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영성을 위한 ━━/이한규목사

이사야(3)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신앙

Joyfule 2009. 6. 7. 00:04

이사야(3)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신앙

성경 : 이사야 1장 10-17절


<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신앙 >


  이사야가 활동하던 초기에 유다는 사방의 위협을 당하고 있었습니다. 앗수르는 호시탐탐 유다의 정벌을 노렸고 애굽과 아람도 큰 위협이 되었습니다. 그러나 무엇보다 더욱 큰 문제는 대외적인 위협이 아니라 대내적인 배교였습니다. 백성들에게 신앙적인 행위는 있지만 마음은 이미 하나님으로부터 멀어진 상태로 하나님이 기뻐하지 않는 모습이었습니다. 하나님은 어떤 신앙을 기뻐하실까요?


1. 순종하는 신앙


  본문 10절 말씀을 보십시오. “너희 소돔의 관원들아 여호와의 말씀을 들을지어다 너희 고모라의 백성아 우리 하나님의 법에 귀를 기울일지어다.”


  세상에는 수많은 길이 있습니다. 바른 길에 들어서면 성공하고 잘못된 길에 들어서면 실패합니다. 수많은 사람들이 길을 잘못 들어 실패하고 절망하며, 어떤 사람들은 자기가 어떤 길에 들어섰는지도 잘 모릅니다. 그러나 진실한 성도는 예수님이 길 되시고, 성령님이 길을 인도하시기에 말씀에 순종하면 결코 길을 잃지 않을 것입니다.


  어떤 사람은 지식을 자랑하며 하나님의 말씀을 제쳐놓습니다. 그러나 끊임없이 변하는 인간 지식이 변하지 않는 하나님의 말씀에 견줄 수는 없습니다. 어떤 사람은 자기 양심을 믿고 하나님 말씀이 필요 없게 여깁니다. 그러나 인간의 양심도 하나님의 말씀으로 예리하게 되었을 때만 최선의 기능을 발휘합니다. 우리는 하나님을 구경꾼으로 만들지 말고 하나님의 말씀과 법에 순종해야 합니다.


  오늘날은 이사야 당시처럼 기독교 가치관이 땅에 떨어져 있습니다. 교회는 신용을 많이 잃었고 교인들도 세상의 빛과 소금의 역할을 다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이런 때일수록 더욱 하나님 말씀에 귀를 기울여야 합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은혜를 깨닫고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기를 원하십니다.


2. 진실한 신앙


  본문 11-12절 말씀을 보십시오. “여호와께서 말씀하시되 너희의 무수한 제물이 내게 무엇이 유익하뇨 나는 수양의 번제와 살진 짐승의 기름에 배불렀고 나는 수송아지나 어린 양이나 수 염소의 피를 기뻐하지 아니하노라/ 너희가 내 앞에 보이러 오니 그것을 누가 너희에게 요구하였느뇨 내 마당만 밟을 뿐이니라.”


  성도는 하나님께 예배드릴 때 진실한 열망과 진지한 태도를 가져야 합니다. 스포츠 경기에서는 흥분해서 소리 지르다가 주일예배 때는 목석처럼 앉아있는 성도가 되면 안 됩니다. 그런 모습을 하나님은 ‘내 마당만 밟는 것’이라고 묘사합니다. 교회에 나오는 것도 중요하지만 하나님이 받으실만한 참된 예배를 드리는 것이 더욱 중요합니다.


  참된 예배란 하나님과 깊은 교감이 오고가는 ‘영으로 드리는 예배’입니다. 요즘 학생들 중심으로 펼쳐지는 이상한 찬양예배는 조심스럽게 행해져야 합니다. 오늘날 예배와 예배음악이 자기도취에 가까울 정도로 자기감정에만 관심을 기울이고 하나님에 대한 찬양보다는 감정을 만족시키는 오락적 요소가 많습니다.


  참된 예배는 마음을 즐겁게 해주는 예배가 아니라 하나님과 깊은 인격적인 만남이 있는 예배입니다. 큰 기도소리가 울리고, 활기찬 찬양이 흘러나온다고 해서 그 예배가 하나님의 마음에 합한 예배는 아닙니다. 조용해도 신령과 진정으로 드리는 예배를 드려야 합니다. 때때로 예배 중에 조용한 침묵기도의 시간도 필요합니다. 침묵기도의 체험은 마치 광활한 우주를 바라볼 때 할 말을 잃어버리게 되는 느낌과 유사합니다.


3. 정결한 신앙


  본문 13절 말씀을 보십시오. “헛된 제물을 다시 가져오지 말라 분향은 나의 가증히 여기는바요 월삭과 안식일과 대회로 모이는 것도 그러하니 성회와 아울러 악을 행하는 것을 내가 견디지 못하겠노라.” 당시 이스라엘 백성은 성회와 더불어 악을 행하는 죄를 범하고 있었습니다. 하나님은 그런 모습을 견디지 못하겠다고 합니다.


  성도는 죄를 멀리해야 합니다. 원망과 시기와 욕심을 가지고 드리는 기도는 하나님이 받지 않고, 불평과 저주를 섞으며 형제와 불화하며 드리는 기도도 하나님이 받지 않으십니다. 그래서 주님은 “제물을 가지고 하나님 앞에 나갈 때 누가 너를 원망하는 것이 생각나거든 제물을 놓아두고 다시 가서 화목하고 그 다음에 제물을 바치라.”고 했습니다.


  하나님은 화목을 원하십니다. 화평과 거룩함이 없이는 하나님의 얼굴을 뵐 수 없습니다. 성회는 많이 모이지 않아도 순수한 사람들이 모여야 하고, 큰일은 못해도 죄는 범치 말아야 합니다. 성회는 야단스럽지 않아도 진실해야 합니다. 그래서 성회와 더불어 악을 행하는 것을 하나님은 차마 보시지 못하겠다고 합니다. 거룩한 곳에는 아무 것도 섞이지 말아야 합니다.


  또한 본문 15절 말씀에서 하나님은 유다 백성이 손을 펼 때 눈을 가리신다고 했습니다. 당시 성회에서 성회 인도자나 백성들이 찬양과 경배의 손을 펼 때 그 손이 거짓된 것임을 알고 계셨던 것입니다. 오늘날에도 그런 모습이 곳곳에서 많이 나타납니다. 주님을 높인다고 손을 들면서 자기를 높이고 나타냅니다.


  또한 본문 15절 말씀을 계속 보면 하나님은 유다 백성이 많이 기도해도 듣지 않겠다고 말합니다. 기도해도 듣지 않는다니 얼마나 허무한 사실입니까? 그만큼 깨끗한 마음으로 예배하고 기도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순교자 구드리는 사형장에 끌려 나갈 때 이렇게 말했습니다. “나는 순교자로 교수대에 오르는 것보다 설교자로 강단에 오를 때가 더 두려웠다.” 예배당도 거룩한 곳입니다. 그곳을 죄가 넘치는 더러운 모습으로 더럽히면 안 됩니다. 성도는 항상 깨끗한 몸과 마음과 생각을 가지고 하나님을 경배해야 합니다.


4. 공의를 행하는 신앙


  본문 16-17절 말씀을 보십시오. “너희는 스스로 씻으며 스스로 깨끗케 하여 내 목전에서 너희 악업을 버리며 악행을 그치고/ 선행을 배우며 공의를 구하며 학대 받는 자를 도와주며 고아를 위하여 신원하며 과부를 위하여 변호하라 하셨느니라.” 하나님을 믿는 신앙은 이웃 사랑으로 표현되어야 합니다. 특히 어려운 이웃을 잘 돌봐주어야 합니다. 그런 사람이 명품 인생입니다. 


  톨스토이의 단편 중 이런 얘기가 있습니다. 어느 날, 예수님을 만나고 싶어 하는 한 구두수선공의 꿈에 예수님이 나타나 말씀하셨습니다. “내일 네 집으로 가겠다.” 그는 다음 날 음식을 차리고 기다렸지만 예수님은 오지 않고 한번은 거지, 한번은 청소부, 한번은 사과장수가 왔습니다. 모두 가난하고 추위에 떨고 있어서 그는 예수님을 위해 준비한 음식을 먹였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이 오지 않았습니다.


  그날 밤 그는 또다시 꿈을 꿨습니다. 그때 예수님이 나타나셔서 다시 말씀하셨습니다.  “나는 오늘 너의 집에 세 번이나 가서 잘 대접받았다. 참으로 너는 나를 사랑하는구나! 어려운 이웃을 대접함이 나를 대접함이다.” 하나님께서 주신 것을 이웃과 함께 나누는 사람이 주님을 사랑하는 사람이고 주님을 닮은 사람입니다.


  전두환 대통령 시절에 부패가 만연할 때 한 기독교인 사장이 있었습니다. 그가 건물을 임대받고 입주 도장을 받으려고 구청에 가자 구청직원이 “내일 인사하러 오라.”고 했습니다. 다음날 인사했더니 또 “내일 인사하러 오라.”고 했습니다. 인사하라는 말은 떡값을 달라는 말이었는데 2달을 매일 인사만 해서 큰 손해를 봤습니다. 그러나 그 뒤로는 소문이 나서 아예 돈 받을 생각은 하지 않고 원칙대로 즉각 처리해 주었다고 합니다.


  요새 성도가 공의를 행하며 산다는 것이 쉽지 않습니다. 그러나 최대한 노력해야 합니다. 하나님께서는 바르고 진실하게 사는 만큼 반드시 그보다 넘치는 보상을 주실 것입니다. 항상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순종하는 신앙, 진실한 신앙, 정결한 신앙, 공의를 행하는 신앙을 가지고 축복을 예비하는 복된 분들이 되길 바랍니다.


ⓒ 설교 : 이한규 http://www.john316.or.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