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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주영 현대그룹 전 회장의 비화 (하)|

Joyfule 2015. 6. 28. 21:06

 

 

 

정주영 현대그룹 전 회장의 비화 (하)|

 

압구정 헌대아파트 탄생의 비빌

 

1978년 1월 1일 새벽 3시경 재무부 금융정책과의 연말 계수를 담당하고 있던 재무부 연원영 사무관은 깜짝 놀랐다 연 사무관이 1977년 연간 통화량을 집계를 해보니 “41.5%의 증가로 나타났다 연말 목표치 31.5%를 10%포인트가 늘었다 재무부와 한국은행이 이 목표를 꼭 지키겠다고 다짐한 것이 물거품이 된 것이다 원인을 알아보니 12월 31일 은행마감 후 오후에 “현대건설이 외환은행에서 사우디아라비아 주베일 항 건설공사의 선수금 2억 달러를 환전해 가서 1,000억 원이 증가한 것이다. 그 당시 1,000억 원이면 전체통화량의 꼭 10%에 해당된다. 당시는 통화관리를 위해 중동달러를 원화로 환전할 수 없게 하고 있었다.

 

쥬베일 항 건설공사의 선수금을 환전한 것이 바로 압구정 현대아파트 건설 자금이 되었다 "지난 79년대초 정주영 현대그룸 회장은 경기도 팔당댐 공사에 입찰하기 위해 임원들과 현장으로 가는 도중 잠시 점심식사를 하기 위해 당시엔 배밭이었던 압구정에 들렀습니다. 배나무 아래에서 식사를 하던 정 회장은 돌연 "팔당수주는 포기하고 회사로 돌아가자"라고 말해 주의 사람들을 의아하게 만들었습니다

당황한 한 임원이 그 이유를 묻자 정회자은 "팔당댐을 건설하는 것보다 여기에 집을 짓는 게 좋겠다"면서 토지 매입을 지시했다. 배밭으로 이용되던 땅에 들어설 아파트의 가치를 한눈에 알아보고 정 회장은 그 자리에서 결정을 내린 것이다. 이렇게 해서 강남의 상징 아파트인 압구정 현대는 태어난 것이다. 하지만 첫분양은 쉽지 않았다. 미분양 물량이 속출했다. 이에 따라 마케팅의 일환으로 사회 저명인사들에게 저가로 공급한 게 특혜분양 시비를 낳기도 했다. 그렇지만 이 사건이 오히려 반전의 계기가 됐다. 저명인사들이 산다는 입소문과 함께 뒤이은 강남 개발로 압구정 현대는 빛을 보게 됐다.

 

경부고속도로 건설

 

경부고속도로와 정주영1967년 재선에 도전한 박 대통령은 경부고속도로 건설을 선거 공약으로 내놨다.이 공약에 환호성을 올린 사람은 아마도 한국에서 정주영밖에는 없었을 것이다. 결국, 유사 이래 최대 규모가 될 역사(役事)는 박정희와 주영의 합작품이 된다.언론과 학계는 반대의 목소리를 높였다.

 

무엇보다 공사에 들어갈 막대한 자금을 과연 조달할수 있을지 의문을 제기했다.설사 재원을 확보한다해도 그로 인해 빚어질 인플레이션을 우려했다.마침 세계은행은 한국의 교통량이 경부고속도로를 뚫어야 할만큼 충분하지 않다는 보고서를 발표했다.

언론과 학계는 이 보고서를 금과옥조처럼 사용했다. 세계은행과 같은 권위 있는 기관이 부정적인 의견을 내자 여론도 부정적으로 돌았다. 당장 세계은행에서 차관을 얻어 쓰는 길도 끊길수 밖에 없는 상황이었다. 그렇다고 여기서 주저앉을 박정희 정주영이 아니었다. 하루는 박 대통령이 정주영을 청와대로 불렀다. 단둘이 만나기는 그때가 처음이었다.

 

박 대통령은 현대건설이 태국에서 고속도로를 건설한 경험이 있다는걸 알고 있었다. "정 사장이 경부고속도로 건설에 드는 최저 소요 경비를 좀 산출해 봐주시오." 박 대통령은 도대체 돈이 얼마나 들어갈지조차 파악이 안 돼 답답하던 중이었다. 대통령의 말을 들은 정주영 사장은 은 가슴이 벅차올랐다. 드디어 2년전 태국 에서 익힌 공사경험을 한국에서 써먹을 기회가 왔다고 판단했다. 정주영은 즉시 5만분의 1 지도를 들고 한달 가까이 서울과 부산 사이의 강과 산, 들판을 미친듯이 돌아다녔다.

 

주판을 두드려보니 380억 원이라는 계산이 나왔다. 건설부는 650억 원, 서울시는 180억 원으로 추산했다.박 대통령은 현대건설이 제시한 금액에 가까운 400억 원에 예비비 30억 원을 추가해 총 430억 원으로 공사비를 책정했다. 이 돈으로 서울과 부산을 잇는 총 428km의 고속도로를 3년안에 완공하라는 게 현대건설을 비롯한 17개 건설회사에 맡긴 지상과제였다.

 

마침내 1968년 2월1일, 흥분과 감동속에 경부고속도로 기공식이 열렸다. 현대건설은 서울~오산, 대전~옥천 등 전 구간의 5분의 2가량을 맡았다.공사비 책정이 워낙 빠듯했던 만큼 애초부터 큰돈을 벌기는 어려운 공사다. 그렇다고 기업인이 이익을 포기하는 것도 말이 안 된다. "기업가는 이익을 남겨 소득과 고용을 창출하는 것이지 국가를 위해 또는 사회를 위해 거저 돈을 퍼 넣는 자선사업가는 아니다. 기업가들이 사회에 주는 기업의 열매는 소득과 고용을 창출하는 것이면 된다. 어떤 경우에도 이익을 남겨야 하는 것이 기업가에는 번번이 절체절명의 명제였다."

 

이익에 집착해 탈법 또는 부실공사를 할 수는 없는 노릇이다. 그렇다면 방법은 한가지뿐이다. 공사기간을 최대한 단축해 이자와 노임을 최대한 절약해야 한다. 정주영, 아니 모든 건설회사 경영자들에게 공기 단축 은 곧 돈이었다.정주영이 무작정 공기 단축에 나선 것은 아니다. 그는 당시로서는 천문학적인 금액이랄 수 있는 800만 달러어치의 중장비를 도입했다.낙동강 고령교 공사(1953년 착공) 때 20t짜리 크레인 한 대만으로 무리하게 덤벼들었다가 이루 말할 수 없는 고생을 겪은뒤 장비확보는 정주영사장에게 최우선 과제였다. 그는 고속도로 공사를 위해 중장비 1천900여 대를 들여왔다.

 

당시 우리나라에 있는 중장비가 모두 1천4백 대 정도였으니 장비에 대한 정주영의 집착을 읽을 수 있다.'호랑이'정주영은 현장에 간이침대를 갖다 놓고 작업을 독려했다. 공기 단축이 부실 공사로 이어지지 않도록 꼼꼼하게 챙겼다. 잠잘 시간에는 일하고, 대신 덜컹거리는 44년형 지프를 타고 가면서 잠깐씩 눈을 붙였다.차에서 자는 습관은 나중에 울산 조선소 건설때까지 이어져 결국 목 디스크의 원인이 됐다. 심지어 어떤 때는 지프에서 자면서 지프로 공사장을 빙빙 돌도록 했다. 직원들은 '호랑이'가 지켜보고 있다는 생각에 게으름을 피우지 못했다.

 

돌이켜보면 노동력을 착취한 가혹한 자본가라는 비판을 받을 만도하다. 그러나 약 40년 전 정주영은 현장 노동자들과 크게 다를 바 없는 또 한 명의 노동자였을 뿐이다. 그는 노동자가 일할 때 자기만 편하게 쉬는전형적인 자본가와는 거리가 멀었다.그는 평생을 두고 자신을 이렇게 평가했다. "나 자신은 나를 자본가로 생각해 본 적이 없다. 나는 그저 꽤 부유한 노동자일 뿐이며, 노동으로 재화를 생산해 내는 사람일 뿐이다.

 

"경부고속도로를 개통하고 기반시설을 확보한 박 대통령 시대의 자본주의 산업화는, 우리 사회를 오랜 농업사회에서 공업사회로 단숨에 변화시켰다고 볼 수 있다.1960년 64%이던 농어민은 80년에 31%로 감소했으며, 중화학공업화가 진행된 70년대에는 2차 산업이 1차산업을 능가하고 중공업이 경공업의 비중을 추월하는 선진국형 산업구조를 갖추었다. 그 근간에는 월남전 참전용사들이 국내로 송금한 달러가 기반이 되었음을 잊지 말아야한다고 '월남전과 한국'은 밝혔다.

 

올림픽 유치는 정회장의 걸작품

 

정 전 회장이 올림픽 유치에 관한 비화를 기자들에게 말한 적이 있다 정화장의 말은 이렇다 " 어떤 사람도 88올림픽을 한국이 유치할 것이라는 기대하지 않았을 것입니다 대한체육회가 김집 부회장을 일본에 보내어 88년 올림픽 유치할동을 포기할테니 86년 아시안 게임을 우리에게 양보해 달라고 요청했습니다 그런데 일본은 NO하고 한마디로 거절했다고 합니다 일본은 당연히 자기나라가 유치할 것인데 왜 아시안 게임을 양보할 필요가 있느냐는 것이라는 자세였다고 합니다"

정 회장은 말을 이어갔다

'체육회는 이 내용을 문교부 체육국이 장관에게 보고 하고 장관은 대통령에게 보고를 했디고 합니다. 보고를 받은 대통령은 할 수 있는한 최선을 다하지 않고 패배주의로 임하는 것은 안된다고 말하자 문교부가 직접나섰습니다."

 

정 회장이 전경련 회장으로 있을 때인 1984년 4월 문교부 체육국장이 찾아왔다. 그래서 주최측인 서울시와 대한체육회 인사를 만났다고 한다 그런데 서울시는 유치를 위한 홍보용 영화를 만드는데 1억 7천만원이 드는데 예산이 없다고 해서 정 회장이 돈을 빌려주겠다고 말했다는 것이다 그렇게 해서 유치작업이 시작되자 전경련 측은 각국과 맺은 경제협력위원회를 동원해서 적극적인 활동을 폈다 예컨데 한-영경제협력위원장인 정주영회장이, 한-불은 조중훈회장이 나서서 상대국가를 상대로 유치활동을 하고 해외건설업체를 동원하는 등 동원할 수 있는 모든 조직과 기구를 활용해서 총력전을 폈다.

 

각국 대사와 그들 자녀까지 회의가 열리는 바덴바덴으로 와서 한 표라고 더 얻으려고 했다고 한다. 필자는 정몽준의원도 그 현장에 와 호텔 방이 없자 자동차안에서 새우잠을 자면서 유치에 참여했다는 얘기를 들은 바 있다 그러나 북한이 일본을 밀고 비동맹국가와 동구권 표를 일본에 몰아주는 등 한국 유치를 적극적으로 방해하는 사태가 빚어졌다. 일본이 각국의 IOC 위원들에게 세이코 시계를 선물로 준다는 정보가 입수되자 정 회장은 김택수 IOC 위원장에게 김위원장 이름으로 IOC위원들에게 화환을 보내자고 했으나 거절당하고 정회징 이름으로 보냈다고 했다.

 

또 서울시장은 과일상자를 보내도록 했다 꽃 선물은 유럽 등의 선진국 IOC위원들에 좋은 반응을 보였다 독일의 아디다스가 올림픽 공식후원업체인데 이를 통해서 남미 표를 공략하고 남미와 아프리카 위원들에게는 부부를 한국에 초청한다며 비행기표를 주도록했는 것이다 서독의 지방신문은 IOC 위원들 투표를 하루 앞두고 "하계올릭픽는 일본으로 다 결정이 났다고 보도했다 이러자 북한은 정 회장에게 다음과 같이 조롱하다 시피했다는 것이다

"정선생,이제 그만 수고하고 돌아가시죠 "

그러자 정 회장은

"왜 돌아갑니까? 끝장보고 돌아가야죠"

"엊 저녁 서독신문 보셨죠?"

"나는 독일말 몰라서 안뵜습니다"

"다 끝났다고 썻습니다 그러니까 돌아기시죠 도저히 되지 않을 것 몇 표 나오지도 않을텐데 왜 다닙니까?"

" 결국 개표하니까 52표 대 27표였어요"

 

정 회장은 우리 경제인들이 협력해서...각국 경제협력위원장들, 김우중, 조중훈, 최원석 회장 등 모두가 바덴바덴에 모여 올림픽 유치에 성공시켰습니다 그는 이같은 말을 하고 함박 웃음을 웃었다고 한다 우린 국민이 합심해서 88올림픽을 성공적으로 개최하고 그것을 원동력으로 해서 안정과 성장을 조화시켜가면서 한국경제호를 선진국의 문턱까지 끌어올렸다.

 

효석 최택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