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知)와 사랑19. - Herman Hesse.
옮긴이: 최달식
펴낸곳: 교육문화연구회
두 눈을 똑바로 뜨고 골드문트는 나르치스가 웅변가처럼
자기 도취에 빠져서 하는 이야기에 귀를 기울이고 있었다.
그 말의 대부분이 송곳처럼 그를 찔렀고
마지막 말을 듣고서는 더욱 얼굴이 창백해져 눈을 감았다.
나르치스가 눈치를 채고 놀라서 물어 보자
몹시 창백해진 골드문트는 힘없는 목소리로 말했다.
"요전에 있었던 일이지만 내가 당신 앞에 쓰러져서 울지 않을 수 없었던 때를 기억하시겠지요.
그런 일이 두번 다시 일어났다가는 큰일입니다.
그랬다가는 결코 내 자신을 용서하지 않을 겁니다.
당신에게도 용서받지 못할 테구요! 이젠 나가 주세요.
혼자 있고 싶습니다. 당신은 저를 두렵게 만드는 말을 하셨습니다."
나르치스는 잠시 망설였다.
그는 말에 이끌리어 다른 어떤 때보다 더 말을 잘한다는 느낌이 들었지만,
지금 그 어떤 말이 친구를 이렇게도 깊이 감동시킨 것과 동시에
어딘지 아픈 데를 찌르기도 했다는 것을 알고 놀랐다.
이런 때 그를 혼자 내버려 두는 것이 어려운 일이었다.
그는 한참을 망설였다. 골드문트의 찡그리면서 괴로운 표정이 그를 재촉하고 있었다.
그는 친구가 원하는 대로, 어지러운 생각을 간직하고
그를 혼자 놔두기 위해 얼른 그 자리에서 떠났다.
골드문트는 혼자 남았다. 전신이 떨려왔다.
이번에는 긴장된 마음을 눈물로 대답하지 않았다.
친구가 불시에 그의 가슴 한복판에 비수라도 꽂은 것처럼,
깊고 절망적인 상처를 받은 감정으로 숨을 간신히 내뿜으며 장승처럼 서 있었다.
심장은 금방이라도 멎을 것처럼 죄어들고 얼굴은 밀납같이 창백해지면서
두 손은 감각을 잃어 꼼짝도 할 수 없었다.
지난번의 비참한 상태의 재현이었으며 그것도 몇 배나 심한 것이었다.
마음속에서는 마치 목을 조르는 듯했고 무슨 흉악스러운 것을,
도무지 참을 수 없는 것을 똑바로 쳐다보지 않으면 안 되는 심정이었다.
그리고 이번에는 구원의 방편인 흐느낌조차
그 비참한 상태를 이기는 데는 아무 도움이 되지 않았다.
오, 성모 마리아여, 어찌 된 일입니까? 무슨 일이 일어났습니까?
내가 살해를 당한 것일까요? 내가 죽인 것일까요? 어떤 무서운 말을 한 것일까요?
그는 헐떡이며 숨을 내뿜었다.
자신의 내부 속에 깊숙이 감추어져 있는 어떤 치명적인 것으로부터 자
신을 구출해 내지 않으면 안 된다는 감정에 가득 찬 채
마치 독약을 마신 사람처럼 가슴이 찢어질 듯 아팠다.
그는 물 속에 빠져 허우적거리는 듯한 몸짓으로 방에서 뛰쳐나가
수도원에서 제일 조용하면서 사람의 그림자라곤 보이지 않는 곳으로 달려갔다.
복도를 빠져나가 계단을 지나 지붕이 없는 곳으로,
하늘이 보이는 곳으로, 그는 수도원의 제일 구석진 피난처,
즉 안마당을 둘러싸는 회랑으로 들어갔다.
몇 개의 파랑색 화단에는 밝은 빛으로 하늘이 펼쳐져 있고
돌과 같이 서늘한 대기 속에는 감미롭고 수줍은 듯한 장미꽃 향기가 스며 있었다.
나르치스는 아무런 예상도 하지 못하고
벌써 오래 전부터 하려고 애태우고 있던 말을 한 것이었다.
즉 그의 친구에게 달라붙어 있는 마귀의 이름을 불러내어 때려눕히고 만 것이었다.
골드문트는 마음속 비밀은 이 말의 어떤 것에 의해서
혼란스러워지고 미칠 듯한 고통으로 뒤덮여 버렸다.
나르치스는 오랫동안 수도원 안을 헤매다니면서 친구를 찾았으나
어느 곳에서도 친구를 찾을 수가 없었다.
골드문트는 회랑에서 마당으로 통하는 둥글고 묵직한 아치형 둘문 아래서 있었다.
그 이치를 받친 둥근 기둥에서 동물의 머리가 조각된
세 개의 석상이 그를 뚫어지게 내려다보고 있었다.
돌로 만든 이 조각은 개인지 늑대인지 분간할 수가 없었다.
밝음으로 인도하는 길도, 이성으로 이르는 길도 없고 오직 고통만이 있었다.
죽음의 공포가 그의 목구멍과 가슴을 죄었다.
반사적으로 위를 쳐다보니 세 마리의 동물의 머리가 사나운 이빨을 내밀고
그의 내장을 물어뜯을 듯 그를 노려보고 있었다.
'이제 나는 죽는구나.' 그는 전율로 몸을 부르르 떨었다.
'저 짐승들이 나를 잡아먹을 거야.'
그는 벌벌 떨면서 기둥 아래에 주저앉고 말았다.
고통이 너무 심해 더 이상 견딜 수가 없었다.
그리곤 의식을 잃어 그가 그렇게도 소망하던 무아의 경지에 빠져들었다.
다니엘 원장은 그날 하루를 그리 유쾌하게 보내지 못했다.
나이깨나 먹은 수사 둘이 그를 찾아와 해묵은 질투 때문에 흥분해서
서로 상대방을 비난하며 욕설을 퍼부었다.
원장은 그들의 말을 한참 동안 듣고 나서 두 사람을 나무랐으나 아무 소용이 없었다.
할 수 없이 두 사람에게 엄한 벌을 내린 다음 엄숙히 물러가라 일렀다.
그러나 소용없는 짓을 했다 싶은 감정이 가슴속에 남아 있었다.
원장은 힘없이 아래채 성당의 예배실에 들어가서 기도를 드렸으나
마음이 개운치 못한 채 다시 일어섰다.
그리고 가물거리듯 풍겨 오는 장미꽃 향기에 이끌리어 회랑으로 들어갔다.
거기서 그는 실신해서 쓰러져 있는 골드문트를 발견했다.
평소에는 그렇게도 아름답고 젊음에 넘친 얼굴이 창백해져서 까무러친 것에 놀라
원장은 슬픈 얼굴을 하고 그를 바라보았다.
유쾌한 날도 아닌데 오늘 또 이런 일이 일어나다니.
원장은 소년을 안아 일으키려고 했으나 너무 무거워서 손을 댈 수가 없었다.
한숨을 깊이 쉬면서 이 노인은 좀더 젊은 수사 두 사람을 불러 소년을 옮기라고 이르고는
곧 의술에 능한 안젤름 신부를 그곳에 보냈으며 동시에 나르치스도 부르러 보냈다.
나르치스는 곧 원장에게로 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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