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감성을 위한 ━━/에세이

몽당연필 / 최선자

Joyfule 2015. 11. 9. 00:46

 

10-12시 몽당연필의 고품격 음악방송~~^^

 

몽당연필 / 최선자

 

 모시 적삼을 생각나게 했던 날씨가 지쳤는지 수그러들었다. 가는 곳마다 솔 향 가득한 강릉, 혼자서 떠나온 이 박 삼 일간의 여행 마지막 날이었다. 아쉬운 마음을 접고 숙소를 나오자 해변에서 들었던 파도 소리가 귓가를 맴돌았다. 아침 산책길에 만났던 청설모도 눈에 아른거렸다. 문학의 발자취를 찾아보는 것도 좋았지만 자연에 흠뻑 취할 수 있어 더 좋았다. 모처럼 혼자만의 여행은 나 자신을 돌아보는 기회이기도 했다.

 

 김시습 기념관을 가기 위해 들렀던 버스정류장에서 있었던 일이다. 세월의 발자국 가득한 얼굴, 닳고 닳아버린 손톱에 눈길이 멈췄다. 순간, 낯선 할머니 손을 덥석 잡고 만지자 마음이 손등을 타고 마음으로 건너갔다. 할머니는 빙그레 웃으며 그윽한 눈으로 내 얼굴을 쳐다봤다. 아! 할머니는 손이 언어였다. 모음과 자음이 다 들어 있는 손, 허공에 긴 문장을 쓴 몽당연필이었다. 말을 못하는 장애를 가진 할머니는 눈빛으로, 나는 울컥하는 마음으로 많은 이야기를 나눴다.

 

 평생 허공에 문장을 쓰며 살아야 하는 손, 내 마음이 어떻게 한눈에 그 손을 알아봤는지 알 수 없는 일이었다. 집에 돌아와서도 며칠 동안 가슴이 먹먹했다. 친정엄마는 외할머니의 아픈 손가락이었다. 몽당연필이 되어버린 손을 가슴에 얹고 먼 길을 떠났다. 십일 남매를 키우면서 수없이 허공에 쓴 사랑의 단어들. 엄마의 말을 우리 형제들은 눈으로 들었고 천둥소리를 듣지 못하는 엄마도 자식들 숨소리를 눈으로 들었다. 세월이 흐르면서 엄마의 연필은 점점 몽당연필이 되어갔다. 하지만 친정을 가는 것도 사치일 만큼 힘든 생활 속에서 엄마는 항상 뒷전이었다. 나는 입으로 말하고 내 아이들은 귀로 들으면서 잊어가고 있었다.

 

 부모는 기다려주지 않는다는 것을 그때는 까맣게 몰랐다. 형편이 나아지면 엄마한테 효도하리라 미루며 자식들에게만 신경을 썼다. 엄마는 언제나 우리 곁에 있을 것으로 생각했다. 위암 말기로 삼 개월의 시한부 삶이 남았을 때 당신의 증세를 몽당연필로 허공에 쓰는 것을 보고서야 나는 제정신이 들었다. 그동안의 불효에 뒤늦게 후회하며 통곡했지만 소용없는 일이었다. 엄마는 그렇게 내 곁을 떠났다.

 

 서른여섯 살의 아내와 어린 딸들을 두고 떠난 외할아버지는 마지막에 외할머니 손을 잡고 엄마를 평생 데리고 있어 달라고 부탁했다고 한다. 보기 드문 미인이었던 외할머니는 수절한 채 외할아버지의 유언을 지켰다. 우리 자매들이 청상과부인 미인을 보쌈해가지 않았다고 그 시절 남자들을 원망하자, 개가하려고 맘을 먹었다면 했겠지만 딸들 눈에서 눈물 흘리게 할 수 없었다고 했다. 외할머니가 재혼하지 않은 이유 중에 엄마의 영향이 제일 크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이 든다.

 

 엄마는 두세 마디의 말문이 트이고 청력을 잃었다고 했다. 홍역을 앓으며 심한 고열에 시달린 후 더는 소리를 듣지 못했다. 외할머니는 병마를 떨치고 일어나준 딸이 대견해서 기쁜 나머지 처음에는 청력을 잃었는지도 몰랐다고 한다. 아무리 불러도 돌아보지 않은 딸을 보고 하늘이 무너지는 것 같았다고 했다. 사방팔방 용하다는 의원을 찾아다녔지만 허사였다. 외할아버지는 애꿎은 담배 연기에 한숨을 실어 보냈고 외할머니는 수없이 눈물을 쏟았다고 한다. 어린 딸의 손이 허공에 언어를 쓰는 연필로 변해가는 것을 속수무책 지켜봤을 부모의 마음을 어찌 짐작할 수 있을까. 평생 가슴에 피멍을 안고 살았으리라.

 

 외할머니는 말 못하는 딸을 둔 죄로 사위 때문에도 한없는 속울음을 울었을 것이다. 아버지는 농번기에도 주막에 진을 치고 오가는 사람들을 불러 술을 사주었다. 오죽했으면 날아가는 까마귀도 술을 사준다고 소문이 났을까. 주사 또한 심했지만, 외할머니는 멀쩡한 사위가 당신 딸하고 사는 것만으로 모든 허물을 덮어 주었다. 유년시절 아버지의 기억은 술에 취해 있지 않으면 항상 책을 읽는 모습이었다. 나는 술이 과한 아버지를 늘 원망했다. 그러던 어느 날 아버지를 조금 이해하게 된 계기가 있었다.

 

 숫눈 같은 마음에 입은 상처는 평생 잊히지 않은 것 같다. 초등학교 오 학년 때 일을 지금도 생생하게 기억한다. 삼반은 선생님이 공석이어서 남자는 일 반, 여자는 우리 반에서 수업을 받았다. 날마다 청소시간에 삼반들은 자기 교실에 가서 놀았다. 그날도 마찬가지여서 두 반 여자애들이 잠깐 말다툼을 했다. 청소 감독을 맡은 부반장이었던 내가 청소하기 싫으면 수업도 우리 교실에서 하지 말라고 했다. 청소시간이 끝나자 언제 그랬냐는 듯 재잘거리며 하교했다.

 

 일은 다음 날 터졌다. 그 시절 우리는 사적 세우는 아이라는 말을 했다. 치맛바람을 날리는 엄마 덕분에 선생님들이 편애하는 아이라는 뜻이다. 소문난 편애 받는 여자아이가 삼반이었다. 나는 학창시절 처음이자 마지막 매를 그때 맞았다. 교무실에서 찾는다기에 갔더니 교무주임이 다짜고짜 뺨을 세 대나 후려쳤다. 눈에서 번갯불이 번쩍했다. 영문도 모른 채 닭똥 같은 눈물이 뚝뚝 떨어졌다. 삼 반 아이들을 우리 교실에 못 오게 했다고 나를 퇴학시키겠다고 협박했다.

 

  이유는 한 마디도 묻지 않은 채 때리고 협박했던 교무주임이 야속했다. 또 당신 딸 말만 듣고 일방적으로 말했을 치맛바람 엄마도 미웠다. 하지만 미움보다 더 큰 슬픔이 어린 내 가슴을 흔들었다. 내가 왜 그런 말을 했는지, 우리 엄마는 항변해 줄 수 없기 때문이었다. 아버지도 나처럼 슬퍼서 술을 마실 것이라고 생각했다.

 

  허공에 언어를 쓰는 엄마였지만 눈썰미가 좋아서 길쌈, 바느질, 음식 솜씨까지 ?동에 소문이 자자했다. 아이스크림처럼 입안에서 사르르 녹던 산자 맛은 지금도 잊을 수 없다. 꼭 전수받고 싶었는데 삶에 쫓기다 보니 뜻을 이루지 못했다. 엄마는 대가족의 뒷바라지에 농한기에도 온종일 종종걸음 치고, 밤이면 등잔불 아래서 수를 놓고 바느질을 했다. 물레 소리, 베 짜는 소리가 자장가였다. 무명천에 곱게 염색해서 자식들 옷을 해주었다. 외할머니와 아버지는 여름이면 모시 한복, 겨울이면 명주 한복, 명주 두루마기를 입고 외출했다. 엄마 정성이 듬뿍 담긴 천연재료로 만든 이불을 덮고 자고 옷을 입었지만, 시장에서 산 기성복을 입은 친구들이 부러웠다. 아침 일찍 일어나고 밤늦게 잠자리에 들었던 엄마, 한 번도 잠든 모습을 보지 못하고 자랐다. 하나둘도 아니고 형제들의 사춘기도 제각각이어서 엄마가 허공에 썼던 긴 문장을 지나가던 바람이 주워 먹는 일도 있었다. 하지만 하나같이 잘 자라준 것도 따뜻한 품과 몸소 자식들한테 보여준 부지런함 때문일 것이다.

  말을 할 수 없으니 아무리 속이 상해도 다른 사람에게 털어놓지 못하고 늘 혼자 삭혔으리라. 가장의 짐을 지고 허덕이는 딸을 보며 눈물도 많이 흘렸을 것이다. 하지만 나는 엄마가 떠나고 십 년이 지나서야 세 아이를 남부럽지 않게 키워놓고 만학도가 되었다. 무서리가 흠뻑 내린 중년의 끝자락에 방송대 국어국문학과에 입학한 것이다. 흐뭇해하며 이제는 한시름 놓았다고 몽당연필을 들어 허공에 쓰는 엄마 모습을 상상해본다.

 

  한 번도 엄마와 여행을 하지 못한 딸의 한을 알았을까. 낯선 여행지에서 난생처음 덥석 잡아본 손의 임자가 엄마를 닮은 사람이었다니, 아직도 믿기지 않고 가슴이 뭉클하다. 뒤주 밑이 긁히면 밥맛이 더 난다는 속담은 무엇이 없어진 다음에야 그것이 더 간절하게 생각난다는 뜻이다. 불효자에게 그것이 부모인 다음에야 오죽하겠는가. 차마 용서해 달라고 말하지 못하고 눈물이 볼을 타고 흐른다. 엄마가 몽당 연필로 문장을 썼던 허공을 본다. 거기, 환하게 웃는 엄마 얼굴이 있다.

 

출처: 제12회 삶의 향기 동서문학상 수상작품집

 

'━━ 감성을 위한 ━━ > 에세이' 카테고리의 다른 글

인생 소묘 / 이정순  (0) 2015.11.12
구룡포에 서다 - 조숙  (0) 2015.11.10
숲, 탄생의 터전 / 박시윤  (0) 2015.11.07
외롭게 한 죄罪 / 반숙자  (0) 2015.11.05
가을 - 최남선  (0) 2015.11.0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