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21 장. 생명의 주
그리스도로 왕을 삼으려는 열망
최초의 제자들로 하여금 세상에 나가 예수께서 하나님과 主되심을 증거하게 했던 것은 네 가지 사실로 나타난다. 이 네가지 사실은 오늘의 달라진 상황에서도 여전히 모든 진실한 제자들에게 증거할 의무를 지우고 있다.
그 첫째는 예수님 자신의 명령이었다. [하늘과 땅의 모든 권세를 내게 주셨으니 그러므로 너희는 가서 모든 족속으로 제자를 삼아 내가 너희에게 분부한 모든 것을 가르쳐 지키게 하라](마28;18-19). 이러한 세계적인 시야는 시초부터 예수님의 생활과 교훈의 특색이 되어왔다.(마5:148:1124:14, 26:13) 그러나 이와같이 분명하고 확정적인 명령이 이제 그들의 귀에 울리자 제자들은 주님께서 그들에게 요구하고 계신 것이 무엇인지 확실히 알게 되었다.
누가는 예수님께서 그 따르는 자들에게 그 명령을 주실 때[예루살렘에서부터 시작하여]란 말을 덧붙이신 사실을 기록하고 있다(눅 24:47).이것은 매우 흥미있는 암시,즉 그리스도를 증거하는 것은 그가 있는 바로 그곳에서 부터 시작되어야 한다는 암시하고 할 수 있다. 예루살렘은 제자들이 그들의 선생을 버리고 도망했던 수치스런 실패의 장소였다. 이제 바로 그곳에서 그들은 모든 사람들이 보는 앞에서 예수님을 증거하고 옹호하여야 했다. 예수님을 죽였던 바로 그 도시가 예수님 자신의 명령에 의해 맨 처음으로 복음을 받게 되었다는 것은 예수님에게 항상 있었던 사랑과 인내 그리고 용서의 정신과 훌륭하게 조화되는 일이라 하겠다. 그러나 그 메시지는 비록 예루살렘에서 시작하였을지라도 온 세계로 퍼질 것이었다. 이것이 주님의 명령이었다. 그리고 그 들은 주님과의 교제가 그 명령을 순종하는 것에 달려 있다는 것을 알았다.
이 세상에서 하는 그리스도인의 모든 봉사의 배후에는 언제나 이 명령이 있다. 그리스도께서는 그의 친구들에게 세상에서 자신을 증거해 줄 것을 부탁하시는 것이 아니다. 그는 그것을 의무적인 것으로 요구하고 계신다.[너희가 나의 명하는대로 행하면 곧 나의 친구라](요15:14).기독교란 그리스도를 천재나 예술가 또는 선생으로 존경하는 것을 의미하지 않는다. 기독교는 그리스도를 명령하시는 분으로 생각하고 그에게 복종하는 것을 의미한다.[너희도 명령 받은 것을 다 행한 후에 이루기를 우리는 무익한 종이라 우리의 하여야 할 일을 한 것 뿐이라 할찌니라](눅17:10).사람들이 종종 말하듯이 본국에서 해야 할 일이 많이 있고 그들이 나아가는 길 뒷쪽에 아직도 점령하지 못한 요새가 많음에도 불구하고 왜 교회가 땅끝까지 복음을 전하러 가야하는지 그 이유를 알 수 없다고 말한다면,우리는 다음과 같이 즉 종교가 스스로를 전파하며 널리 퍼뜨리지 않는다는 것은 바로 그 종교의 죽음을 의미하며 또한 이 문제가 어떤 의미에서든지 아직도 여전히 미해결 문제이라고 생각하는 것 자체가 틀린 것이라고 대답해 주어야 한다.
강조해서 말하지만 이것은 미해결로 남아있는 문제가 아니다. 예수님의 중대한 명령은 그 문제를 단번에 결정지워 버렸다. 이 문제를 놓고 아직도 논쟁을 하는 사람이 있다면 그는 감히 예수 그리스도에게서 잘못을 찾아내고 고치려는 자와 같다. 이것으로 그러한 주장의 논거는 파괴된다. 예수님의 판정은이미 내려졌다. 그리고 그는 그 판정에 순종할 것을 요구하신다.
제자들은 세상에 내 보내어 증거하게 했던 두번째 사실은 상황의 위급함이었다. 그들은 세상의 종말이 가까웠다고 생각하고 있었다. 그 종말은 그들이 살아있는 동안에 올지도 모랐다. 바로 예수님께서 그들 중 어떤 사람은 인자가 그 왕국으로 오는 것을 볼 때까지 죽음을 맛보지 않으리라고는 그들에게 확언하지 않으셨던가?(마16:28)[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말하노니 이 세대가 지나가기 전에 이 일이 다 이루리라](막 13:30)는 예수님이 말씀이 그들 마음속에 새겨져 있지 않았던가? 조말이 오기 전에 온 세계의 복음화가 이루어져야 한다면 분명히 시간은 촉박했다.[또 복음이 먼저 만국에 전파되어야 할 것이니라](막 13:10). 왕 그리스도의 사업은 분별없는 세상이 멸망해 가는 지금 서두를 것을 요구하고 있다.어느 곳에서나 사람들은 어둠과 죽음의 그림 속에서 희망없이,믿음없이,절망적인 파멸속에 앉아있었다. 그리고 종말은 서둘러 오고 있었다. 이러한 위급한 상황이 그리스도의 제자들로 하여금 뛰쳐 나가 복음을 전파하게 했다.
이것 역시 오늘의 그리스도인들에게 복음 증거의 의무를 지우고 있다. 오늘의 세계적 상황 속에서 발견하는 한 가지 놀라운 요소는 사람들에게서 나타나는 옛 신앙과 윤리 체계의 붕괴이다. 이들에게는 아무런 지침 원리도 없으며 마치 나침판이나 키도 없이 폭풍의 바다위에 떠있는 배와 같다. 만일 우리가 이 상황을 그리스도와 대면하게끔 하지 않는다면 이 상황이 결국 우리를 압도하여 세계를 혼한 속에 빠뜨릴 것이라는 생각은 단순히 기우에 불과한 것이 아니다. 오늘의 시대는 예수님과 함께하며 그를 믿는 자 모두가 위급한 상황에 의해 자신이 이 세상에서 예수님에 대한 산 증인이 되도록 부름을 받고 있다는 것을 느껴야 할 때이다.
제자들로 하여금 뛰쳐 나가 복음을 전하게 했던 세번째 사실은 복음의 영광이었다. 그들은 세상에서 그 유례가 없었던 어떤 것을 발견했다. 복음 속에는 예를 들자면 용서의 기이함이 있었다. 다른 종교들은 죄를 지은 자들에게 힘들고 고통스런 노력으로 천천히 다시 도덕적인 고상함에 이를 수 있는 길을 말해 주었으나 기독교는 가장 누추하고 더러운 영혼을 감싸 주시는 공포로 인하여 항상 얽매여 왔다. 그러나 여기 그리스도께서 사망을 정복하셨기 때문에 죽음의 냉혹한 얼굴 앞에서 미소 지을 수 있었던 사람들이 있다. 더우기 세상 사람들의 반 이상은 하나님을 질투심 많고 위협적이며 달래기 힘든 폭군으로 생각하였다. 그러나 그리스도인들은 하나님께서는 사랑이시며 오직 사랑만이시며 영원히 사랑이시라는 것을 알았다. 또한 이 사실에 대한 깨달음이 말할 수 없는 기쁨으로 그들의 마음을 떨리게 했다. 그들은 세상이 꿈꾸어 보지도 못한 한 실재를 발견했다. 그것은 바로 복음의 영광이었으며 이것이 그들로 하여금 뛰쳐 나가 온 세상을 불타 오르게 하도록 하였다.
희랍의 옛 격언에 [횃불을 가진 자는 그 불을 다른 사람에게 전해주어야 한다]는 말이 있다. 오늘날 그가 신앙하는 복음이 인류의 마음속에 들어 온 가장 영광스러운 것이라는 사실을 깨달은 제자라면 누구나 그 복음의 선포자가 되어야 할 의무가 있다. [카이로]의 [템플 가드너]가 표현한대로 [만일 그리스도께서 그러한 기도(겟세마네와 갈보리에서의기도)를 하신 것이 사실이라면 당연히 온 세계가 그것을 알지 않으면 안된다]는 이것이 선교 사명에 대한 진정한 호소이다. 기독교 메시지의 한 가운데는 숭고하고 사람을 끄는,그리고 경모할 만한 예수 그리스도 자신의 모습이 우뚝 솟아 있다. 복음의 이러한 영광은 우리로 하여금 증거하지 아니할 수 없게 만들어야 한다.
네번째 사실은(실제로 이것이 다른 세가지를 포함한다. 최초의 기독교 신조 속에 구체적으로 표현되었던[예수는 구주시다]라는 확신이었다. 바로 기독교의 최초 설교는 [너희가 십자가에 못박은 이 예수를 하나님이 주와 그리스도가 되게 하셨느니라](행2:36)는 말에서 그 절정에 이른다. 바로 예수님이 주되신 이 사실이 모든 것의 핵심이었다. [오직 그리스도 예수의 주된 것을... 우리가 전파함이라](고후 4;5) 는 바울의 진술에 초대교회 모든 설교의 주제가 요약되어 있다.[예수는 주이시다]라는 단수난 고백이 초대 교회의 유일한 신조이었다(롬 10:9,고전 12:3,행10:36).이천년 동안의 기독교 역사는 이 칭호를 흔히 듣는 말로 만들어 그것이 우리에게 주는 경이감이 띵무디게 한 것 같다.
그러나 최초의 제자들이 구약으로 부터[主]란 칭호를 빌려 (주란 말은 히브리어[여호와]의 헬라어 번역이다] 그들이 갈릴리에서 함께 길을 걸어 다녔던 그들의 선생에게 그 칭호를 적용했을 때 그들이 의미했던 것은 그들에게 온갖 것을 베풀어 주셨던 친구 예수님이 장차 온 인류를 심판하는 재판장이 될 것이라는 것이었다. 그들이 그 억양하나까지 알고 사랑했던 그 음성이 마치 나팔소리처럼 온 세계를 일깨울 것이라는 것이었다.세상의 나라가 그의 것이 될 것이며 그는 참으로 주가 될 것이라는 것이었다. 그들의 선생이 전에 그랬던 것처럼 그 제자들도 사람에게서 종종 멸시 받고 배척당하였을런지 모른다. 그러나 이 모든 것을 겪으면서도 그들은 그들의 꿈을 잃지 않았으며, 그들의 지도자를 위해 시저가 생각해 보지도 못했을만큼 광대한 왕국을 바라보면서 그를 위해 [알렉산더]의 세계정복을 무색하게 할 세계적 전략을 계획하였다.
제자들은 그들을 대적하고 경멸하는 바로 그 세상에서 함께 모였을 때 그들은 [그는 만유의 주시라]고 속삭였으며 그들이 쓴 암호는 [마라나다](주여 오시옵소서)였다(고전 16:22,비교계22:20).[예수는 주님이시다]라는 신조는 그 후에 생겨난 어떠한 신앙 고백보다 훨씬 간단한 것이지만 그 의미나 세상을 뒤흔든 효과에 있어서 결코 덜 심오한 것이 아니다.이 고백을 충실히 적용한다는 것은 먼저 개인 생활의 모든 분야 위에, 그리고 세상 모든 사람의 생활 위에 예수님의 절대적 주권을 주장하는 것을 의미한다. 그 고백은 그리스도를 위한 온 우주의 왕좌를 의미한다. 또한 그 시초에 그랬던 것과 마찬가지로 지금도 여전히 대담한 주장이다. 그러나 그리스도의 실제성과 정직하게 직면했던 사람이라면 누구도 그 왕좌가 당연히 그리스도의 것임을 의미하지 못한다. 그 왕좌는 값주고 사신 것이었다.
돌로 떡을 만드시려 하지 않았기 때문에 광야에서 당하셨던 배고픔으로,인간의 죄로 인해 흘리셨던 눈물로 핏방울 같이 떨어졌던 겟세마네에서의 땀으로, 사망으로 그의 몸을 부서뜨렸던 쓰린 십자가로,잃어버린 세상을 그대로 버려두기를 단호히 거부했던 영원한 사랑으로 사신 것이었다. 인류의 대장이신 분이 스스로 낮아지셔서 사병과 같이 되셨다. 그는 일반 사병 그 훈련을 견디어 내셨다. 그가 지금 말을 타고 군대의 맨 앞장에 서 계신다면 그것은 언젠가 그가 도보로 행군하셨던 때문이다.장차 그가 모든 인류 위에 왕이 되시기로 되어있다면 그것은 그가 처음에 우리를 형제라고 부르시기를 부끄러워 하지 않으셨기 때문이다. [이러므로]바울은 이 한마디에 예수님의 고난과 슬픔의 전 내력을 잘 요약하고 있다.
[이러므로 하나님이 그를 지극히 높여 모든 이름 위에 뛰어난 이름을 주사.. 모든 무릎을 예수의 이름에 꿇게 하셨다](빌2:9). 참으로 그리스도의 주권은 값을 주고 사신 것이었다. 이 그리스도는 큰 시련을 겪으신 분이었다. 따라서 이제 그는 왕좌에 앉게 된 것이다. 우리의 양심은 그 왕좌가 마땅히 그에게 주어진 것이라고 증거한다. 예수님께서 그 수하에 부하들을, 그의 명령을 행하는 보이지 않는 군대를 거느리고 계시며, 그 배후에 왕국의 모든 위엄과 무게를 지니고 계신 것을 본능적으로 느꼈던 가장 깊고 참된 모든 것으로 그의 왕국은 결코 쇠하지 않으며 장차 하늘과 땅의 온 우주가 그말을 주로 시인할 것이라는 것을 느끼며 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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