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영성을 위한 ━━/김요한목사

육신은 가능성이 없다

Joyfule 2024. 3. 4. 13:28


   육신은 가능성이 없다(롬8:5-8)



 말씀대로 순종하면 하나님이 복을 주신다고 말하기도 합니다.

그건 율법을 다 지키면 하나님이 의롭다 하신다는 말과 같습니다.

지금 각종 방송에서 나오는 설교나 토크 등은 거의 거짓말입니다.

목적윤리는 맞지만 방법윤리가 없기 때문에 참말 같은 거짓들입니다.

인간은 가르친다고 결코 변하지 않는다고 성경은 말씀하십니다.

그리스도 안에 새로 창조된 피조물로서 죄에서 자유와 진리 안에서

자유를 얻어 성령을 따라 행하지 않고는 결코 사람이 변하지 않습니다.

 

Q. 왜 육신이 가능이 없다고 하는가요?

“육신을 따르는 자는 육신의 일을

영을 따르는 자는 영의 일을 생각하나니.”

 

A. 왜냐하면 생명의 성령이 아니면 영의 생각을 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생명의 성령은 우리의 생각을 바꾸십니다. 따라서 자신이 지금 육신을 

따르고 있는지 영의 일을 하고 있는지 항상 분별해서 비교해 보도록 하세요. 

항상 자신의 상태를 구분할 수 있어야 합니다.

코로나 사태 이후에 모이는 일이 소홀하게 되어 교회가 쇠퇴해 간다고 합니다.

그건 코로나가 아니어도 이미 계시록에 기록이 된 대로 진행되고 있는 겁니다.

그러므로 마지막 때는 혼자 신앙생활 하는데 성공해야 끝까지 살아남습니다.

내가 생명의 성령의 법으로 죄와 사망의 법을 이기고 있는가?

내가 그리스도 안에서 자유와 평강을 누리는 감사와 찬양이 있는가?

기도의 골방에 머물지 않는 사람은 다른 사람에게 결코 유익을 주지 못합니다.

자신이 스스로 설 수 없는 사람이 어떻게 다른 사람에게 유익을 줄 수 있겠습니까?

육신의 생각과 영의 생각은 뚜렷하게 두 쪽으로 나누어집니다.

육신의 생각은 언제나 말초를 향하고 영의 생각은 중추로 향합니다.

 

Q. 생각의 결과는 무엇인가요?

“육신의 생각은 사망이요 영의 생각은 생명과 평안이니라”(롬8:6)

 

A. 육신의 생각에 대한 결과는 사망, 영의 생각은 생명과 평안입니다.

이 말씀이 굉장히 중요한 말씀입니다. 롬8:1절부터 11절 사이에 가장 중요한 말씀입니다.

육적인 생각은 사망입니다. 그건 육신의 생각 자체가 바로 죄기 때문입니다

이 죄란 행동보다 속에 있는 생각을 말합니다. 사람의 성향입니다.

생각이 행동을 만들어요. 브레이크를 잘 밟는 사람은 속에서만 저 죽일 놈 하겠지요.

그러나 성격이 급한 사람은 밖으로 튀어나오는 차이일 뿐입니다.

사람의 행동들이 계속 연속되면 습관이 되고, 이 바탕 위에서 성품이 형성됩니다.

성품이란 것은 그 사람이 거칠다 부드럽다 하는 게 성품 자체가 아닙니다. 

그것은 우리에게 유 불리로 보이는 실용적인 성품이고 진짜 성품이란 것은

그 사람의 성향이며, 그 사람의 내용이며, 가치기준입니다. 그게 성품입니다.

영의 생각은 생명과 평안인데 이건 생명의 성령만이 줄 수 있는 복입니다.

우리가 그리스도 안에서 생각을 어두움에서 빛으로, 

사망에서 생명으로 바꿀 수 있다는 것은 기독교를 대표하는 복입니다.

불교는 염불이라고 하는 건 생각(念)이 불(佛)하자는 것이죠.

그래서 냄비에 모래를 담아 밥되기를 바라며 불을 지피는 꼴이라고 하잖아요?

그러나 우리는 그리스도의 십자가로 육신의 생각을 영의 생각으로

손바닥 뒤집듯 삽시간에 바꿀 수 있다는 게 얼마나 큰 복인지 알 수가 없습니다.  

 

 Q. 육신의 생각이 왜 문제인가요?

“육신의 생각은 하나님과 원수가 되나니,

이는 하나님의 법에 굴복하지 아니할 뿐 아니라 할 수도 없음이라”(롬8:7)

 

A. 이스라엘 백성들은 거듭나지 못한 육적인 성도의 모델입니다.

이스라엘 민족의 신앙교육을 모범으로 말하는 사람도 있고

탈무드 등도 금과옥조로 여기며 거기다가 성지순례라는 말도 합니다.

단호하게 말하지만 어떤 육체도 하나님의 백성의 모델이 될 수도 없고

예수 그리스도 안을 제외하고는 어떤 땅도 성지가 될 수가 없습니다.

인간의 육신은 모든 일에 하나님과 충돌합니다.

그리고 영과 육이 항상 충돌하는 곳이 또 교회이기도 합니다.

이와 같이 육신은 계속 영과 충돌하므로 하나님의 법에 따라갈 능력이 없습니다.

다시 말하면 육신은 하나님의 법에 전혀 영향을 안 받습니다.

이걸 완악이라 하며 강퍅이라 합니다.

이와 같은 마음의 상태가 하나님의 법을 의지적으로 거부합니다.

이런 사람이 많습니다. 그런데 이런 사람이 하나님의 은혜는 사모합니다.

마음으로는 하나님을 믿고 예수도 믿고 있으며 성경말씀도 틀림없는

사실인 걸 잘 알고 있는데 도무지 그 뜻대로 안 된다고 말들을 합니다.

왜냐하면 죄의 종이 되어 있는 육신이기 때문에 자기 마음대로 안 되는 겁니다.

하고 싶은 마음이 있지만 할 수가 없어요. 그게 바로 육신에 있는 자들의 모습입니다.

자동차 엔진은 정상으로 돌아가지만 바퀴가 차꼬에 채워져 있는 것과 흡사합니다.

 

따라서  

"육신에 있는 자들은 하나님을 기쁘시게 할 수 없느니라”(롬8:8)

육신은 전혀 가능성이 없습니다. 마음으로 예 하다가

얄개처럼 아니요 소리도 없이 슬며시 빠져 나갑니다.

사람들이 폼생폼사라는 말을 하는데 육신은 폼도 잡지 말라는 말입니다.

그러나 만약 육신이 영의 통제를 받으면 그 육신도 아주 예쁩니다.

그런데 육신이라고 하면 우리의 껍데기의 몸으로 생각하면 안 됩니다.

혼을 포함한 이 몸이 어떻게 사용되느냐 하는 것이 중요한 겁니다. 

영을 쫓아 사용되느냐? 옛사람의 인격, 사상 의지를 따라 사용되느냐?

무의식적으로 옛사람을 쫓는 성향 바로 이것을 육신이라고 합니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도로 경건의 연습을 많이 해야 합니다.

그래서 잠언은 스스로 지혜롭다고 완악하지 말고 여호와를 경외하며

악을 떠나면 네 몸의 양약이 되고 골수가 윤택하게 된다고 말씀합니다(잠3:7-8)

그리스도인이라 할지라도 마귀의 유혹으로 옛사람으로 살 때가 많습니다.

그야말로 조급하고 충동으로 인해 밀을 까부르듯 한 바탕 치르고 나면

그만 슬그머니 마음이 어두워지고 자책이나 후회와 죄의식이 몰려옵니다.

그게 바로 육신의 생각의 결과인 사망입니다. 그러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대속의

은총을 따라 다시 제자리로 돌아와 영의 생각을 하면 뇌가 시원해지고 몸이 가볍고

온몸에 링거를 꽂은 것처럼 생명의 기운이 가득해 집니다. 바로 생명과 평안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