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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知)와 사랑18. - Herman Hesse.

Joyfule 2012. 9. 12. 08:58
 
  
지(知)와 사랑18. - Herman Hesse.   

옮긴이: 최달식
펴낸곳: 교육문화연구회
 "그래, 그 때문이야. 
이봐 골드문트, 내가 너 자신만을 진지하게 받아들인다는 것에 너는 익숙해져야만 해. 
네 목소리의 모든 음조, 네 모든 몸짓, 네 모든 미소를 진실로 받아들이고 있다는 걸 믿어 줘. 
하지만 너의 생각을 나는 그다지 심각하게 받아들이진 않아. 
너의 본질적이고 필연적이라고 생각하는 그 점을 나는 심각하게 받아들이는 거야. 
너는 그토록 다른 많은 천분을 가지고 있으면서도 
네 생각에만 특별한 주의를 기울여 달라는 것은 무엇 때문이지?"
  골드문트는 씁쓸한 미소를 지었다.
  "내가 그렇게 말했었지요. 당신은 언제나 나를 어린아이처럼 생각하고 있다구!"
 나르치스는 그래도 변함이 없었다. 
  "나는 네 생각의 일부만을 어린아이의 생각이라고 본다. 
아까 서로 이야기한 것 중에서 영리한 아이는 학자보다 못할 것이 없다는 
바로 그 점을 생각해 봐. 어린아이가 학문에 대해서 말하려고 한다면 
학자는 아마 그것을 심각하게 받아들이지 않을 테지."
  골드문트는 날카롭게 소리 질렀다.
  "학문에 대해서 이야기하지 않을 때도 당신은 나를 비웃었습니다! 
가령 내 신앙 전체는, 학습에 있어서의 진보를 위한 내 노력은, 
수사가 되기 위한 내 소망은 단지 어린아이의 소망에 불과 하다는 듯이 
당신은 날마다 비웃고만 계셨습니다."
 나르치스는 심각한 표정으로 그를 바라보며 말했다.
  "만약 네가 골드문트라면 나는 너를 진정으로 받아들이겠어. 
그러나 네가 늘상 골드문트라는 법은 없어. 나는 네가 완전한 골드문트가 되기를 원할 뿐이야.
너는 학자도 수사도 아니야. 학자나 수사는 아주 보잘것없는 사람도 될 수 있어. 
너는 스스로가 나보다 학문도 모자라고 논리가도 아니고 
경건한 마음 또한 모자란다고 믿고 있어. 당치 않은 생각이야.
 내가 보기에 너는 너 자신이라는 생각이 모자란단 말이야."
이런 대화가 끝난 후 골드문트는 당황하고 자존심까지도 상해서 돌아갔으나 
며칠 뒤에는 벌써 자신이 앞장서서 계속 대화할 의향을 보였다. 
이번에는 나르치스가 두 사람의 성격의 차이에 관해서 구체적인 관념을 제공하는 데 성공했다. 
골드문트도 그것을 이전보다 더 잘 받아들였다.
나르치스는 열심히 이야기를 했다. 
그는 골드문트가 오늘은 전보다 더 많이 마을 털어놓고 
자발적으로 자신의 이야기를 받아들이고 있으며 
자신이 골드문트를 제압하고 있다는 것을 느꼈다. 
그는 그 성공에 매혹되어서 자신이 의도한 것 이상으로 많은 이야기를 했고, 
또 스스로의 이야기에 도취되어 버렸다.
  "내 말을 좀 들어봐. 내가 너보다 우월한 것은 단 한 가지밖에 없어. 
말하자면 네가 눈을 지그시 감고 졸고 있고 때로는 완전히 잠을 자고 있는데도, 
나는 깨어 있다는 것 뿐이야. 내가 깨어 있다고 말하는 것은 지성과 의식을 가지고, 
자기 자신과 자신의 마음속에 있는 비이성적인 힘이나 충동이나 약점을 감지하고, 
그것을 계산에 넣을 줄 아는 사람을 말하는 거야. 
그것을 배우는 것만이 네가 나를 만난 의미를 가질 수가 있는 것이지. 
골드문트, 너에게는 정신과 자연, 의식과 꿈의 세계가 아주 멀리 떨어져 있어. 
너는 너의 유년 시절을 잊어버리고 있어. 
네 영혼의 깊숙한 곳에서 유년 시절이 너를 빼앗아 가지려고 해.
네가 그것을 들어 줄 때까지 너는 괴로워할 거야. 그것은 이 정도로 하지! 
아까도 말했지만 나는 깨어 있다는 점에서만은 너보다 강해. 
그 점은 너보다 우월하지. 그러니까 내가 너에게 도움을 줄 수 있는 거야. 
하지만 다른 모든 점에 있어서는 네가 나보다 훨씬 우월해. 
네가 네 자신을 발견하면 그 순간 너는 나보다 우월하게 되는 거야."
골드문트는 한편 놀라면서 귀를 기울이고 있었으나,
 '너는 너의 유년 시절을 잊어버리고 있다'는 말을 듣자 
화살에 맞기라도 한 듯 전신을 움츠렸다. 
나르치스는 그러나 그것을 미처 눈치채지 못했다. 
그는 이야기를 하고 있을 동안, 그렇게 하는 것이 말하는 것보다도 
더 잘 이해되기라도 하는 것처럼 한참 동안 눈을 감거나 먼 곳을 보고 있었기 때문에, 
골드문트의 얼굴에 별안간 경련을 일으키며 창백해진 것도 몰랐다. 
  "우월하다구요? 당신보다 내가!"
  골드문트는 중얼거렸다. 
무슨 말을 하기는 해야겠는데 온몸이 굳어서 말이 나오지 않았다.
  "당연한 일이야."
  나르치스는 말을 계속했다.
  "너와 같은 종류의 사람, 강하고 예민한 감각을 가진 사람, 영감을 받은 사람, 
몽상가, 시인, 연애하는 사람, 그와 같은 사람은 우리들 다른 인간, 
즉 정신적 인간보다는 대개 우월해. 너희들의 본성은 모성적이지. 
너희들은 충실한 것 속에서 생활하며, 
너희들에게는 사랑과 힘과 체험할 수 있는 능력이 제공되어 있어. 
우리들 정신적인 인간은 가끔 다른 사람들을 인도하고 지배하고 있는 것처럼 보일지도 
모르지만 충실한 것 속에 살고 있지 않고 메마른 생활을 하고 있어. 
충실한 생활, 과실의 즙, 사랑의 뜰, 예술의 아름다운 나라는 너희들 것이지. 
너희들의 고향은 대지이지만 우리들의 고향은 관념이야. 
너희들의 위험은 감각의 세계에 빠지는 것이지만 
우리들의 위험은 진공의 공간에서 질식하는 것이야. 
너는 예술가지만 나는 사색일 뿐이야. 
그리고 네가 어머니의 품에 안겨 잠들어 있을 때 나는 황야에서 깨어 있어. 
나에게는 해가 비치고 있으나 네게는 달과 별이 비치고 있고 
너의 꿈속에는 소녀가 나타나지만 나의 꿈속에는 소년이 나타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