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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知)와 사랑22. - Herman Hesse.

Joyfule 2012. 9. 17. 09:37
 
  
지(知)와 사랑22. - Herman Hesse. 

옮긴이: 최달식
펴낸곳: 교육문화연구회
밤이 되자 골드문트는 의식을 회복했다. 머리는 텅 비고 어지러웠다. 
침대에 드러누워 있다는 것은 짐작이 갔지만 이곳이 어딘지는 통 알 수가 없었다. 
그는 그런 것을 생각해 보려고도 하지 않았다. 아무래도 좋았다. 
그러나 대체 어딜 갔다 왔을까? 
온갖 것을 보고 부딪쳐 보았던 그 낯선 나라는 어디였을까? 
어딘지 무척 먼 곳에 있었다. 
무엇을, 무슨 이상한 것을, 무슨 으리으리한 것을, 무슨 흉악스런 것을, 
잊어서는 안 되는 것을 그는 보았다. 
그러나 그것을 잊어버렸다. 그곳은 어디였을까? 
거기서 그의 앞에 그토록 커다랗게, 
안타깝도록 즐겁게 솟아났다가는 또 잠기어 버리고 만 것은 무엇이었을까?
오늘 무언가가 찢어져서, 무언가가 발생한 곳을 향해 그는 주의를 집중시키고 있었다. 
그것은 무엇이었나? 아무렇게나 그저 혼돈된 온갖 형태가 솟아올랐다. 
세 개의 머리가 보였다. 장미꽃 향기가 났다. 
아, 얼마나 무서운 고통이었던가! 그는 다시 잠이 들었다.
그는 다시금 눈을 떴다. 
그는 재빨리 미끄러지면 떠나가는 꿈나라가 소멸하는 그 순간에 그것을 잡았다. 
그러고는 그 모습을 재차 발견하고 끝없는 환희에 젖어 있기라도 한 듯 전신을 떨었다. 
그는 보았다. 볼 수 있었다. 그 여인을 보았다. 
커다랗고 눈부신 여인을, 꽃이 만발한 듯한 입술과 빛나는 듯한 머리카락을 가진 여인을, 
어머니를. 동시에 '너는 너의 유년 시절을 망각해 버렸어' 하는 소리를 분명히 들었다. 
그러나 그것은 누구의 목소리였을까? 
그는 귀를 기울이고 생각하다가 마침내 깨달았다. 그것은 나르치스였다. 
나르치스? 그 순간 모든 것을 기억해 냈다. 
이제야 알게 되었다. 아, 어머니, 어머니! 
쓰레기의 산, 망각의 밝고 푸른 여왕 같은 시선으로 
이미 죽어 버린 그 여인은 그를 바라보았다. 
어떻게 말로 표현할 수 없는 그리운 여인이.
침대 곁의 안락 의자에 기대 졸고 있던 안젤름 신부가 눈을 떴다. 
소년이 움직이며 호흡하는 소리가 들렸다. 조심스레 그는 일어섰다.
  "누구세요?"
  골드문트가 물었다.
  "나야, 걱정하지 마. 불을 켤 테니."
  그는 걸어 놓은 등잔에 불을 켰다. 
주름살투성이의 그 인정 많은 얼굴이 불빛에 드러났다.
  "제가 지금 앓아 누운 건가요?"
  소년이 물었다.
  "정신을 잃었었단다, 골드문트, 손을 이리 다오. 맥을 좀 짚어 보자꾸나. 기분은 어때?"
  "좋습니다. 안젤름 신부님, 감사합니다. 
이 친절을 어떻게 갚지요? 이젠 아무 데도 아프지 않습니다. 좀 피곤할 뿐입니다."
 "물론 피곤할 테지. 하지만 곧 다시 잠이 들 게다. 그 전에 포도주나 한잔 마시렴. 
여기 준비한 게 있어. 같이 마실까? 우정의 표시로 말이다."
  그는 조심스레 포도주에다 향료를 넣은 다음 따뜻한 물을 컵에 따랐다.
  "우리 둘은 실컷 한숨 잤단 말이야."
  의사인 신부는 호쾌하게 웃었다.
  "잠에 흠뻑 빠져서 정신을 차릴 수 없는 인간이라고, 
큰 일 날 간호인이라고 날 생각할지 모르지만 우리는 같은 인간이란 말이야. 안 그래? 
자, 이 마법의 음료수를 좀 마시자꾸나. 
얘야, 밤중에 몰래 조금씩 마시는 것만큼 기분좋은 일은 없는 법이거든. 자 건배!"
골드문트는 미소를 지으며 서로 잔을 부딪치고 맛을 보았다.
따뜻한 포도주는 계피와 정향나무 향료가 들어 있고 설탕을 넣어서 달콤했다. 
이런 술은 아직 한 번도 마셔본 적이 없었다. 
지난번 그가 앓아 누워 있었을 때는 나르치스가 그를 보살펴 주었다. 
그때 일이 머리에 떠올랐다.
희미한 등잔불 아래에서 한밤중에 늙은 신부와 
따뜻하고 달콤한 포도주를 마신다는 것은 정말 유쾌한 일이 아닐 수 없었다.
  "아직도 배가 아프냐?"
  노신부가 물었다.
  "아뇨."
  "그래? 나는 복통이라 생각했는데. 그럼 아무것도 아니군 그래. 
혀를 좀 내밀어 봐. 그래 좋아, 이 늙은 안젤름이 또 잘못 짚었는걸. 
내일도 가만히 누워 있어야 한다. 
내가 와서 봐 줄 테니. 포도주는 벌써 다 마셨지? 그래야지. 
틀림없이 효과가 있을 거다. 어디 보자, 얼마나 남았나? 
사이좋게 나누면 반 잔씩은 더 마실 수 있겠구나. 
골드문트! 넌 정말 우릴 얼마나 놀라게 했는지 모른다. 
어린 송장처럼 회랑에 쓰러져 있었으니 말이야. 정말 배는 아프지 않니?"
두 사람은 킬킬대고 웃으며 나머지 환자용 포도주를 사이좋게 나누어 마셨다. 
신부는 농담을 늘어놓았고 골드문트는 감사하고 즐거운 마음으로 
다시 맑아진 눈매로 신부를 쳐다보았다. 
잠시 후 신부는 잠자리에 들기 위해 자리를 떴다.
골드문트는 한참이나 눈을 뜬 채로 누워 있었다. 
환영들이 다시금 그의 마음속에서 서서히 걸어나왔다. 
친구의 말이 다시금 떠올랐으며 영혼 속에서 금발로 반짝거리는 여인이, 
어머니가 또 나타났다. 
그 모습은 흡사 미풍과도 같이, 
생명과 온기, 용기와 예감의 구름처럼 그의 가슴속으로 스며들었다. 
아, 어머니! 내가 어떻게 어머니를 잊어버릴 수 있었단 말입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