리 영화를 찍고 있다. 그는 꿈을 향해 계속 노력하면 기적이 일어날 수도 있다고 한다. 노력하는 사람에게는 손이 닿는 거리에 기적이 와 있다고 한다. 그걸 잡을지 그냥 지나칠 지는 자신에게 달려있다고 한다. 그는 피아노를 잘 치는 폼 나는 할아버지로 늙고 싶다고 했다. 노인들에게 용기를 주는 좋은 얘기였다. 

서초동의 이웃 변호사중에는 하루에 여덟시간씩 바이얼린 연습을 해 온 사람이 있다. 판사시절 우연히 감동을 받고 바이얼린을 든지 이십년이 넘었다고 했다. 그의 연주실력은 프로에 가깝다고 했다.

나 자신이 푸르렀던 젊은 날부터 진정으로 좋아하는 것은 무엇이었던가. 나는 그걸 하면서 살아온 것일까. 노년은 조용한 호수 위에 떠 있는 배 같은 세월이라고 하는데 나는 지금 무엇을 하며 하루하루를 보내고 있는 것일까. 그게 내게 진정한 즐거움을 주는 것일까 생각해 봤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