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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터넷 성경 핵심 공부(창세기에서 계시록까지) (53과) 12

Joyfule 2008. 11. 15. 00:08

인터넷 성경 핵심 공부(창세기에서 계시록까지) (53과) 12

 룻기(1): 엘리멜렉과 룻(1장)

 


2-10. 하나님의 부재(不在)

  룻1:1-5에는 하나님이 없다. 하나님 없는 10년이다.  어두움이요, 영적 수면 상태이자 영적 침체의 교과서다.  인간이 선택한 일의 결과이기도 하다.  그런데 하나님이 이 침체를 10년으로 마감시키셨다.  하나님의 은총이다.  이처럼 하나님이 브레이크를 밟으실 때 '그 뜻'을 깨닫아야 한다.

  자, 1막 2장으로 넘어온다.  여기에는 하나님이 있다.  구구절절 하나님이 고백되어지고 하나님이 숨쉬고 계신다.  그것은 나오미가 6절에서 하나님의 복음을 듣게 되면서부터이다.  그렇다.  믿음은 들음에서 난다(롬10:17).  하나님을 기억하고 그의 은총 앞에 서기를 원하자 마자 일이 너무도 쉽게 풀리는 것을 본다.  우연인가?  필연인가?  여기에는 깊은 어떤 섭리가 있는 것인가?

  1장의 자막처럼 흐르는 22절, 그러나 거기에는 무엇인가 긴장이 있고, 또 다른 세계가 펼쳐 보여지리라는 흥분이 기다린다.  하나님의 손에 붙잡힌 인생事(史)가 그렇다.  나오미와 룻은 훨씬 이후에 이 신비스런 하나님의 활동을 알게 된다.  그렇다면 신앙은 진행형( -ing)이다.  이것이 1막 3장이 보여주는 메시지이다.  그런데 갑자기 이야기가 반전한다.  지금까지와 전혀 다른 사람이 등장한다.  베들레헴에 들어서자 말자 보아스가 등장하는 것은 어떻게 설명 가능한가?  


2-11.
베들레헴 서곡

  인간이 몸부림치던 10년의 이야기는 막을 내린다. 다시 '원점'으로 돌아온다.  마치 연어가 머나먼 길을 떠나 살다가 산란기가 되면 다시 자기가 자라던 곳으로 귀향 -귀소본능(歸巢本能)- 하듯이 나오미는 다시 베들레헴으로 돌아온다.  물을 떠난 고기가 살 수 있을지 몰라도 하나님을 떠난 인생은 결코 살 수 없음을 나오미는 확증한다.  하나님 없이 살아보겠다던 화려한 외출, 제1막은 "비어 돌아오게 하셨느니라"(21절)는 독백(자막)을 남기고 10년만에 그 막을 내리고 만다.  


2-12.
인간의 끝은 하나님의 시작이다.

  하나님은 바로 여기에 당신의 이야기가 기록되어야 하는 여백을 보셨다. 10년만의 귀향(歸鄕), 10년만에 밟아 본 은혜의 땅 베들레헴, 하나님의 체취와 은총의 기억들을 부둥켜 안고서, 다시 재기할 수 있는 은총의 기회를 붙잡고 귀향한다.

  참담하게 무너졌던 하나님의 사람들의 모압에서의 여정, 바로 그 속에 우리 주님은 한 사람 '룻'을 준비하셨다.  나오미는 실패했으나(1:20-21) 하나님은 실패하지 않으셨다.  하나님은 모압으로 향했던 나오미의 삶이 얼마나 인본주의(人本主義)적이었는가를 '룻'을 통해 더욱 분명하게 밝히신다.  이것은 룻이 전면에 등장하는 2장부터의 이야기에서 확증된다.

  한편 나오미는 "비어 돌아오게 하셨느니라"(1:21)라고 고백한다.  아직까지 그녀는 며느리 '룻'을 통해 그려 가실 하나님의 이야기를 보지 못하고 있다.  나오미가 벌써 하나님이 펼쳐가실 룻 이야기를 알 길이 없다.  나오미에게 있어 룻은 아직 베일에 가려있는, 아직 발견하지 못한 진주와도 같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주여 네 눈을 얼어 주의 법의 기이한 것을 보게 하옵소서"(시119:18)라고 기도해야 한다.  우리의 현재 시간표에도 이런 하나님의 무수한 섭리들이 진행되고 있는데도 미처 내가 우둔하여 깨닫지 못하고 있는 것들 때문에 하나님 따로, 나 따로 살아가게 된다면 얼마나 억울한가?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은 베들레헴으로 귀향하는 두 여인의 발걸음에 축복의 양탄자를 준비하셨다.  하나님의 은총, 그것은 "보리 추수 시작할 때에"(1:22) 두 여인을 통해서 거두실 30배 60배 100배의 결실을 내다 보셨다.  하나님은 여호와 이레의 하나님이시다. 모압은 회개의 자리요, 베들레헴은 축복(회복)의 자리이다.  하나님의 은혜는 철저히 '모압'에서 깨닫게 되고, 거기서부터 다시 시작한다.  이것이 신앙의 역설(paradox)이다.  이 은총이 어느 날 갑자기 베들레헴에서 확 얻어지는 것이 아니다.  '모압'에서 주어지고 '베들레헴'에서 열매 맺는다.  

  이것은 종이 한 장 차이의 시각(perspective)이다.  '모압'은 하나님의 연단과 시험(test)이라는 리트머스 용지(paper)였다.  하나님은 나오미를 축복하시기 위해서 뺄셈(-)부터 시작하셨다.  이것은 모압이 갖는 이중성(dualism)이다.  영적인 안목이 있는 자만이 이러한 사실을 깨닫는다.  밤이 깊을수록 새벽이 가까운 법이다.

  그러므로 철저히 절망하라!  오직 자기 자신에게!  나 자신에게는 아무런 소망이 없음을!  바로 그 자리가 베들레헴을 '다시' 얻을 수 있는 시작이다.  베들레헴은 고통 없이 주어지지 않는다.  산고(産苦)의 고통 후에 자녀를 낳은 어머니는 건강한 자녀를 보는 순간 그 고통을 잊는다.  따라서 "구더기 무서워서 장 못 담근다"는 식의 영적 패배주의는 베들레헴의 가장 큰 적이다.


2-13.
원점행진

  인생이 망쳐 놓은 제1막 1장의 모압 이야기를 하나님은 룻을 무대에 세우심으로서 베들레헴 이야기를 새롭게 하신다.  참담했던 모압의 과거사(過去事)를 은총과 축복의 예루살렘으로 보상하셨다. 하나님은 모압을 기억하시지 않았다.  동이 서에서 먼 것같이 우리 죄과를 기억하지 않으셨다(시103:12, 사43:25).  베들레헴으로 돌아온 회개의 발걸음, 그것이면 족하셨다.  모압은 '무'(암흑, 실패)였으나, 베들레헴은 '유'(광명, 은총)이다.

  이렇듯 새 술은 새 부대에 넣어야 한다(마9:17).  10년 전 하나님의 품을 떠나 탕자처럼 살았던 자기의 모든 것은 헌 부대다.  '하나님'까지 과거 속에 묻어 버리고, -마치 데마는 이 세상을 사랑하여 바울을 버리고(딤후4:10) 갔던 것처럼- 먼 땅 모압으로 것은 헌 부대다.  그러나 다시 아버지의 품을 기억하고 귀향했을 때 모든 것이 다시 회복되었던 돌아온 나오미는 새 부대다.  그녀는 아버지의 백성으로 거듭난 새사람이다.

  모압에서는 자기 자신이 인생의 주인공이었다.  그러나 베들레헴에서는 하나님이 나오미와 룻의 이야기의 주인공이시며 저자(著者)이시다.  이제 직접 하나님이 그들의 이야기를 집필하신다.  나오미가 쓴 제1막의 스토리는 실패史이지만, 하나님이 직접 펜을 잡으시고 써 내려가시는 이야기는 전혀 다른 차원의 파노라마가 펼쳐 보여지기 시작한다.  


2-14.
부스러기 묵상

  하나님은 어떤 분이신가? 기다리시는 하나님이시다.  베들레헴이 시작되는 동구 밖에 하나님은 그녀들을 기다리고 계셨다.  인생이 자신들의 인생에 플러스(plus, +) 한 것은 '모압'뿐이었다.  그러나 하나님은 길고 긴 사랑의 역사를 준비해 놓고 다시 아버지의 품으로 돌아오는 그 사람들을 맞이하고 계셨다.  그렇다.  하나님은 나오미가 모압에 있을 때부터 베들레헴의 은총을 준비하고 계셨던 것이다.  마치 아브라함이 독자(獨子) 이삭을 제물로 드리기 위해 모리아산을 오르고 있었을 때 하나님은 한 마리 '어린양'을 준비하고 계셨던 것처럼 말이다.  하나님의 축복은 결코 우연이 아니다.

  그 어떤 것보다도 나모미 곁에 '룻'을 붙여 주셨다는 점이다(1:16-18).  나오미는 모압에서 불신앙을 플러스(+) 했으나, 하나님은 모압의 환상을 마이너스(-) 하셨고, 또한 그러한 오염된 죄악의 본성을 결코 용납하지 않으셨다.  인생은 실패할 수 밖에 없는 모압을 플러스(+) 했으나, 하나님은 축복의 룻을 플러스(+) 하셨다. (김충만 목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