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사야(5) 빛 가운데 행하십시오
설교 : 이사야 2장 1-5절
< 악에 대한 4가지 반응 >
한 할머니가 죽으면서 딸에게 말했습니다. “얘야! 잊지 말라! 세상에는 나쁜 사람보다 좋은 사람이 훨씬 많단다.” 오늘날 많은 사람들은 “세상에는 좋은 사람보다 나쁜 사람이 많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자세히 보면 나쁜 사람보다 좋은 사람이 많습니다. 그런데 왜 나쁜 사람이 많은 것처럼 보입니까?
몇 가지 이유가 있습니다. 첫째, 선은 감추어져 있는 경우가 많고 악은 드러나 있는 경우가 많기 때문입니다. 둘째, 열 가지를 잘해도 한 가지를 잘못하면 그 한 가지를 너무 크게 보기 때문입니다. 셋째, 때때로 선한 사람 백 명이 악한 사람 한명을 당하지 못하는 모습을 자주 목격하기 때문입니다. 선은 왜 이리 무기력합니까? 그러나 한 가지만은 철저히 믿어야 합니다. 그것은 바로 ‘선의 최종 승리를 믿는 것’입니다.
우리 주위에는 수많은 악이 존재합니다. 그처럼 악한 일이 생길 때 어떻게 대처해야 합니까? 사람들은 보통 악에 대해 4가지 형태로 반응합니다.
첫째 ‘도피형 반응’이 있습니다. 똥이 무서워서 피하는 것이 아니라 더러워서 피하는 것이듯이 악을 보고 아예 외면하는 태도가 바로 이러한 ‘도피형 반응’입니다.
둘째는 ‘절망형 반응’이 있습니다. 악한 현실을 타개하지 못하는 것을 안타까이 여기며 절망해 버리는 태도를 말합니다.
셋째는 ‘종속형 반응’이 있습니다. 이것은 가장 위험한 반응형태로서 악한 일을 당하면 똑같이 악으로 보복하는 태도를 말합니다. 눈에는 눈으로 갚고 이에는 이로 갚는 태도는 재판법률은 될 수 있어도 도덕률은 될 수 없습니다. “저 사람 버릇을 반드시 고쳐 놓아야지.”라고 하다가 자기가 더 나빠지는 경우가 훨씬 많습니다.
넷째 ‘참여 극복형 반응’이 있습니다. 이것은 가장 바람직한 반응형태로서 악한 현실을 보면 그 현실 속에 뛰어 들어가 선을 이루려는 태도를 말합니다. 성도는 이런 4번째 반응의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그래야 그가 속한 사회는 소망이 있게 됩니다. ‘이사야’가 바로 그런 참여 극복형 인물이었습니다.
당시 청년 애국자였던 이사야는 유다와 예루살렘 성을 사랑했습니다. 그런데 예루살렘 성읍과 나라가 멸망과 재앙으로 떨어지는 것을 보고 표현할 수 없는 아픔을 느꼈습니다. 그래서 그 현실을 외면하지 못하고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는 선지자로 현실에 참여하게 됩니다.
< 이사야 당시의 시대상황 >
본문 1절 말씀을 보십시오. “아모스의 아들 이사야가 받은바 유다와 예루살렘에 관한 말씀이라.” 이사야는 유다와 예루살렘이라는 현실 세계에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기 시작했습니다. 사실 이사야가 전하는 말씀은 현대를 살아가는 우리에게도 주어진 말씀입니다. 왜냐하면 이사야가 살던 당시의 시대상이 현재 우리나라의 시대상과 일치하는 면이 많기 때문입니다. 그 일치하는 시대상을 몇 가지만 들어본다면 다음과 같은 것이 있습니다.
첫째, 이사야가 살던 당시 이스라엘은 북 이스라엘과 남 유다로 분단된 분단국가였습니다. 그 점이 세계의 유일한 분단국인 우리나라와 일치합니다.
둘째, 당시 국제 정세를 살펴보면 북쪽에 앗수르, 남쪽에 애굽, 동북쪽에 바벨론 등 강대국들이 유다 주위에 포진하고 있었는데 이 점 또한 강대국들에 둘러싸인 현재의 우리나라와 유사한 점이 많습니다.
셋째, 이사야가 살던 당시는 정치적으로 불안했습니다. 북 이스라엘은 수시로 정변이 일어나 왕이 바뀌었고, 남 유다도 정치적으로 안정되지 못했습니다. 왕이 바뀔 때마다 정치는 예외 없이 심한 파동을 겪었고, 사회 질서는 갈수록 문란해졌고, 불의와 부패는 이루 말할 수 없을 정도가 되었습니다. 우리나라도 그런 정치적이고 도덕적인 위기에 처해 있습니다.
넷째, 그런 어려운 상황에서 당시 유다의 지도자는 친 애굽파, 친 앗수르파, 친 바벨론파 등으로 분열되어 있었습니다. 우리나라도 현재 지역문제, 계층문제, 종교문제 등으로 갈등이 심화되고 있습니다. 그런 상황에서 외친 이사야의 탄식과 책망의 말씀은 오늘날 우리나라에게 주신 하나님의 말씀이고 사실상 현대를 살아가는 모든 사람에게 주는 말씀입니다.
이사야가 전하는 하나님의 말씀은 전쟁의 위협을 겪고 있는 현대인들에게 주는 평화의 말씀이고, 첨단과학시대를 살아가는 현대인들에게 주는 진리의 말씀이고, 분열의 시대에 살고 있는 현대인에게 주는 화해의 말씀입니다. 현대의 시대적 특징을 한 단어로 요약하면 ‘불화’ 또는 ‘분열’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지금은 합일보다는 분열을, 통일보다는 분단을, 연합보다는 분리를 주장하는 시대입니다.
사랑을 바탕으로 세워진 교회도 분열에 분열을 거듭하고 있습니다. 요새 교파가 참 많습니다. 교회를 다니면 자주 “당신은 무슨 교단 무슨 파요?”라는 질문을 받습니다. 이단이 아니라면 사실상 교단과 교파가 그렇게 중요한 것이 아닙니다.
또한 학력도 별로 중요한 것이 아닙니다. 중요한 것은 하나님 안에서 사명, 즉 소명입니다. 하나님은 고학력자만 부르시지 않습니다. 사실 사기꾼 중에는 머리가 나쁜 사람보다 머리가 좋은 사람이 많습니다. 특히 사기를 치면서도 사기를 치지 않는 것처럼 위장하는 고등 사기꾼 중에는 고학력자가 대부분입니다. 그러므로 함부로 자기 위주의 잣대로 남을 평가하지 말아야 합니다. 특히 교회는 더욱 그래야 합니다.
분열은 관용과 사랑이 없는 곳에 피는 더럽고 추한 꽃입니다. 성도는 그 추한 독초가 자라나 분열의 꽃을 피우는 일에 동참하지 말아야 합니다. 사실상 모든 불화와 분열의 근본적인 원인은 사실상 하나님과의 관계가 정상적이기 못하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과의 온전한 화해가 없으면 사람과의 화해도 없습니다. 그래서 이사야는 무엇보다 하나님과의 온전한 화해를 외치고 있습니다.
< 하나님이 통치할 때 생길 일 >
본문에서는 이사야가 어떤 말씀을 합니까? 본문 2-4절까지 이사야는 ‘미래에 있어질 일’을 말씀하고 있고 5절 이후부터는 ‘현재에 해야 할 일과 벌어지는 일’을 말씀합니다. 그는 미래의 일과 현재의 일을 동시에 보고 있습니다.
선지자는 이중적인 눈, 즉 미래를 보는 안목과 현실을 보는 안목을 동시에 가져야 합니다. 이사야 전체의 구조도 그런 이중구조로 펼쳐집니다. 그래서 1-39장까지는 현재 벌어지는 일들에 대한 심판의 메시지가 주를 이루고, 40-66장까지는 미래의 찬란한 회복에 대한 메시지가 주를 이룹니다.
선지자가 미래만 보고 현실을 외면하면 참된 선지자가 될 수 없고, 반대로 현실 참여만 부르짖고 미래의 비전을 제시하지 않으면 역시 참된 선지자가 될 수 없습니다. 그처럼 선지자는 현재와 미래를 다 보는 안목이 있어야 하지만 지도자가 되려면 특히 미래를 볼 줄 아는 안목이 있어야 합니다. 그래서 지도자는 끊임없이 양떼들에게 어려운 중에서 소망을 전해야 합니다. 그것이 바로 믿음입니다.
믿음은 현실 속에서 내일을 보는 작업입니다. 겉으로 보기에는 태평성대라도 선지자는 그 현실 속에서 사람들의 마음이 불신앙과 권태로 하나님으로부터 멀어지는 것을 보면서 곧 닥쳐올 심판을 예언했습니다. 그래서 참된 선지자적인 믿음을 가진 사람은 만사가 형통한 것처럼 보일 때에도 말씀과 기도의 줄을 놓지 않습니다.
반대로 에스겔 골짜기와 같은 그 죽음과 고난으로 가득 찬 상황 속에서도 하나님의 사랑을 감지하고, 하나님의 역사가 나타날 것을 촉각하고, 영광스런 미래 회복에 대한 그 감지능력을 가지고 “이제 하나님의 돕는 손길이 온다. 낙심하지 말라.”고 외치는 것이 바로 참된 선지자적인 믿음입니다. 그러므로 지금은 힘들고 어려워도 멀리 보는 안목을 가지고 인내로 추수 때를 기다려야 합니다.
어떤 가정에서는 부부싸움을 하면 아이들이 좋아합니다. 왜냐하면 부부싸움 후에는 항상 큰 회식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처럼 우리가 믿음을 지키고 조금 더 기다리면 곧 우리에게 좋은 소식이 다가올 것입니다. 그런 기대가 있었기에 이사야는 본문에서 어두운 시대 상황에서도 미래의 안목을 가지고 여호와께서 통치하시는 평화의 시대가 올 것을 증거합니다. 미래의 황금시대에는 어떤 역사가 일어날까요?
1. 교회가 높임을 받습니다.
본문 2절 말씀을 보십시오. “말일에 여호와의 전의 산이 모든 산꼭대기에 굳게 설 것이요 모든 작은 산 위에 뛰어나리니 만방이 그리로 모여 들 것이라.” 이 말은 교회가 높임을 받는다는 말씀입니다. 그러므로 이 말씀은 교회의 중요성을 다시 한 번 깨닫게 합니다. 우리 교회가 사람의 힘으로 세워진 것 같지만 장차 크게 높여질 주님의 교회입니다.
성도는 어떤 경우에는 주님의 몸 된 교회에 분규를 일으켜 상처를 주지 말아야 합니다. 교회에 상처를 입히는 것은 주님을 십자가에 다시 못 박는 일과 마찬가지입니다. 언제 어디서나 교회를 사랑하고 교회를 아끼십시오. 교회는 결코 수단이 되어서는 안 됩니다. 교회는 천국 가는 엘리베이터가 아닙니다. 교회는 오직 사랑의 대상이 되어야 합니다.
교회는 피곤하고 지친 영혼들이 모여드는 안식처입니다. 교회에 오면 평안과 위로를 느낍니다. 우리는 한때 군부독재 시대를 경험했습니다. 유명한 찬송가를 많이 작곡하신 박재훈 목사님은 그 시대도 필요했다고 합니다. 왜냐하면 군을 동원해 위에서 누르니까 많은 사람들이 갈 곳 없어 교회로 몰려왔다는 것입니다. 시대가 어두운 것이 문제가 아니라 하나님을 찾지 않는 것이 문제입니다.
2. 말씀이 높임을 받습니다.
본문 3절 말씀을 보십시오. “많은 백성이 가며 이르기를 오라 우리가 여호와의 산에 오르며 야곱의 하나님의 전에 이르자 그가 그 도로 우리에게 가르치실 것이라 우리가 그 길로 행하리라 하리니 이는 율법이 시온에서부터 나올 것이요 여호와의 말씀이 예루살렘에서부터 나올 것임이니라.”
이 구절에서 여호와의 산, 야곱의 하나님의 전, 시온, 예루살렘은 모두 오늘날의 교회를 상징합니다. 즉 사람들은 교회로 몰리고 교회에서 하나님의 말씀이 흘러나와 하나님의 말씀을 받게 될 것이라는 말입니다. 현재의 교회는 광야의 로뎀나무와 같습니다. 불완전하지만 그래도 교회에 오면 그나마 쉴 그늘이 있습니다. 왜 그렇습니까? 교회에 영혼을 살리는 말씀이 있기 때문입니다.
전자제품이 작동하려면 전류가 입력단자로 들어가 전선을 따라 순환하고 출력단자로 나와야 합니다. 그처럼 사람의 영혼을 활력 있게 만드는 영적 전류가 있습니다. 바로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말씀의 입력단자는 귀이고, 출력단자는 입입니다. 즉 하나님의 말씀이 귀로 들어가고 잘 소화되어서 입으로 말씀이 나오면 그의 영혼에 불이 켜지면서 가장 활력이 넘치는 성령 충만한 영혼이 됩니다.
사람이 자기 입으로 무엇을 자랑하는가 하는 것에 그 사람의 사람됨이 나타나 있습니다. 가끔 보면 시시한 것을 자랑하는 분들이 있습니다. 사람들은 그것을 열등감의 표시로 봅니다. 그러나 하나님을 자랑하고 말씀을 높이면 사람들은 무게 있는 영혼으로 느낍니다. 그처럼 하나님의 말씀을 높이는 사람은 결코 사람의 말에 비천하게 되지 않을 것입니다.
3. 영원한 평화가 도래합니다.
본문 4절 말씀을 보십시오. “그가 열방 사이에 판단하시며 많은 백성을 판결하시리니 무리가 그 칼을 쳐서 보습을 만들고 그 창을 쳐서 낫을 만들 것이며 이 나라와 저 나라가 다시는 칼을 들고 서로 치지 아니하며 전쟁을 연습지 아니하리라.” 하나님께서 공의와 사랑으로 통치하시면 싸울 일도 없고 다툴 일도 없다는 말입니다.
전쟁은 인류 역사 발전의 최대 적입니다. 역사학자들의 말에 의하면 적어도 50년 동안 평화가 지속되지 아니하면 훌륭한 문화를 이루지 못한다고 합니다. 이 세상의 모든 죄악을 종합한 것이 바로 전쟁입니다. 전쟁에서 선이 생기는 경우는 없습니다. 십자군 전쟁이 선할 수 없는 이유도 바로 거기에 있습니다. 그러므로 세상을 선하게 만들려면 전쟁은 무조건 그쳐야 합니다. 어떻게 전쟁이 그쳐집니까?
아마 주님 재림 때까지 사람은 계속 싸울 것입니다. 과학문명이 발달하면 할수록 전쟁은 그만큼 비참하게 될 것입니다. 사람들의 입에서 사탕발림의 말이 눈으로는 웃지만 가슴으로는 칼을 품은 사람이 많습니다. 그러나 평화의 왕인 예수님이 재림하시면 주님이 통치하시면서 영원한 평화가 정착될 것입니다.
베이컨은 이렇게 말했습니다. “평화는 전쟁보다 좋다. 평화 때는 자식들이 아버지를 매장하지만 전쟁 때는 아버지가 자녀들을 매장하기 때문이다.” 이 세상에 평화만큼 좋은 것은 없습니다. 그런데 주님이 재림하실 때 세상은 영원한 예루살렘이 됩니다. 예루살렘이란 히브리어로 ‘이레(예비)’와 ‘샬롬(평강)’이란 말의 합성어로 ‘평강이 예비된 도성’이란 뜻입니다. 주님이 재림하실 때 세상은 영원한 평강이 예비된 도성이 될 것입니다.
< 현재 최선을 다하십시오 >
그렇게 본문 2-4절에서 미래의 평화의 시대를 예언한 후에 이사야는 다시 현재로 시선을 돌려 백성들에게 권면합니다. 본문 5절 말씀을 보십시오. “야곱 족속아 오라 우리가 여호와의 빛에 행하자.”
소망을 가지고 찬란한 미래를 기대하며 기다리는 것은 복된 일입니다. 성도는 잘 기다릴 줄 알아야 합니다. 서양 속담에 이러한 속담이 있습니다. “Lose a minute, save a life(일분은 잃고 일생을 얻어라).” 일분을 잘 기다리면 그것 때문에 생명을 구할 수 있다는 뜻입니다. 그처럼 기다림이 소중합니다. 또한 기다림이 있기에 고단한 세상도 꾸준히 살아갈 수 있습니다. 그러나 기다림에도 한계선은 있어야 합니다.
기다릴 때는 기다리더라도 결단을 내릴 때는 결단해야 새로운 내일이 열립니다. 주님의 재림을 기다리는 것도 중요하지만 더욱 중요한 것은 주님을 기다리면서 현재 주님의 사명을 따라 행동하는 것입니다. 성도는 미래를 보면서도 현재를 보고 현실 속에서 빛과 소금의 삶을 살아야 합니다. 그래서 이사야는 미래의 눈을 현재의 눈으로 돌려 “야곱 족속아 오라 우리가 여호와의 빛에 행하자”고 말한 것입니다.
성도는 오늘 빛 된 삶을 살아야 합니다. 천국을 사모한다고 하면서 부모와 배우자, 그리고 이웃들과 불화하는 것을 대수롭지 않게 생각하는 어리석은 모습은 없어야 합니다. 교회를 위해 헌금하는 것도 중요하지만 현재 생활력이 없는 부모님께 용돈을 드리는 일도 중요합니다. 교회를 위해 봉사하는 일이 중요하지만 가정 교회를 위해 배우자에게 봉사하는 일도 그만큼 중요합니다.
미래만 바라본다고 하면서 현재를 돌보지 않는 자는 현재를 살아가는 수많은 사람들을 실족시켜 결국 천국을 축소시키는 악한 사람이 됩니다. 그러한 이기주의적인 성도가 되지 말아야 합니다. 미래에는 여호와의 산에 오르겠다는 소망을 가지되 현재에는 여호와의 빛 가운데 행함으로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분들이 되길 바랍니다.
ⓒ 설교 : 이한규 http://www.john316.or.kr
'━━ 영성을 위한 ━━ > 이한규목사' 카테고리의 다른 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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