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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터넷 성경 핵심 공부(창세기에서 계시록까지) (53과) 9

Joyfule 2008. 11. 12. 00:11

인터넷 성경 핵심 공부(창세기에서 계시록까지) (53과) 9

 룻기(1): 엘리멜렉과 룻(1장)



2-7. 인생은 현재진행형이다.

  나오미는 인생의 전환점을 위해 먼저 해야 할 일이 있었다. 그것은 생각하고 말하는 것 자체가 더 없는 부담일 수 밖에 없는 자신의 모압 10년이라는 과거와 결별하는 것이다.  그렇다면 사람이 자신의 과거를 이야기한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그것은 이미 그 과거로부터 어느 정도 자유롭게 되었다는 것을 뜻한다.  이때 그는 현재와 미래를 준비하고 있다는 것에 대한 강력한 의지의 표명이다.  남편은 땅에 묻고, 두 아들은 가슴에 묻었다.  그러나 모압을 떠나며 지난 10년을 회고하는 나오미의 고백들은 '어두운 추억들' 뿐이다.  나오미는 이제 마지막으로 다시는 기억하고 싶지 않은 '과거', 바로 그것과의 결별을 시작한다.  

15절

  모압을 뒤로 하고 베들레헴으로 향하는 나오미의 가슴은 천갈래 만갈래 만감(萬感)이 교차된다.  무엇보다 나오미는 모압의 잔재를 다시 베들레헴으로 가져갈 수 없다는 사실을 분명히 한다.  다시 시작하는 베들레헴은 모압의 재판이지 않기를 깨닫기까지 10년의 세월이 필요했다.  값비싼 수업료를 지불한 셈이다.  그래서 그녀는 지난 10년의 고통을 분명하게 고백함으로써 과거와의 단절을 시도한다.  한 여인의 처절한 통곡은 메아리가 되어 우리에게 다시 들려온다.

  "나오미가 또 가로되 보라 네 동서는 그 백성과 그 신에게로 돌아가나니 너도 동서를 따라 돌아가라."

  오르바는 단순히 모압이라는 지역으로 돌아간 것이 아니라 하나님 없는 백성에게로, 거짓 신(영)에게로 돌아갔다.  하나님은 오르바에게 회개의 기회를 10년이나 주셨다.  그러나 그녀는 세상을 사랑하여 모압에 그대로 남았다.  동일한 10년이 이렇듯 서로에게는 판이하게 다르다.  오늘 우리가 살아가는 시간 역시 마찬가지가 아닌가.  

  인생의 갈림길에서 오르바와 룻이 선택한 길은 극과 극이다.  그것은 처음에는 별 차이가 없어 보인다.  사람이 과거라는 지난 역사를 여행하듯이 미래로의 여행이 가능하다면 아마도 나쁜 쪽에 줄을 서는 그런 일은 선택하지 않을 것이다.  그러나 모든 인생은 아직 경험하지 못한 미래라는 시간표를 동일하게 걸어간다.  동일한 시간이나 그 결과는 너무나도 다르다.  인생에는 연습이 없다.  한번 연습해 보고 다시 할 수 있다면 얼마나 좋겠는가?  한번 살아보고 잘못되었으면 과거에 잘 살았던 부분에서 벌어 놓은 보너스 점수를 실패한 부분에서부터 사용하면서 다시 시작할 수 있는 그런 인생이라면 얼마나 좋을까?  

  "사랑으로 설래이는 내 가슴에 사랑을 쓰려거든 연필로 쓰세요.
  쓰다가, 쓰다가, 쓰다가 틀리면 지우개로 깨끗이 지워야 하니까."

  전영록이 부른 유행가의 일부다.  그러나 그것은 하나의 '희망사항'에 불과하다.

19절

  "베들레헴에 이를 때에 온 성읍이 그들을 인하여 떠들며 이르기를 이가 나오미냐 하는지라."

  10년 전과 10년 후가 이처럼 극명하게 대조를 이루는 게 또 있을까.  비웃음과 조롱, 멸시와 천대, 그리고 모욕과 비아냥거림이 곳곳에서 터져 나온다.  실패한 인생을 두고 벌이는 언행 치고는 조금 씁쓸한 생각이 든다.

  그런데 냉정하게 생각해 보면 베들레헴 백성들 역시 이렇게 말하고 있을 형편이 못된다.  이들 역시 사사시대를 살아가며 타락과 심판, 그리고 하나님의 긍휼 입음을 반복하면서 "가나안이 이처럼 초라할 수 있는가?"를 보여주는 것 밖에는 잘하고 있는 것이 아무 것도 없는 사람들이다.  과거 이스라엘의 영광만을 곰탕 국물처럼 고아 먹고 있을 뿐이다.  그런데도 나오미에게 할 말이 있는 사람들이다.  

  하나님 앞에서 자신을 돌아보는 일에 실패하면 인생은 꼭 다른 사람을 향해 눈을 돌린다.  그것도 잘 한 것에 대해서 박수하고 격려하기 위해서가 아니다.  실패한 사람에 대하여 하는 언행치고는 가혹하기 그지 없다.  아무도 그녀를 위로해 주려 하지 않는다.  이것이 세상 인심이다.  

  내가 속한 공동체는 어떤가.  죄인들, 약한 자들, 세상 사람들이 우선순위(優先順位)로 놓고 있는 소위 학벌이나 생활 수준이 다르다고 생각하는 사람들, 그래서 함께 하기에는 영 아니라고 괄호 밖으로 밀려난 사람들, 세상에서 상처받고 갈 곳에서 방황하는 사람들을 나오미처럼 취급하는 공동체는 성경이 지향하는 공동체가 아니다.  그런 곳은 교회이기를 포기한 곳이다.  교회는 누구나 다 올 수 있고, 또 와야 한다.  생각해 보면, 나오미가 위로 받고 다시 회복할 수 있는 땅은 오직 베들레헴 뿐이다.  그런데 베들레헴 사람들은 나오미를 정죄하기에 바빴다.  세상에서 상처받고 실패한 인생이 갈 곳은 어디인가?

  그러나 예수님은 탕자의 아버지이시다.  "잃었다가 다시 찾은 내 아들이다"고 영접해 주신다.  그런 의미에서 교회는 탕자의 아버지와 같은 배역을 맡아야 할 최후의 보루이다.  교회는 죄인을 영접하고, 그들의 상처를 어루만져 주는 피난처여야 한다.  그런 의미에서 하나님이 한 시대를 심판하실 때 그때는 반드시 교회가 타락하였을 때였다는 것을 교회사(敎會史)는 증언하고 있다.  교회가 소망의 빛을 잃으면 그 시대는 소망이 없다.  나오미가 마지막으로 비빌 언덕으로 믿었던 메들레헴 같은 곳, 그곳이 바로 주님께서 주인이신 교회여야 한다.  나오미를 용납하고 그로 하여금 새사람됨의 기회를 줄 수 있는 곳, 그곳이 바로 교회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