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16 장. 폭풍전야
바리새인들의 반대
이제 우리는 닥아오는 폭풍을 지켜보면서 갈보리 십자가 처형에서 그 절정에 달했던 적의이 동기들을 살펴보아야겠다. 먼저 바리새인들은 살펴보자.왜냐하면 예수님의 생활과 성품에 대해 주된 공격을 시작한 주역이 바로 이 바리새인들이었기 때문이다.
역사는 때때로 변칙적인 사태를 낳는다.그러나 적어도 외부적으로는 그 나라에서 가장 종교적이었다. 사람들이 하나님의 아들을 죽일 것을 모의하는 반대파의 우두머리가 된것 보다 예외적인 사건은 없었다. 에스라와 느헤미야에 의한 종교 개혁의 진정한 계승자들이었던 바리새인들은 어둡고 어려웠던 시기에 그들의 종교를 강하고 활력있게 하며 오염되지 않도록 지도하는 것이 그들의 임무이다. 그리고 그들은 스스로 신앙의 수호자로 행세했다. 義가 그들의 기조였으며 유일신 하나님에 대한 공경이 그들의 변함없는 주제였다. 또한 율법은 그들의 도덕적 수준을 높여 주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바리새주의에 의하면 예수님은 상종치 못할 인간이었다. 왜 그랬을까?
이러한 증어가 생기게 된 세가지 근원이 복음서 이야기 가운데 밝혀져 있다. 그 첫째는 그들이 예수님을 사깃군이라고 믿었다는 사실이었다. 메시야에 대한 희망이 당시 바리새인들 사이에는 매우 고조되어 있었다. 그리고 예수께서 갑자기 널리 알려지고 민중이 그를 따르자 그들은 예수님을 무시할 수는 없었다. 비록 그가 공공연히 선포하지는 않았찌만 그의 행동은 메시아의 행동으로 보였다. 그러나 이스라엘의 구원자가 예수님과 같이 빈민 계급에서 나올 가능성이나 문화적 배경과 종교적 전통을 그들과 같이하지 않는 지도자에 대해서는 그들은 전혀 생각해 보지 못했다.
더우기 예수님이 그 따르는 자들을 선택하신 방식을 바리새인들 눈에 그 운동 전체가 잘못된 것으로 보이게 했다. 외국인에 고용된 배교자[마태]같은 자를 택하여 제자로 삼는 대의(大義)는 분명히 의심을 받을 만했을 뿐 아니라 존경할 만한 것도 되지 못하였다. 지각있는 바리새인이라면 누구나 가까이 오게 하지도 않을 사람들을 예수님은 차별하지 않고 기꺼이 환영하셨다. 마치 그는 명망 있는 종교 지도자들 보다 사회의 서민 층에 더 관심을 갖고 있는 것처럼 보였다.결론은 명백했다. 갈릴리 선지자 예수가 시작한 운동 전체 위에 [이 자는 사깃군이다]라고 마치 한낮처럼 드러나게 쓰여 있었다. 여기에서 우리는 바리새적인 독특허나 죄행(罪行) 즉 멸시하는 죄를 볼 수 있다.한번은 예수께서 바리새인과 세리,두 인물이 등장하는 이야기를 비유로 말씀하신적이 있었다.
바리새인은 [하나님이여 나는 다른 사람들과 같지 않음을 감사하나이다](눅18:11)고 말했다. 이것이 바로 바리새적인 정신이었다. 바리새인의 죄는 우월한 자가 짓는 무서운 범죄였다. 그 우월감의 가장 나쁜 점은 그 우월감이 주로 영적인 것에서 생겼다는데에 있다. 그들의 교만은 영혼을 파멸시키는 불신앙적인 교만, 즉 선한 것에 대한 자랑, 은혜에 대한 자랑이었다. 이러한 자만의 죌 눈이 어두워져서 그들 자신의 독선에 삼킨 바 되었으며,또한 하나님께서 그들의 좁은 생각과는 다른 방식으로 그들에게 오셨음에도 불구하고 그를 볼 수 없었으므로,그들은 예수님을 사깃군이라 공언하고 몰아낼 것을 계획했다.
예수님과 바리새인들 간의 갈등에 있어서 두 번째 요인은 율법과 전통에 대한 예수님의 태도였다. 유대인의 율법을 구성하고 있는 613개의 계명을(이들 중 365개는 금지 명령이고 248개만이 적극적인 명령이라는 사실은 깊은 의미를 가진다.) 지키는 것이 바리새 종교의 전부였으며,또한 그 본질이었다. 정통과 는 이 계명들이 전 진리를 포함하고 있으며 또한 진리 외에 어떤 것도 포함하지 않았다고 선언한다. 만일 누가 바리새인에게 [율법을 주었던 교사들은 오래 전에 죽은 반면 하나님은 아직 살아 계시니 지금쯤은 무언가 덧붙일 것이 있을 것이 아닌가?]라고 암시라도 했다면 혹은 613개의 계명중 상당수가 낡고 현학적인 율법주의 냄새가 나니 새로운 빛과 진리가 들어올 여지를 주기 위해 점잖게 물러냐야 하지 않을까]라고 암시라도 했다면, 그 바리새인은 겁에 질려 두 손을 높이들고 이단 중에도 극악한 이단이라고 했을 것이다.
예수님께서는 바로 이러한 입장을 취하셨으며,따라서 이단으로 낙인 찍히게 되었다(막2:1824).그는 오셔서 사람들로 하여금 하나님에 대해 다시 생각할 것을 요구하셨다. 그러나 그 요구가 폐쇄된 바리새인의 마음에는 터무니 없고 용인할 수 없는 요구로 들렸다. 갈보리에서 그리스도를 죽게한 것에 대한 책임이 대부분 폐쇄된 마음에서 비롯된 사실이라는 점이 복음서를 통하여 명백하게 기록되었다.[죠지 메레딛]은 말하기를 "교훈을 받지 않는 마음은 인생의 가장 큰 비극중의 하나이다"라고 했다. 참으로 옳은 말이다. 갈보리 언덕에 십자가를 세운 것은 바로 교훈을 받지 않은 마음이었다.
사실 이러한 면은 강조해야 할 가치가 있다.생활이나 생각의 모든 부분에 있어서 예수님께서는 새로운 진리를 기쁘게 받아들이는 개방적이고 친절한 마음 편에 있었다. 청교도 이민의 목사였더[죤 로빈슨]은 말하기를 "주님께서 아직까지도 그의 말씀에서 끌어낼 수 있는 진리를 더 갖고 계시다."라고 했다. 불행하게도 역사에는 [인간은 다른 아무 것도 두려워 하지 않는 만큼 생각하기를 두려워 한다]는 [버트란트 러셀]의 말을 입증해 주는 예들이 풍부하다. 또한 세상에 빛을 보게 된 새로운 진리의 대부분이 그 생존자체를 위해 시초부터 그 진리를 환영함직 한 사람들의 완강한 반대에 대항하여 싸우지 않으면 안되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지적인 정직을 포함해서 모든 종띵하의 절대적인 정직의 상징이라고 할 수 있는 분이다. 그는 "내가 진리이다."라고 말씀하셨다(요14:6).따라서 완전히 폐쇄된 교훈 받지 않는 마음은 근본적으로 불신앙적이라고 할 수 있다. 이러한 마음이,영광의 주님을 십자가에 못박도록 도왔던 그 날에 얼마나 비열한 것으로 드러나 보였던가!
바리새인들이 예수님을 정죄하지 된 세번째 요인은 유대인과 이방인을 구별하지 않는 예수님의 보편주의였다. 보통 바리새인들에게 있어서 인류는 두 개의 집단으로 나뉘어졌다. 그 하나는 유대인으로 출생한 참 유대인 집단이었고, 다른 하나는 구별없이 멸시하여 이방이라고 부른 나머지 모든 민족의 집단이었다. 그리고 이 두 집단 사이에는 넘을 수 없는 장벽이 가로놓여 있었다.[바리새]라는 명칭 자체가 [분리된 자]라는 뜻이었다.
유대교는 참 종교를 독접하고 있었다. 유대인들은 하나님에 대해 기득권을 가지고 있었다. 바로 이것이 예수께서도 전하신 시대 정신이었다. 예수께서는 하나님이 어느 곳에도 계시며 만인을 위한 하나님이시라고 선언하셨다. 멸시 받던 사마리아인들도 예루살렘에서 태어나서 자란 사람들과 조금도 다름이 없는 하나님의 자녀였따(눅10:30이하,요4:4이하).한 로마 군인에 대해 말씀하시기를 "이스라엘 중에 이만한 믿음을 만나보지 못하였노라."(마8:10)고 하셨다.
그는 또한 온 세상의 모든 대로들이 하늘 아래 있는 모든 나라에서 나와서 하나님의 나라로 모여드는 무리로 가득하게 될 날을 그리기도 하셨다(눅13:29).이러한 보편주의는 배타적인 바리새인들이 신성하고 가장 귀한 것으로 간직했던 모든 것을 받아 치는 격이었다. 이러한 사상은 위험한 것이었으며, 그것을 선포하는 예수를 침묵하게 만들어 버려야만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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