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知)와 사랑21. - Herman Hesse.
옮긴이: 최달식
펴낸곳: 교육문화연구회
마지막으로 오늘 일어난 일에 대해서 다시금 질문을 받자 나르치스는 말했다.
"오늘 골드문트가 빠져들어간 걱정은 제가 의도한 바가 아니었습니다.
제가 그의 생각을 일깨우게 한 것은 그가 자기 자신을 인식하지 못한다는 것,
자신의 유년 시절이며 자신의 어머니를 망각했다는 것 때문이었습니다.
제가 한 어떤 말이 그의 마음에 충격을 주고 제가 벌서 오랫동안
싸움의 목표로 하고 있었던 암흑 속을 밀고 들어간 테 불과합니다.
그는 마치 방심한 사람처럼 저인 것은 인식하나
자기 자신인 것은 인식하지 못하는 듯이 저를 쳐다보았습니다.
저는 그에게 자주, 너는 잠을 자고 있다, 정말로 깨어 있지 않다, 하고 말해 주었습니다.
지금 그는 깨어났습니다. 저는 그것을 의심하지 않습니다."
그는 훈계는 받지 않고 물러났으나 당분간 골드문트를 찾아가는 것은 금지당했다.
그 동안 안젤름 신부는 정신을 잃은 소년을 침대에 눕히고 옆에서 지켜보았다.
무리한 방법을 써서 의식을 돌아오게 한다는 것은 좋은 방법이 아닌 것 같았다.
소년이 병세는 무척이나 좋지 못했다.
인정 많은 노인은 주름살투성이의 선량한 얼굴로 소년을 내려다보았다.
그러고는 우선 맥을 짚어 보고 심장에 귀를 갖다대었다.
이 소년은 확실히 무슨 뜻하지 않은 어떤 것,
이를테면 찬 것을 먹었거나 아니면 무슨 독초를 먹었다고 생각했다.
그런 것을 추측하면서도 혓바닥을 볼 수는 없었다.
안젤름 신부는 골드문트를 좋아했으나
그의 친구인, 너무나 젊고 조숙한 그 조교사 나르치스는 좋아하지 않았다.
결국 큰 일을 저지르고야 말았다.
나르치스가 이 어리석은 사건이 공범이라는 것이 확실했다.
이다지도 귀엽고 시원한 눈매를 한 소년이, 이다지도 귀여운 자연이 아들이,
하필이면 저 거만한 학자, 이 세상의 생명이 있는 어떤 것보다도
그리스 어를 더 소중히 여기고 있는 공허한 문법학자와 친하게 되었단 말인가.
오랜 시간이 흐른 뒤 문이 열리면서 원장이 들어왔을 때에도 안젤름 신부는
여전히 자리에 앉아서 정신을 잃고 있는 소년의 얼굴을 가만히 들여다보고 있었다.
얼마나 귀엽고 앳되고 사심 없는 얼굴인가!
이렇게 옆에 앉아서 도와주어야만 하는데도 그럴 수가 없다니! 원인은 확실히 복통일 것이다.
향료가 든 포도주를 따뜻하게 데워먹이고 아마 대황을 달여먹여야 하리라.
그러나 유록색으로 창백해지고 찌푸린 얼굴을 들여다보면 볼수록
그의 마음에는 의혹이 솟아나는 것이었다.
안젤름 신부는 경험이 있었다.
오랜 생애를 통해서 그는 악마에 홀린 사람을 몇 번이나 본 일이 있었다.
그는 그 의심이 되는 증세를 입에 담기를 주저했다.
좀더 참을성 있게 관찰해 보는 게 좋겠지.
하지만 이 가엾은 소년이 악마에 홀린 것이 사실이라면 그 범인을 찾아내어
가까이 할 수 없도록 막아야 한다고 신부는 생각하고 있었다.
원장은 한걸음 다가서서 환자를 들여다보다가 한쪽 눈꺼풀을 젖혀 보았다.
"깨워도 괜찮을까요?"
원장이 물었다.
"좀 기다려 보는 게 좋을 듯합니다.
심장은 거의 정상입니다만 아무도 가까이해서는 안 되겠습니다."
"위험하지는 않겠죠?"
"그런 것 같지는 않습니다.
상처도 없고, 타박상을 입었거나 어디서 떨어진 흔적도 보이지 않습니다.
단지 정신을 잃었을 뿐입니다. 아마도 복통이 아닐까 생각합니다.
통증이 너무 심하면 의식을 잃을 수도 있으니까요.
만약 약물 중독이라면 열이 높을 것입니다. 아니, 다시 눈을 뜰 것입니다.
생명에는 별 지장이 없으니까요."
"혹시 마음의 상처에서 비롯될 병은 아닐는지요?"
"그럴 수도 있겠지요. 혹시 아는 사람이 있는지 모르겠군요.
심한 충격을 받았다든지 누가 죽었다는 통지를 받았거나, 심한 싸움을 했거나
모욕을 받았거나 한 것이 아닐까요? 그걸 알면 모든 것은 해결할 수 있을 텐데요."
"모르겠는걸요. 아무도 가까이 하지 못하도록 주의를 해야겠어요.
그애가 눈뜰 때까지 곁에 있어 주시오.
위험하거든 밤중에라도 상관없으니 나를 부르도록 하시오."
나가기 전에 원장은 한 번 더 환자에게로 몸을 굽혔다.
원장은 이 소년의 아버지와 이 예쁘장하고 밝은 금발의 소년이 수도원에 온 그날
그리고 모두가 얼마나 그를 금세 좋아하게 되었나 등 여러 가지 기억을 더듬어 보았다.
원장도 이 소년을 보는 것이 즐거웠다.
그러나 나르치스가 한 이야기도 사실은 옳았다.
이 소년의 어떤 면에서도 아버지를 머릿속에 그리게 할 수 없었다.
아, 근심 걱정이 없는 곳이 어딘가! 우리들의 행위는 얼마나 무력한가!
이 가엾은 소년에 대해 소홀한 점이 내게는 없었단 말인가!
그에게 적당한 고해 신부가 있었을까?
수도원 안에서 나르치스 외에는 아무도
이 학생에 대한 사정을 알고 있지 못했는데 그래도 괜찮단 말인가?
아직 수습 수사의 처지에 있는 사람이,
수사도 아니고 성직도 얻지 못한 사람이 그를 도울 수 있었단 말인가?
사물을 보고 생각하는 것에도 불쾌한 우월감이 아니,
적개심 같은 것까지도 가지고 있는 사나이가,
하지만 그 나르치스도 상당히 오래 전부터
잘못된 대접을 받고 있지 않다고 누가 장담할 수 있단 말인가?
나르치스가 복종이란 가면의 배후에서 악의를 숨기고 있었는지 아닌지,
잘못 생각한 것이겠지만 혹 이교도가 아니었는지 누가 알겠는가?
이 젊은 두 사람이 장차 어떤 사람이 되든 거기에도 원장 자신의 책임이 있었다.
|