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Joyful자료실 ━━/신상래목사

인본적인 너무나 인본적인 우리네 교회

Joyfule 2018. 6. 18. 21:34



 
     인본적인 너무나 인본적인 우리네 교회

 


인본주의란 사람이 모든 것의 중심이 된다는 뜻이고, ‘인본적이라는 의미는 인본주의를 추구하는 성향을 나타내는 형용사이다. 중세가 지나서 르네상스운동이 일어났던 계기는, 중세의 가톨릭교회가 지배하였던 시대에서 인간중심으로 시대로 바꾸고자 하는 대중의 열망이었다. 중세시대는 신중심의 시대로 가톨릭교회의 위상이 절대적이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이 시대는 신중심이 뜻하는, 하나님의 중심에 대한 심한 거부감을 드러내고 있다. 그래서 가톨릭교회의 모순과 과오에서 벗어나서 개신교 교회가 잉태하는 빌미가 되었지만, 여전히 우리네 교회에도 하나님중심사상에 대한 불편함과 거부감이 잠재적으로 남아있다. 왜냐면 사람들이 세상의 학교에서 배운 사상이 바로 사람이 중심이 되고 주인이 되는 인권주의였기 때문이다. 그래서 교회에 오면 인권주의라는 말이 인본주의라는 말로 대신하여 사용되고 있다. 그래서 겉으로는 하나님을 주님(주인님)이라고 부르며 자신의 종이라고 고백하고 있지만, 속내는 여전히 자신이 중심이 되는 신앙을 견지하고 있다.

 

영성학교에 출석하는 자매가 있다. 그녀의 남편은 중견교회의 부목사이다. 그래서 아내가 울 영성학교에 오는 것에 대하여 극도로 부정하고 있다. 왜냐면 영성학교의 구원론과 성령론은 기존 교회와 사뭇 다르기 때문이다. 그래서 아내가 영성학교에 몸담고 있으면, 앞으로 자신의 목회에 지대한 악영향을 끼칠 것이 불 보듯 환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처음에는 좀 다니다가 말겠지.”라고 느긋하게 생각했다가, 3년이 넘어도 계속해서 다니고 있으니까 드디어 브레이크를 걸기 시작했다.

술을 마시고 협박도 하고 위협과 공갈도 서슴지 않았다. 또한 양쪽 집안의 부모에게 아내 때문에 가정이 위태롭다고 읍소하면서 도움을 요청해서, 그 부모는 필자가 가정을 깨뜨리는 이단 교주로 여기고, 필자를 벼르면서 찾아오겠다고 하기도 했다. 또한 자신의 편에서 말해줄 목회자에게 상담을 받을 것을 요구해서, 자매는 어쩔 수 없이 상담에 응하기도 하였다. 그래서 자매가 자신의 편에서 옹호해줄 상담자에게도 상담을 받는 것이 형평성에 맞는 일이라고 요청해서, 울 영성학교 교수님을 추천해서 상담을 하기도 했다.


그 때 남편이 교수님을 만나자, 영성학교 때문에 가정이 깨지고 있다고 읍소했다고 한다. 그는 아내가 영성학교에 가는 것 때문에 가정이 깨지는 것을 우려한다고 하지만, 실제는 자신의 목회에 미치는 악영향 때문이라는 것은 초등학생도 아는 바이다. 아마 이 문제를 두고, 거리에서 만나는 사람의 손을 붙잡고 하소연했다면 이구동성으로 아내의 신앙방식이 잘못되었다고 그의 손을 들어주었을 것이다. 필자가 오늘 말하고 싶은 것은 영성학교의 신앙관이 맞고, 그 남편의 신앙관이 잘못되었다고 말하려는 게 아니다. 그가 이 문제를 해결하고자하는 방식이다. 어찌 보면 소중한 가정과 자신의 목회인생이 걸린 심각한 사항이 아닌가? 그런데 그가 해결하자 하는 방식에서 중요한 사실이 빠져있다. 바로 하나님께 도움을 요청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평신도라 할지라도 도저히 해결할 수 없는 삶의 지난한 문제가 있다면, 골방에 들어가서 배를 쥐어짜며 하나님께 이 문제를 올려드리며 도와달라고 간절히 기도해야 하지 않겠는가? 그러나 그는 목회자임에도 불구하고 하나님께 이 문제를 요구하지 않았다. 그러면서 자신이 할 수 있는 온갖 인간적이고 세상적인 방식을 동원하고 있다. 그래서 교수님이 상담을 마치고 일어서면서, 이 남편을 측은히(?) 여겨서 기도를 열심히 해보시라고 권면했다고 한다. 사실 이러한 인본적인 방식으로 삶의 문제를 해결하려는 태도는, 이 남편에게서만 보이는 모습은 아니다. 이미 우리네 교회는 하나님 중심이 아니라, 인본적인 사상과 방식이 만연하고 있기 때문이다.

 

여호와께서 말씀하시되 너희의 무수한 제물이 내게 무엇이 유익하뇨 나는 숫양의 번제와 살진 짐승의 기름에 배불렀고 나는 수송아지나 어린 양이나 숫염소의 피를 기뻐하지 아니하노라 너희가 내 앞에 보이러 오니 이것을 누가 너희에게 요구하였느냐 내 마당만 밟을 뿐이니라 헛된 제물을 다시 가져오지 말라 분향은 내가 가증히 여기는 바요 월삭과 안식일과 대회로 모이는 것도 그러하니 성회와 아울러 악을 행하는 것을 내가 견디지 못하겠노라 내 마음이 너희의 월삭과 정한 절기를 싫어하나니 그것이 내게 무거운 짐이라 내가 지기에 곤비하였느니라 너희가 손을 펼 때에 내가 내 눈을 너희에게서 가리고 너희가 많이 기도할지라도 내가 듣지 아니하리니 이는 너희의 손에 피가 가득함이라(1:11~15)

 

이에 가르쳐 이르시되 기록된 바 내 집은 만민이 기도하는 집이라 칭함을 받으리라고 하지 아니하였느냐 너희는 강도의 소굴을 만들었도다 하시매(11:17)

 

주께서 이르시되 하늘은 나의 보좌요 땅은 나의 발등상이니 너희가 나를 위하여 무슨 집을 짓겠으며 나의 안식할 처소가 어디냐(7:49)

 

우리네 교회는 교회에서 예배의식을 드리고 각종 희생적인 신앙행위를 하는 신앙방식을 고수하고 있다. 그러나 하나님은 하나님의 뜻을 행하지 않으면서, 예배의식을 드리고 종교행위를 하며 각종 신앙행위를 해도, 외면하시고 기도를 듣지 않으시겠다고 선포하셨다. 또한 하나님의 집은 모든 사람들이 기도하는 집이라고 선포하셨음에도 불구하고, 우리네 교회에서는 어쩔 수 없이 형식적인 기도회만 열뿐, 하나님을 만나는 기도를 가르치거나 배우지 않는다. 그러면서 틈만 나면 교회에 와서, 각종 희생적인 신앙행위를 하고 교회봉사를 하는 것이 믿음이라고 가르치고 있으니 기가 막힌 일이다.

이는 죄다 인본적으로 하나님을 섬기는 행위이다. 또한 영혼구원을 위한 전도행위를 강요하고 다그치고 있지만, 그 방식은 지극히 인본적이다. 마치 보험설계사가 하는 것처럼 선물을 싸가지고 다니면서 값싼 구원을 바겐세일하고 있다. 그래서 예배시간에 교회의자에 앉혀두면, 죄다 구원을 받았다고 믿으라고 하니 기가 막힌 일이다.


이렇게 교회에 와서도 하나님을 만날 생각이 없이, 먹고 마시면서 자기만족과 자기 의를 드러내는 데 혈안이다. 이들이 입만 열면 하나님을 주인이라고 외치고 하나님의 이름을 앞세우지만, 그들의 속내는 자신이 주인이 되고 싶고 자신의 소원을 이루고 싶은 인본주의 생각으로 가득 차 있다. 그 이유는 교회지도자의 머리에 미혹의 영이 타고앉아 자신의 생각을 넣어주어 속이고 있기 때문이다. 그 속이는 전략이 바로 인본적인 생각이다. 그래서 교인들은 이미 학교와 세상에서 인본적인 생각으로 찌들어 있기 때문에, 교회의 인본적인 신앙방식을 당연하게 여기면서 반복하는 이유이다. 하나님을 이용해서 자신이 원하는 삶을 이루고 싶어 하는 이들의 우상이, 바로 자기 자신이 아니고 누구인가? 두렵고 떨리는 일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